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마이클호튼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에서 지혜와 순수성을 배워야 한다/ 마이클 호튼

새벽지기1 2017. 12. 19. 07:51


구 로마의 귀족들과 교회 지도자들 간에 긴장이 고조되었을 때, 북아프리카 히포의 주교였던 어거스틴은 그의 대작인 「하나님의 도성」(The City of God)을 써서 “하나님의 도성의 설립자보다도 자신들의 신들을 선호하는 자들에 대항하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도성”을 변호하려고 시도했다. 어거스틴, “나는 인류를 두 줄기로 분류한다. 한 줄기는 인간의 기준을 가지고 살고 있는 사람들이며, 다른 줄기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두 도성이라는 말로 내가 뜻하는 바는 두 개의 인간 사회다. 하나는 영원히 하나님과 더불어서 다스리도록 예정된 사람들의 사회이며, 다른 하나는 마귀와 더불어서 영원한 처벌에 처해질 운명을 받은 자들의 사회다.”

 

크리스천들은 인간의 도성에 활발하게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하며, 그 도성을 도와 주고, 건설하고, 유지하며 그 열매를 즐겨야 한다. 왜냐하면 문명은 타락의 저주가 아니라 창조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물론 타락은 모든 지상적인 유토피아들을 끝내 버렸으며, 정부가 필요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성이 지상적인 영광을 초월하는 한, 그 성은 복음의 지식을 가지고서 무너져 내리는 제국의 조각을 헤쳐 나가면서 세상 끝까지 (비록 박해를 받을지라도) 당당하게 행진해 나간다. 제롬과 같은 많은 사람은 침략해 들어온 그 ‘야만인들’ 을 로마의 적으로 보았으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그들을 하나님의 도성에 ‘들어오게 될 시민들’로 보았다.

 

어거스틴은 그 침공을 선교의 기회로 보았다. 그러나 제롬과 다른 사람들은 수도원 등지로 도피했으며, 여전히 여타의 사람들은 마치 로마가 하나님의 도성이라도 되는 양, 로마를 위해 싸웠다. 그렇지만 어거스틴은 땅끝이 우리에게 다가온다면, 얼마나 빨리 기독교가 땅끝 까지 이를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했다! 그 침공은 교회를 위해서는 일종의 기회였다. 왜냐하면 교회는 구원을 가져다주는 복음을 땅끝에까지 가지고 가야할 사명이 있기 때문이었다. 교회는 어떤 특정한 문화나 제국을 변호할 사명이 없다. 헨리 채드윅, “어거스틴은 결코 로마제국의 이해관계들과 하나님나라의 이해관계들이 동일하다고 가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로마를 공격했던 야만족들은 하나님의 도성에 반드시 적들은 아니었다. 새로운 야만족의 주인들을 개종시키는 일은 서방 교회의 임무일 수가 있었다" 결국, “인간의 참된 목적은 이 인생 너머에 존재하고 있으며 ...... 교회는 하늘의 나라를 위해 존재하고 있고, 오직 하나님만이 택함받은 자들을 아신다. 그래서 역사의 의미는 밖으로 드러난 사건들의 흐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죄와 구속이라는 감추어져 있는 드라마 가운데 있다고 어거스틴은 주장했다.”

 

오늘날의 복음주의 세계는 『하나님의 도성』만큼 더 지혜롭고, 시의 적절하며, 성경적으로 풍성한 기독교 고전을 읽을 수는 없을 것이다. 초대 교회의 크리스천들이 한 편으로는 영지주의적이며, ‘피안적이며, 타세적인’ 수도원주의를 피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크리스천들이 국가를 떠맡는 일을 피했던 것처럼, 어거스틴은 복음의 순수성을 보전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서방 교회가 두 왕국에 대한 건강한 성경적 견해로 향하도록 이끌고자 노력했으며, 그저 인간적이며 일시적인 세상적인 관점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을 통해 시대를 바라봄으로써 기회를 활용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다.

 

- 마이클 호튼, 『세상의 포로된 교회』, pp 116-119

(청교도의 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