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프란시스 쉐퍼

엘룰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이 혁명에 관하여 가지는 조건[2]

새벽지기1 2016. 6. 13. 07:05


그리스도인이 혁명에 관하여 가지는 조건[2]

엘룰은 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인들의 가져야 될 입장은 혁명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혁명적 상황에 대한 조건들이 있다고 말한다. 이 조건들은 그리스도인이 혁명에 관하여 가지는 조건이다.

첫 번째 조건은 잘 알려진 진리면서도 그 실체가 충분히 이해되지 못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은 두 왕국에 속해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보내진 사신이요, 첩저요, 대리자, 나그네로서 이 세계에 참여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세상의 경제와 법 외에도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다른 이들의 삶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폭정과 과도한 노동의 희생물로 전락하여 항상 분노와 무질서 속에 거하면서 근거 없는 희망에만 의지하는 모습을 받아들일 수 없다. 따라서 그는 세상에 영향을 미치기 위하여 전체 사회 문제에 투신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가 바라는 것은 낙원이 아니라 살 만한 세상이다. 그가 정치 사회문제에 투신하는 것은 세상과 하나님나라 사이의 대립을 없애기 위함이 아니라. 이 세상의 무질서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보존의 질서 사이의 대립을 완화시키기 위함이다. 하나님나라를 도래시키겠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전파되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원의 좋은 소식을 모든 사람들이 진정으로 들을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엘룰은 이러한 구조속에서 존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행동하는 데 필요한 세가지 지침을 가져야한다는 것이다.

"첫째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인간의 진상을 보여주시는 그 지점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인간이 하나님의 질서와 일치되게 살 수 있는 정치 사회적 조건들을 발견해야 한다.

둘째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일정한 틀 안에서 작업하여야 한다. 그것은 보존의 질서로서, 그것이 없다면 인간은 전정한 무대를 잃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이 실제로 기관과 조직들 속에 나타나도록 일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 보존의 질서는 구원 선포를 목적으로 할 때만이 의미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정치사회적 기관들은 자신들의 절대성을 주장해서는 안되며 "개방적"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엘룰은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언제나 무질서로 치달으려는 현질서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요구를 재강조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질서를 재확립하고자 노력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항상 세상을 향하여 요구하신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영속적인 혁명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바라던 바대로 기관들이나 법률 등의 개혁이 이루어졌을 때에도, 즉 사회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재구성 되었을 때에라도, 그는 항상 견제세력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요구는 그의 용서하심 만큼이나 무한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사람들이 진보, 발견, 사실, 확고한 결론, 현실이라고 부르는 바에 대하여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엘룰은 이러한 견제 세력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소명자로서의 불충이라고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의 인도를 받으므로 그의 행위는 본질적으로 혁명적이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혁명적이 아니라면, 그는 여러 가지면에서 세상 속에서의 자신의 소명에 불충한 것이다."

엘룰은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소명에 충실하는 것은 혁명적이 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혁명이 필요한 이유 중의 더욱 중요한 두 번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 즉 재림의 약속이다.

"실로 각 사건이 전정한 내용을 갖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 기준이 없다면, 역사는 미친 광란에 불과하다. 이 문제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은 그 진리를 자기만 간직하고 있을 권리가 없다. 그는 자신의 행위와 생각을 통해서 이 "도래의 사건"을 현세상의 생활 속으로 운반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예언자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역사가들이 연구한 바처럼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언제나 정치적 역할을 감당하였다. 그 역할은 당시의 문명에 있어서 실로 혁명적인 것이었다. 성령을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재림의 예언자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그는 정치 분야에서 혁명적 사명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예언자란 다소 멀리 떨어진 미래를 어느 정도 정확하게 예언만 하는 사람이 아니고, 그 내용을 실천함으로써 자신의 삶 속에서 실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엘룰은 현상황과 실제적 사실들과 관련하여 이 세상을, 아직 존재하지 않으나 도래하고 있는 진리의 이름으로 심판하는 바로 그것이 혁명적 행동이며, 혁명은 폭발력을 갖춘 미래를 현재 속으로 도입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비록 정치적으로 큰 업적을 남기거나 혁명적 능력을 과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리스도를 힘입어 산다면, 즉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현실화시킨다면 그는 진정한 혁명가인 것이다.

엘룰은 이러한 재림에 대한 분명한 약속과 확신을 가지고 재림의 사건을 현재에 침투시키는 길만이 현 문명의 생명력을 짓누르고 있는 정치 사회적 구조들 배후에서 작용하는 죽음의 세력을 몰아내는 방법으로 여겼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태도를 포기하는 것은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곧 혁명적인 삶을 사는 것임을 드러내는 신학적인 근거가 되는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을 위하여 창조하신 상황이 만들어내는 진리들이라는 것이다

엘룰은 이러한 혁명에 대한 상황 그리고 혁명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조건은 혁명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세가지의 결과를 가져온다고 보았다.

그리스도인의 혁명적 기능의 "첫 번째 결과는 모든 인간 행동을 위한 가치 있는 방향을 제시하여 주는 것으로, 환영하여야 한다. 엘룰은 무엇보다도 이 첫 번째의 결론을 중시한다. 혁명적 기능의 결과 인간행동의 가치있는 방향을 제시해 준다는 사실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치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함께 말한다. 소위 기독교 원리에 입각한 정치 사회적 행위한 있을 수 없다. 또한 그리스도인이 과거나 원리에 붙잡혀 있을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하다. 우리는 하나님나라를 윤리체계로 만들거나, 그것이 지상에 건설될 형태를 가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