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프란시스 쉐퍼

쉐퍼와 엘룰의 사회 개혁사상의 저항에 있어서의 차이점

새벽지기1 2016. 6. 16. 08:42


반면에 이 둘에게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특별히 폭력에 대한 이해이다. 엘룰은 폭력의 구분을 하지 않고 무조건 부정한다. 다만 두 가지의 예외 사용이 있을 뿐이요, 이것도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폭력의 법칙을 말하면서 폭력의 필연적인 세상에서 이해는 하지만 그러나 교회는 어떠한 경우도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본다. 엘룰은 폭력의 정당성은 없다는 사실속에서 미국 혁명도 본질에서는 폭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서 쉐퍼가 가지고 있는 한계선으로서의 무력의 사용을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쉐퍼는 엘룰이 말하고있는 force에 대하여 구분을 하고 있다. 엘룰은 어떠한 구분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쉐퍼는 폭력에 대하여 분명한 구별을 하고 있다. 쉐퍼 역시 폭력은 절대로 배격한다. 그러나 한계선으로서의 무력 사용의 문제를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쉐퍼 역시 이 문제에 대하여 매우 신중하다.

둘째로는 교회의 표지인 사랑에 대한 이해이다. 엘룰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폭력의 관점은 지극히 복음주의적 급진주의 개념이다. 성프란치스코나, 재세례파의 사상을 가지고 있으며, 현대에 있어서 신좌파의 급진주의자의 흐름속에 있다. 현대의 복음적 급진주의는 Arthur Gish가 "The New LeFT and Christian Radicalism"(Eerdman,1970)에서 제시하듯 "기독교인은 역사 저편에 계신 분께 충성하기 때문에, 어떤 정부나, 사업, 계급, 또는 어떤 다른 제도에 궁극적 충성을 바칠 수 없다" 이러한 개념은 "하양적 개혁과 권력의 집중화에 대한 거부"가 있다. 급진주의는 실재는 인정하나 그 가치는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바로 엘룰이 취하고 있는 태도이다. 급진주의자, 철저주의자, 근본주의자로 불린 만큼 그는 좌파성향의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쉐퍼는 이 사랑의 표현을 전통적 개혁주의 입장에서 서술해 나간다. 쉐퍼는 개혁주의자들이 가지고 있었듯이 쉐퍼도 이 세상의 실재와 가치를 인정한다. 그러나 그 가치에 대하여 명백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부정하는 사랑이 아니라 모든 것을 인정하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쉐퍼와 엘룰은 이 시대의 문제의 근원을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주어진 것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문제 해결은 철저하게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함을 분명하게 역설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방법의 적용에 있어서 타락된 인간 사회의 변화를 위해서는 무력의 사용인 최후의 한계선도 인정하고 있는 쉐퍼와 타락으로 인한 세상에서 그 어느 누구도 진정한 해법은 없으며 특별히 폭력은 그 어떠한 경우도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결과는 매우 의미 있는 것이다.

물론 쉐퍼와 엘룰은 신학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또한 이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의 형성이 너무나도 차이가 나기에 어쩌면 당연한 차이가 있음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이들이 하나님이 주신 이 세상을 향하여 부는 나팔은 일치된 모습이었다. 하나님은 이 시대를 향하여 매우 중요한 인물을 보내 주셨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무너지는 세상 속에서 세상 역사를 이끌고 갈 수 있는 힘이 바로 그리스도인에 있다는 확신을 믿음의 증인들이 쉐퍼와 엘룰을 통하여 증거 되고 있다. 쉐퍼는 대안을 제시한 전도자였다면, 엘룰은 방향을 제시한 전도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