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프란시스 쉐퍼

쟈크 엘룰의 시민 불복종 운동과 저항으로서의 무력사용에 대한 이해

새벽지기1 2016. 6. 11. 06:45


시민 불복종 운동과 저항으로서의 무력사용

엘룰은 자유와 기독교 현실주의의 입장에서서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참여의 문제를 논하고 있음을 본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향하여 가져야 될 자세가 있다고 보았다.

“첫째, 기독교인은 사회 생활의 기본 구조적 모습들(예를 들면 기술)과 한 문화의 내부 심리적 삶(소망이 없다는 의식)에 대해 깊은 연구를 통해, 요나가 한 잽성?에게 실현 가능성의 미래에 대해 미리 경고한 방법에 따라 예언자적인 사역을 실천해야 한다.

둘째, 기독교인들은 여러 가지 사회 운동과 조직에 참여하여 문제들이 폭발하는 것을 진정시키며 투쟁 당사자들 사이에서 중재하므로서 화해의 사역을 성취해야만 한다.

셋째, 기독교인들은 비신성화의 사역을 계승한다.그들은 평범한 사회적 존재의 신성성(예를 들면 국가와 돈)을 세속화하고 그것들을 정당화하는 신화들(예를 들면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을 폭로할 단호한 의무를 갖는다.

넷째, 기술, 국가, 경제의 전체성에 대항하여, 기독교인들은 ‘세상을 여는’ 역을 가지며 또한 사회 질서 추정된 필요성에 양자 택일이 있음과, 삶에 있어서 음식과 의복, 기술적인 진보와 국가적인 안보보다는 더 많은 대안들이 있음을 양도(disposition)와 공탁(deposition)을 통해 입증할 사역을 가진다."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에 대한 인식을 강조한 엘룰은 매우 중요한 두 뤈리를 정치세계에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공개된 보도의 원리이고, 두 번째는 사회적 저항의 원리이다

그는 새로운 노예제도를 만드는 그 어떤 독재국가에 대해서도 저항을 하여야 한다고 보고 있다. 특별히 그는 억압당하는 자들을 위한 반역과 불복종을 감수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에 충실하다면 우리는 이러한 일들에 참여하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엘룰은 자유로운 생활 지대들을 형성하는 수단으로, 고도로 기술화된 사회 체제와의 긴장을 증가시키는 수단으로 상투적인 정치적 통로들 밖에서의 항의 운동 출현에 박수를 보낸다.]엘룰이 실질적 참여를 하였던 불량청소년에 대한 운동이나,환경운동등은 정치적 세력밖에서 행하였던 저항운동이었다.

엘룰은 결론짓기를, 기독교인들은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 불확실성의 창조자들, 사회와 함께 양립할 수 없는 차원의 대행자들이 되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엘룰은 시민 저항운동으로서의 폭력(무력)사용에 대하여 단호한 입장을가지고 있다 그는 폭력과 강력[force]사이에 구별을 하고 있지 않다. 다만 폭력은 필연성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엘룰은 폭력은 인간적 자연의 표현이 아니라 사회의 존재를 위한 일반적 규율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모두가 다함게 폭력을 필연성으로 인정하는 결과에 이른다고 보고 있다. 현실주의에 입각한 엘룰은 폭력이란 그 형태가 어떠한 것이든간에 모든 사회에 있어서 불가피한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현실주의자인 그리스도인들은 폭력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폭력이 필연성의 사회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면 이 폭력이 가지고 있는 속성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첫째로 폭력은 계속성이 있다.즉 일단 폭력에서 시작하면 그에서부터 떨어질 수 없다. 둘째는 상호성이다.이것은 폭력은 폭력을 창조하고, 폭력을 생산,방출한다, 셋째,동일성이다. 즉 정당한 폭력과 부정단한 폭력, 해방시키는 폭력을 예속시키는 폭력사이에 아무런 구별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폭력은 오만이요, 분노요, 광기이다. 폭력에는 대 폭력이니 소 폭력이니 하는 것이 없다. 폭력은 단일체이며, 항상 동일한 것이다. 넷째,폭력은 폭력을 낳는 것이지 다른 아무것도 없다. 다섯 번째, 폭력을 사용하는 사람은 항상 폭력과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애쓴다

그러기에 폭력에는 선한 폭력이라든지 악한 폭력이라는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그는 이러한 구분은 이상주의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다. 그는 폭력을 취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바로 이러한 이상주의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대표적으로 네가지 형태의 이상주의가 있다고 본다.

