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온전한기독인

[1-3] 예수 그리스도, 우리 감정의 주

새벽지기1 2016. 7. 28. 15:23


예수 그리스도, 우리 감정의 주



온전한 그리스도인, 통합된 그리스도인은 반지성적이지 않으며 반감정적이지도 않다. 그는 하나님이 인간을 합리적인 피조물로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감정적인 피조물로 만든셨음도 인정한다. 그 분은 우리에게 사고할 수 있는 지성을 주셨으며, 인간 생활을 풍부하게 하는 깊은 감정도 주셨다. 지성의 올바른 활용을 강조하고 반지성주의를 거부한다고 해서, 메마르고 무미건조하며 냉랭한, 인간 이하의 지성주의를 옹호하고 있다고는 생각 말라. 나는 추호도 그러한 지성주의를 옹호하지 않는다.


나는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부끄럼 잘 타는 앵글로 색슨계 사람이지만, 개인적인 이야기를 잠시 하고자 한다. 나는 영국 공립 학교라는 이상한 교육 기관들 중 한 군데에서 교육받았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그 학교는 실은 사립 학교이다. 그리고 영국 공립학교의 철학은, 적어도 내가 재학하고 있을 당시에는, ‘굳은 윗입술의 철학'이라 일컬어졌다. 여러분도 경험한 적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떤 감정을 느끼기 시작할 때 최초로 나타나는 징조는 윗입술이 조금 떨리는 것이다. 그 곳에서 나는 강인함, 용기 및 자기 절제라는 남성적 덕목을 함양하도록 교육받았다. 어떤 감정도 내색하지 말아야 했다. 우는 것은 여자와 어린아이들이나 할 일이지 남자가 할 일은 아니다. 그런데 회심하고 나서 신약 성경을 읽었을 때, 나는 예수님이 사람들 앞에서 두 번이나 눈물을 흘리셨다는 것을 발견했다 ‐ 그렇다면 예수님은 영국 공립 학교에서 자라나지 않으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나는 내속에 순전한 감정이 차지하는 자리가 있음을 배우기 시작했다. 감상주의적이거나 인위적으로 감정을 짜 내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것 말이다.


나는 우리의 감정 처리 방식을 염려한다. 그리고 텔레비전이 우리의 감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우려한다. 폭력, 유혈, 전쟁, 잔혹한 장면, 전율할 만한 모습을 한 굶주린 어린아이들이 텔레비전 화면에 비친다. 감정에 대한 이러한 공격은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이며, 결과적으로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 중 하나를 행하게 된다. 즉 일어나 스위치를 끄거나, 아니면 계속해서 텔레비전 화면을 보면서 내면에 있는 감정의 스위치를 내려 버리는 것인데 후자가 훨씬 더 위험하다. 우리는 이러한 공포, 잔혹, 기아의 장면들을 보고서도 더 이상 감동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감정에 대해 저지르고 있는 극히 심각한 사건이다.


나는 최근에 두 편의 영화를 보고 크게 감명 받았다. 하나는 베르그만(Bergman)의 "가을 소나타"(Autumn Sonata)로 여러분 중에도 이 영화를 본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딸이 그의 자식도 사랑하지 못하는, 애정 박탈의 사이클을 어머니, 딸, 손자의 삼대를 통해 영상화한 매우 감동적인 작품이다. 또 크래이머 대 크래이머(Kramer vs. Kramer)라는 영화도 보았다. 이는 이혼한 부부가 어린 자녀의 양육권을 놓고 실랑이 하는 내용을 절도 있게 영상화한 감동적인 영화이다. 이 두 영화 모두 영화가 끝나자마자 사람들이 일어나 밖으로 나가면서 왁자지껄 떠들어했다. 그러나 나는 자리에서 일어설 줄을 몰랐다. 이 두 영화 중 한 편은 자막이 다 올라간 뒤에도 나로 하여금 눈물을 주체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 때 나와 동행한 젊은이와 학생들도 모두 너무 큰 감동을 받아 5분 가량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우리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몰랐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기도로 표출하기 위하며 교회로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어떻게 사람들은 이런 영화를 보고서도 감동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정녕 예수님은 우리 감정의 주님이신가?


한편 반대 극단에는 그 어느 것에도 제약을 받지 않는 감정주의(emotionalism)를 믿는 사람들이 있다. 고대 세계에는 결실의 신인 바커스 또는 디오니소스를 추종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열광적으로 춤을 추고 날뛰며, 또 술과 음식과 섹스에 몰입하면서 그들의 신을 찬양했다. 기독교 초기 시절의 일부 영지주의자들은 물질과 육체가 악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아무런 제한 없이 그것을 즐기고 탐닉해도 좋다고 주장했다.


개방성으로 치닫고 있는 현대의 추세는 종종 프로이트 탓으로 치부된다. 물론 나는 언제나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프로이트주의 지지자들은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일반인들은 감정을 잠재의식적으로 억압하는 것과 감정을 억제하는 것의 차이를 종종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한다. 현대 실존주의는 이런 생각을 더 부추겼다. 실존주의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진정한 인간이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진정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의 것을 나 자신의 방식으로 행해야만 하며, 당신은 나를 그냥 내버려두어야 한다. 나는 나 자신이 되고 또 그 어느 것에도 구속받지 않고 나 자신을 표현하고자 한다.” 현재 일부 기독교 운동은 진리를 희생해 가면서까지 영적인 체험을 지나치게 추구하고 있다. 그들은 “오, 너희 복음주의는 너무 이지적이다. 나는 창가에 와 닿는 종교를 원한다. 나는 머리보다는 가슴을 더 좋아한다.”고 말한다. 이 둘을 상반된 것으로 여기는 것은 정말 애석한 일이다. 우리에게는 둘 다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지적이면서 동시에 감정적인, 즉 우리의 인간성 양쪽 부분을 모두 충족시키는 성경적인 기독 신앙이 필요하다.


