좋은 말씀/마이클호튼

간증들’은 텔레비전에 등장하고 있는 삼푸 선전과 얼마나 다른가 / 마이클 호튼

새벽지기1 2017. 12. 18. 07:22


복음주의가 더 대중적이 될수록 복음주의는 점점 현대 세계의 모양을 띄게 되고, 그 자신이 바꾸고자 노력하고 있는 바로 그 문화의 포로가 되어 간다. 복음주의자들은 자기들의 이웃들이 거리의 한쪽 구석에 성인용 도색잡지 서점이 하나 열리기를 바랄 경우 세속주의가 침범해 들어왔음을 인식할 수는 있지만, 자신들의 신념들과 전제들과 전략들이 세속적인 태도들과 세속적인 확신들에 휘돌아가고 있을 때는 그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교회는 도전보다는 일반 사회를 더 많이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뒤범벅이며 일반 사회만큼이나 혼란스럽다”(쥬드 다우거티). 복음주의 교회들이 얼마나 크게 시장에 의해 지배 당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라. 우리의 ‘간증들’은 텔레비전에 등장하고 있는 삼푸 선전과 얼마나 다른가? 둘 다 실용주의(‘내게는 효과가 있었으니까 당신도 한번 써 보라’)와 나르시시즘(자기 성취)에 근거해 있다.

 

사도들의 증거는 이것이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합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신 바 된 이시니라”. 그들의 증거는 ‘가슴속에 타오르는 열정’이나 위기 체험이 아니라 법정에서도 받아들여질 수 있는 증언이었다. 그 증언은 성육하신 하나님이라고 주장했던 한 사람의 기적들과 교훈들과 죽음과 장사된 일과 부활하고 승천한 일에 대하여 증인된 삶을 살았던 다양한 사람들의 정상적인 증언이었다. 우리의 주관적인 증언이 아니라 바로 이 증인들의 증언이 우리 교회들과 전도에서 최우선적인 자려를 차지해야 하는 것이다.

 

존 리스의 말이다. “많은 설교들이 도덕적인 권면들이다. 이런 도덕적인 권면들은 로타리 클럽이나 키와니스 클럽에서 훨씬 더 세련되게 전달될 수 있는 권면들이다. 많은 설교들이 사회에 대한 정치적이며 경제적인 판단들이다. 그런 판단들은 정치 집회들에서 훨씬 더 큰 지혜와 열정을 가지고서 제시되고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많은 설교들이 개인적인 치유를 제공하고 있는데, 이것들도 잘 훈련받은 심리치료사들(정신과 의사들)이 더 잘 제공해 줄 수 있는 것들이다.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으나 설교자만이 가질 수 있는 -교회만이 가질 수 있는-유일한 기술은 신학이다. 특별히 설교와 가르침과 목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는 기술이다. 이것이 바로 목회자와 교회가 세상에게 제공해 줄 수 있는 있는 기술이다. 다른 곳에서 더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으려고 누가 교회에 오겠는가?”

 

우리는 지금 초월성을 가지고서 세속주의와 대결하고 수직적인 차원(하나님)을 가지고서 수평적인 차원(자신과 타인들)과 대결하는 대신에, 오히려 세속과 수평적 차원을 가지고 놀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점에 있어서 그다지 영악스럽지도 못하며 잘 하지도 못해서 우리가 ‘적절한 연계성’을 찾아 달려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연결점을 상실하고 말았다. 교회는 이 부질없는 세대가 경합하고 있는 목소리들을 뒤쫓아 다니기를 중단하고 우리 자신의 마음 속보다는 훨씬 더 실재적인 다른 곳에서 흘러나오는 찬란한 금빛 곡조를 들을 때에만 세상과의 연계성을 찾게 된다.

 

- 마이클 호튼, 『세상의 포로된 교회』, pp 97-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