"첫째는 혁명적 이상주의로서 자유케하는 것으로서의 폭력과 순결케 하는 것으로서의 폭력이 있다.

둘째는 관용주의적 이상주의이다.이것이 선언하는 것은 화해의 모습이다. 일단 폭력이 일을 끝내고 나면 화해가 최종적으로 가능하게 된다는 마르크스 이상주의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이러한 사상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셋째는 평화주의적 이상주의이다. 특별히 히피들의 세계에서 볼 수 있다. 그들은 상당한 이유를 가지고 사회에 대하여 전면적으로 거부의 자세를 취해 왔다. 그들은 획일주의,도덕적 공허,영혼의 상실 위에 기초한 사회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사회에 대한 관계를 알지 못하므로 인하여 또 하나의 폭력의 사회가 될 위험에 떨어질까 걱정이 된다.

넷째는 기독교 이상주의이다. 기독교 이상주의의 기초는 신학적 기반위에 있다. 이 기반은 첫째로, 세상은 실제로 구원 받았고 선한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요3:16], 둘째는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 많다는 것이다. 셋째는 이 세상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지배권을 지적한다. 이러한 신학적 기초들이 인간과 세상에 대하여 높은 가치를 부여하게 하고, 기술적,과학적 정치적 사업을 찬양하고 , 인간 문화에 참여하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소명이라고 찬양하도록 인도한다. 이러한 이상주의는 자동적으로 모든 현실주의와 진보에 대한 신앙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폭력을 부인하면서도 정의의 이름하에 폭력을 지원한다. 그러나 이것은 폭력을 무시한 태도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임무는 이 이상주의를 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민이 불복종할 수밖에 없는 상황, 즉 억울한 자들의 압박을 당하고,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는 행동을 요구할 때 어떻게 해야 되는 가? 엘룰은 이 문제에 대하여 필연성의 세상에서의 신앙의 투쟁을 말하고 있다. 그는 결론짖기를

“폭력은 인간과 사회에 자연적이고 정상적인 것이며,또한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에게 부과된 일종의 필연성이다.”]ibid.,pp.148.


그렇다고 해서 이 필연성이 합법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은 회심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자유를 가진자로서 이 필연성의 세상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엘룰은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될 폭력에 대하여 말하기를 "폭력은 선하다고 부를 수는 없고, 다만 두 가지 경우에 그 사용을 묵인 할 수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한 사람이 절망에 빠져 있거나 다른 방도를 발견 할 수 없을 때, 둘째는 위선적으로 정당하거나 평화로운 상황이 그것을 종료하기 위하여는 현재있는 그 대로를 폭로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가 것이다. 그러나 이 두경우에도 폭력은 필연성의 질서이며 따라서 뿌리를 자유에 박는 기독교적 삶과는 반대라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엘룰은 폭력은 필연성의 질서이므로 자유로운 그리스도인들은 그 어떤 경우에도 폭력에 대한 기독교적 정당화를 인정할 수 없으며 오히려 대항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엘룰은 그의 논의의 결론인 기독교 근본주의[Christian radicalism]의 입장에 서서 필연성의 세상을 향하여 그리스도인은 사랑의 폭력을 행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이 사랑은 정신적 폭력의 한 형태로서 세 가지 조건이 갖추어 졌을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첫째로 승리를 얻는다거나 효과를 거두는 모든 인간적 수단을 거부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둘째는 그것은 영적 폭력과 사랑의 폭력은 전적으로 물리적 혹은 심리적 폭력을 배제한다는 것이다.

세번째는 진정한 영적 폭력은 진지한 신앙 위에 기초하고 있다. 즉 기적의 가능성에 대한 신앙, 예수 그리스도의 지배권에 대한 신앙, 우리의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에 의하여 다가올 왕국에 대한 신앙등 모든 약속에 대한 신앙이다.

엘룰의 폭력에 대한 관점은 매우 폭이 넓게 보인다. 그는 압력과 폭력 그리고 무력의 저항을 구분하고 있지 않고 있으며, 폭력에 대한 찬성과 부정의 두 입장에 대하여 양비론적 느낌을 받게 한다. 그러나 그의 폭력에 대한 논리는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며 특별히 프란시스 쉐퍼와의 좋은 비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