여기에 대해 한 가지 더 말해 보자 우리의 지성과 마찬가지로 감정도 타락했다. 나는 전적 부패(total depravity)를 믿는데 여러분 또한 믿기 바란다. 전적 부패란 성경적 교리로, 보통 이것을 부인하는 이유는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교리는 모든 죄인이 나쁠대로 나쁘다는 것, 즉 전적으로 완전히 부패했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믿는 사람 그 누구도 이렇게 배운 적이 없으며 이것은 명백히 사실이 아니다. 우리가 모두 술고래는 아니다. 모두 간음자는 아니다. 모두 살인자는 아니다. 인간 모두가 나쁠 대로 나쁜 것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전적 부패의 의미가 아니다. 부패의 전체성은 부패성의 정도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부패성의 범위를 언급하는 것이다.


제임스 패커(James Packer) 박사는 이를 탁월하게 요약하였다. 그는, 전적부패란 모든 사람이 나쁠 대로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선해야 할 만큼 선한 자는 아무도 없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요점은, 타락이 우리에게 전체적으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부분, 즉 우리의 지성, 우리의 감정, 우리의 양심, 우리의 성, 우리의 의지에 영향을 끼쳤다. 인간성의 모든 부분이 타락으로 인해 비뚤어지고 왜곡되어 버렸다. 우리의 감정은 무엇이 선한지에 대하여 전혀 신뢰할 수 없는 길잡이가 되었다. 우리의 지성과 감정은 신뢰할 수 없다. 우리 혼자 힘으로는 올바르게 사고할 수 없다. 우리 혼자 힘으로는 올바르게 느낄 수도 없다.“내 생각은 분명 맞다” 또는 “내 느낌은 분명 옳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내가 사고하고 느끼는 것은, 무엇이 선하고 올바른지를 분별하는 데 매우 주관적이고 위험스러우며 신뢰할 수 없는 기준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지성은 그리스도의 주 되심 아래 종속되어야만 하며, 우리의 감정 또한 그리스도의 주 되심 아래 종속되어야만 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지성을 통제하셔야만 하며, 또한 우리의 감정을 통제하셔야만 한다.


여러분이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두 가지 예를 들어 보겠다. 우리의 지성은 우리의 감정을 검열해야만 한다. 분노에 대해 생각해 보자. 분노에는 의로운 분노가 있고 불의한 분노가 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나와 있다. 하나님은 의로운 분노를 발하시며, 또 악에 대해 분노하신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로 인해 화를 내셨으며 성경에는 그 분의 분노에 대해 한두 번 언급되어 있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고 말한다. 의로운 분노가 있긴 하지만, 화와 진노는 신약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금해진 육신의 죄 중 일부이시도 하다. 우리 내부에서 분노의 감정이 일 때, 우리의 지성을 사용하여 그것을 평가해 보고 난 뒤 ‘이것이 의로운 분노인가 불의한 분노인가? 처음에 나를 화나게 한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아 내가 화를 내는 것이 옳은가?’라고 자문하기 전에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느끼는 분노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검토되는 것이 필요하다. 때때로 우리는 분노를 표출할 수도 있다.


또 하나의 예로서 사랑, 특별히 이성간의 사랑을 들어 보자. 나는 여러분에게 이른바 사랑에 빠진다는 것에 의해 압도되고 또 그것 자체가 결혼을 위한 적합한 기초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경계하라고 촉구하고 싶다. 결혼에는 사랑 말고도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 있다. 이를테면 지적 적합성 같은 것들 말이다. 즉 내가 사랑에 빠진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인가, 헌신되고 성숙하며 장성한 그리스도인인가? 그 사람은 내 자녀들에게 훌륭한 아버지 또는 어머니가 될 것인가? 그 사람은 나의 훌륭한 동반자가 되겠는가? 내가 육체적으로 끌리며 또한 내가 존경할 만한가? 사랑의 감정이 내부에서 치솟기 시작할 때 지성이 이런 질문들을 해야 한다. 사랑은 신뢰할 수 없는 감정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검토되어야만 한다.

여러 사람들이 개인 상담을 하기 위해 나를 찾아 왔는데, 한 번은 결혼한 사람이 와서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아내와 이혼해야만 하겠습니다. 저는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졌는데, 이 여자야말로 나에게 적합한 사람입니다. 나도 그 여자에게 어울립니다. 우리는 천생 연분입니다. 제가 현재의 제 아내와 결혼한 것은 실수였습니다. 저는 새로 만난이 여자를 몹시 사랑하는데, 그것은 분명히 맞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해 주었다. “아니오, 그 반대입니다.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당신에게는 이미 아내가 있지 않습니까?” 사랑에 빠진다는 감정은 신뢰할 수 없는 길잡이이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예수님의 주권과, 결혼, 이혼 그리고 성행위를 향유할 수 있는 적절한 배경 ‐ 이성간의 영원한 결혼 ‐ 에 대한 그 분의 가르침 아래 놓아야만 한다. 자,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주 되심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내 지성의 주님이신가? 예수님은 내 감정의 주님이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