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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예수 그리스도, 우리 의지의 주(2)

새벽지기1 2016. 7. 30. 07:26


예수 그리스도, 우리 의지의 주


성경은 어떤 점에서 두 개의 동산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쩌면 두 개 이상의 동산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하늘이 일종의 정원 도시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첫째 동산은 에덴 동산인데 거기서 아담은 자기 창조주의 의지를 거스려 자신의 의지를 행사했다.


그러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둘째 아담인 예수는 자신의 의지를 그의 하늘 아버지의 의지에 복종시켰다. 물론 그 복종은 십자가 위에서 완성되었다. 여러분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고뇌에 대한 이야기를 기억하는가? "내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 말은 몹시 중요하다. 나는 이 말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요약하고자 한다.

 

① 두 가지 의지가 있다는 사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여기에는 두 가지 의지가 있다. 하나는 하나님 아버지의 의지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동시에 사람의 아들(人子)인 예수의 의지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 분의 의지대로 창조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자동적인 반응을 하도록 설계된 컴퓨터가 아니다. 인간은 유전적인 본능에 의해 제한되는 단순한 동물이 아니다. 인간에게는 지성과 의지가 있다. 인간, 즉 남성과 여성은 자신을 믿는 인격체이다. 우리 각자는 우리 자신의 지성과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두 가지 의지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곧 하나님의 의지와 나의 의지가 존재하는 것이다.


② 두 가지 의지의 이상적인 관계

인간의 의지와 하나님의 의지의 이상적인 관계는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은‐신학자들조차도‐반역을 찬성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부모에게서 독립하려는 것이 아이들 성숙의 일부인 것처럼, 사람은 하나님께 반역하고 또 독립을 꾀할 때만 성인이 된다고 말한다. 일반 사람들과, 신이 죽었다고 주장하는 신학자들은 인간이 성인이 되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우리 자신의 자율을 선포하면서 주 하나님을 제거하는 것은 성숙이 아니라 죄라고 말한다. 성경에서는 바로 이것이 죄라고 말한다. 우리의 자율을 선포하면서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은 죄다.


에덴 동산의 아담은 창조주에게 반역하는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다. 또한 이스라엘도 선지자들을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완고하게 거부하는 어리석음을 범했으며, 오늘날의 우리도 똑같은 죄와 어리석음을 법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의지와 하나님의 의지의 이상적인 관계는 반역이 아니다. 그러나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에 흡입되는 것 또한 이상적인 관계는 아니다. 이것은 동양 신비주의의 특징으로 말미암은 오류이다. 힌두교도건 불교도건 동양의 신비주의자는 자신의 개체성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또 하나님‐ '최고의 존재', '실재', '세계의 영혼' 등 명칭이야 무엇이든 간에‐에 대항하는 그 자신의 존재를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동양의 신비주의자는 열반에 몰입되고 또 존재의 대해(大海)속에 있는 물방울같이 또는 태고의 불길 속에 있는 불꽃같이 동화되기 위하여 자신의 정체를 상실하기를 갈망한다. 그것은 기독교적이 아니다. 기독교에도 신비주의가 있긴 하지만, 동양의 신비주의와는 전혀 다르다.


하나님은 우리의 분명한 개체성을 창조하셨으며 우리는 그것을 영원히 즐길 것이다. 여러분은 여러분 그대로 남아 있게 되며 나는 나 그대로 영원히 남아 있게 된다. 신성에 흡수되어 우리의 개체성을 상실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올바른 길이 아니다.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인간의 의지의 관계는 반역도 아니고 흡수관계도 아니다. 그것은 복종, 그것도 자발적인 복종이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거슬러 자신의 의지를 행사하지도 않으셨고, 반면 자신의 의지를 거두어 들여 아버지께 흡수되기를 갈망하지도 않으셨다. 그 분은 자신의 의지를 계속 지닌 채 그것을 아버지께 복종시키셨다.

제자들이 주인보다 높을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의지의 반역이나 소별이 아니라 의지의 자발적인 복종 가운데서 우리의 참된 정체를 발견한다. 그 분은 말씀하셨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 분은 주기도문에서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것이 바로 자유 의지의 의미이다.


자유 의지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겠는가? 자유 의지는 모든 권위와 제한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의지가 아니다. 자유 의지는 신적 의지에 흡수되기 위하여 자신의 존재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자신을 드림으로써 자신에로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다.

우리는 두 가지 의지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 이상적 관계 ‐ 하나를 다른 것에 복종시키는 것 ‐ 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이제 끝으로 이에 대한 이유를 알아 보자.

 

③ 나의 의지를 하나님께 복종시켜야만 하는 이유

우리는 모두 반역적이지 않은가? 우리는 이를 갈고 또 주먹을 불끈 쥐면서 "왜 나의 의지를 하나님께 복종시켜야 한단 말인가?"라고 말한다. 여러분은 겟세마네 동산에 대해 묵상해 본 적이 있는가?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아버지시여, 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요한복음을 보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고뇌하신 후에 군병들이 그를 체포하러 오고 베드로가 방어하려 했을 때,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이 잔을 내가 어찌 마시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에 복종시키는 이유이다. 그것이 우리 아버지의 의지이며 또 그 분의 의지는 '선하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분은 아버지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의 사랑은 온유하며 동정적이다. 그는 최선의 것 외에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신다. 그는 우리가 우리의 잠재력을 그를 섬기는 데 사용함으로써 인간으로서 완성되기를 원하신다. 그의 의지는 적극적이고 건설적이며 사랑에 찬 것이다. 그것이 우리 아버지의 의지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에 반역하는 것은 몹시 어리석은 짓이다. 왜냐하면 나의 아버지의 뜻에 복종함으로써 나는 나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내 일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고 그의 사역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는가? 그것이 내가먹고 마실 것이다. 그것이 나를 만족케 하는 것이다. 나를 새롭게 하는 것은 그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십자가를 의미했다. 그것은 십자가의 비통한 고뇌를 가리킨다. 그것은 역설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리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발견했다. 우리도 이와 똑같이 증언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에 반역하는 태도만큼 비참한 것은 없다. 그리고 당신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를 큰 기쁨과 평안은 없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즉 우리의 인격적 성숙‐은 우리의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예수님의 주권적인 사랑의 통치, 곧 주되심 아래 종속시키는 것이다.

참고 서적----

존 스토트 -- 그리스도인의 사고 활용과 성숙 (한국 IVP)

필립 스위하트 -- 그리스도인과 정서의 성숙 (한국 IVP)

로버트 멍어 --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 (한국IVP)

레날드 맥컬리 · 제람 바즈 -- 인간, 하나님의 형상(한국 IV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