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마이클호튼

개인의 영적인 자서전이 나사렛 사람의 생애와 시대를 대신해 버렸다/ 마이클 호튼

새벽지기1 2017. 12. 14. 12:52


전통적 복음주의자들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종교개혁의 슬로건을 내세우고 있지만, 자기 연민과 주관주의의 압력들은 예배의 대상에 있어서도 하나님과 자아를 바꾸어 버렸을 뿐만 아니라 실재에 대한 해석상익 권위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자아와 바꾸어 놓았다. 성경이 하나님의 성품(고유한 신학)과 사람(인간론)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원 행동(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에 대한 명제적 진술들로 가득 차 있는 한, 신학에 대한 거부는 곧 성경에 대한 거부다.

 

성경은 하나님과 자아와 인생 및 역사의 의미에 대한 핵심적인 물음들에 대해 단호하게 선언한다. 성경은 궁극적인 문제와 그 해결을 우리가 정의해 나갈 때 우선적인 결정권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사태들을 정의해 나가는 과정이 바로 신학이다. 만약 우리가 신학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이나 계시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했을 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신문이나 텔레비전이다. 그것들이 우리의 실재, 우리의 현실을 대변하게 된다.

 

복음주의자들은 융과 매슬로(Maslow)가 “휴머니즘(인본주의)적인 심리학” 아버지들이라고 비판하고 있지만 되려 기독교계의 출판물이나 설교, 방송사업 전체가 “마음 안에 있는 신”과 인격적이며 주관적이며 내부지향적인 체험에 쏠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거역한 우리의 객관적인 죄와 죄책을 위해 거의 이천 년 전에 예루살렘 성 밖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는 일은 이제 멀리 사라져 버렸다. 이제 만약 종교라는 것이 어떤 ‘실천적인’ 의미를 가지려고 한다면, 종교는 나 자신을 좀더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나를 내 속으로 들여보내 주어서, 영적인 체험들을 제공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많은 복음주의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간증들’을 생각 보라. 개인적인 체험들을 ‘나누는 일’이 공동기도와 공동 성경 연구, 예배와 증거를 대신하고 있다. 개인의 영적인 자서전이 저 나사렛 사람의 생애와 시대를 대신해 버렸다. 너무나도 흔히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 의 행하심과 죽으심에 대해서보다는 목회자와 그의 삶이 성숙되는 것과 영성 캠프에서의 영적 위기에 대해 더 많이 배우고 있다. 그런 사실은 토크쇼가 독서를 대체해 버리고, 우리가 실제로 알 수 있는 유일한 내용은 우리 자신의 체험일 뿐인 그런 세태를 반영하고 있다.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조차도, 객관적인 진리로부터 후퇴하고 있는 현대 문화에 타협하고 있는 현실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제임스 헌터는우리가 ‘알려진’ 것들로부터 ‘신념’으로 이동했으며, 그리하여 마침내, 그 궁극적인 목적지인 ‘감정(느낌)에 도달하기까지 ‘종교적 견해’ 로 저락(低落)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만약 초대 교회가 ‘그렇게 기록되었다.’ 는 확신을 변호했으며, 중세 교회가 ‘교회가 그렇게 말한다.’는 확신을 변호했다면, 오늘날의 복음주의자들은 흔히 ‘내가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슬로건에 호소하고 있다.

 

오늘날의 요구는 설교가 반드시 ‘실천적’이어야 하며 매일의 삶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목표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더 행복한 삶이며 인생을 좀더 성취하는 삶인가를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제임스 헌터가 지적하고 있다시피, “객관적이며 보편적인 진리 선포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진리의 주관적 적용에 대한 관심으로 강조점이 변천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이 구절이 무슨 뜻인가?’ 를 묻지 않고 “이 구절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묻고 있다. 자아는 만물의 중심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만물의 척도’가 되었다. 그리고 만약 이것이 바로 ‘세속적 휴머니즘’의 정의라고 한다면, 복음주의자틀은 다른 것들은 몰아 내고 있으면서도 이 미끼만은 꿀꺽 삼켜 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구속 자체에 대하여 변하고 있는 정의들에 대해 우리의 눈길을 돌리도록 만든다. 죄가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범죄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라고 재정의되고, 구원이 세속주의의 사상들에 따라, 심리학적인 범주 안에서 재정의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는 옛날 문제들을 대신해서 전적으로 새로운 문제들이 등장하고 있으며, 그 문제들에 맞추어 새로운 해결책들이 등장하고 있다.

 

만약 죄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서는 것이 문제라면, 속죄와 칭의가 그 해결책이다. 그러나 만약 기능 장애와 낮은 자긍심과 채워지지 않은필요들이 궁극적인 문제라고 한다면, 그에 대한 해결책들은 신학적 용어로가 아니라 치유적 용어로 진술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그저 현대의 청중을 위해 기독교 메시지를 ‘상황화’ 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지를 현대의 청중에 맞추어 변형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확하게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현실이다. 미국인 인구의 다섯 명 가운데 네 명 이상이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선하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들은 저 밖에 있는 ‘세속적 휴머니스트들’일 뿐이지 않은가? 아니다. 그렇지가 않다. 복음주의 정통성을 구성하는 ‘중생한 크리스천들’ 의 77%가 인간 본성에 대한 이런 세속적 견해를 받아들이고 있다. 실제로, 구원에 이르면, ‘중생한’ 복음주의적 크리스천 다섯 명 가운데 네 명은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들을 도우신다”라고 믿는다. 실제로는, 복음주의자들이 비기독교들보다 이런 ‘자수성가 하라.’는 자력 성공 프로그램에 더 동의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구속받는 일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보다는 자신의 선함에 의존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진정, 이런 생각의 틀 가운데서는 예수님은 그저 일종의 도덕적인 안내자로서의 역할 외에는 전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물론 우리는 이것이 신학적으로 자유주의이며 세상에 있을 때는 세속주의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내 생각에, 우리 복음주의자들에게 조지 바나가 “우리 교회들에서는 현재 구원의 본질에 대해 어떤 가르침들이 가르쳐지고 있습니까?” 라고 한 질문을 물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 마이클 호튼, 『세상의 포로된 교회』, pp 87-92

(청교도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