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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지성의 적절한 활용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새벽지기1 2016. 7. 25. 07:32


지성의 적절한 활용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나는 일반적인 교육, 예술, 문화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이 인간 생활을 매우 풍요롭게 해주지만, 나는 특별히 기독교와 관계된 지식과 성경을 통해 밝혀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말하는 것이다. 여러분도 알겠지만, 성경 없이 그리스도인다운 생활을 영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다운 생활이란 하나님 말씀에 대한 반응이기 때문이다.


믿음의 경우, 우리는 믿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 없이는 신앙을 가질 수 없다. 경배의 경우,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종류의 경배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지 알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복종해야 할 계명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복종할 수가 없다. 신뢰할 약속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가 없다. 증거 해야 할 좋은 소식이 없다면 우리는 증거 할 수가 없다.


그런데 약속, 명령 그리고 좋은 소식의 계시 모두가 성경 안에 있다. 성경과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가 없다면 그리스도인다운 생활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인다운 생활을 가능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다운 온전한 생활이란, 그 분이 신적주도권을 갖고 하신 말씀에 반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두 가지 예를 통해 경배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우리 복음주의자들은 경배에 익숙하지 못하다. 복음 전도는 우리의 전공이지만, 경배는 그렇지 못하다. 나는 때때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드리는 우리의 경배가 매우 빈약하고 초라하다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전 존재를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우리의 지성 전체가 포함된다.


교회 갈 때마다 머리를 의자 밑에 놓아두고 싶다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예배드릴 때 자신의 머리는 결코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원한 것은 일종의 감상적인 종교 감정이었다. 그는 지성을 사용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즉 우리의 전 존재를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나는 1974년 스위스 로잔 대회와 세계 복음화를 위한 국제 대회에 참석하는 특권을 누린 적이 있다. 그 때 내 마음을 아프게 한 일이 딱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할렐루야라는 말을 끝없이 읊조리는 것이었다. 여러분은 자그마한 소리로 할렐루야라는 말만 20번 가량 되풀이하는 노래를 아는가? 나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것이 전적으로 비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할렐루야라는 말은 성경적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말을 앞뒤 문맥 내에서만 노래해야 한다.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끝나는 시가 많다. 하지만 처음 할렐루야와 마지막 할렐루야 사이에는 주님을 찬양하는 이유들이 자리 잡고 있다.


시편 103편을 보라. “내 영혼아 여로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그러고 나서 다시 할렐루야로 끝난다. 우리에게는 할렐루야를 외치며 찬양할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시편 104편을 보자. 이것 역시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끝나는데 여기서는 구원의 하나님이 아니라 옷을 입음같이 빛을 입으시며 바람날개로 다니시는 등의 창조의 하나님을 다루고 있다. 이것은 위대한 동물원의 시편(zoo Psalm)이며, 피조물 전부를 다루는 시편이다. 그것은 생물을 그들의 환경 또는 거주지와 놀랍게 관련시킨, 생태학의 제1연구서이다. 그것은 할렐루야로 시작한다.


그러나 여러분은 여러분이 무엇을 찬양하고 있는지 안다. 즉, 창조주 하나님, 구속자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나는 그러한 시편들을 할렐루야 샌드위치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처음과 끝에 할렐루야가 있고 그 사이에 교리라고 하는 고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단지 할렐루야라고만 노래하는 것은 아주 비성경적이다. 나는 여러분에게 무엇에 대해 할렐루야라고 노래하는지를 묻고 싶다. 여러분은 무엇에 대해 찬양하고 있는지 알아야만 한다. 그런 다음에야 할렐루야라고 노래할 수 있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신앙과 이성은 성경에서 결코 상호 대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바란다. 사람들이 신앙과 이성이 상호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터무니없는 일이다. 성경은 신앙과 이성을 결코 상충시키지 않는다. 성경은 신앙과 눈으로 보는 것을 대비시킨다. 우리는 신앙으로 살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살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의 신앙은 현저하게 합리적이다. 신앙은 경솔한 믿음을 다르게 표현한 말이 아니다. 또한 미신의 다른 표현도 아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볼티모어의 저널리스트이며 기독교 비평가인 멘켄(H. L. Menken)을 아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는 볼티모어의 현자로 알려지곤 했는데, 실상은 불가지론자이다. 그는 한때 “신앙이란, 간단하게 말해서, 있을 법하지 않은 것이 일어나리라고 믿는 비논리적인 신념으로 정의내릴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것은 참 재치 있고 멋진 말이다. 그러나 잘못된 정의이며 신앙이 의미하는 바가 아니다.


성경에 따르면 신앙이란 합리적인 신뢰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그에 대한 합리적인 계시에 기초한 신뢰이다. 이 신뢰는 우리가 신뢰하는 하나님이 신뢰할 만하기 때문에 합리적이다. 신뢰할 만한 것을 신뢰하는 것은 언제나 합리적이다. 게다가 하나님이 신뢰할 만한 이유는 그 분의 성품과 약속 때문이다.


이제 여러분은 신앙이 성숙하기를 원한다면 지성을 활용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여러분이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라는 시편 9:10의 말씀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다른 말로 표현해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분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신뢰할 만한 분이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것을 알기 때문에 신뢰한다. 이것이 지식에 기초한 신앙이다. 신앙 가운데 성숙하기 원한다면, 여러분은 지식 가운데 자라야 한다.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약속을 묵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