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리민수목사

우리가 부를 <단심가>는?

새벽지기1 2016. 2. 15. 07:39

리민수칼럼2401 우리가 부를 <단심가>는?
 
주말에 최근 인기리에 방영되는 <육룡이 나르샤> 재방송을 시청했다.
조선 개국이 이 드라마의 배경이다.
이번 주에는 이방원이 정몽주를 살해하는 내용이 방영되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 년까지 누리리라>
장차 태종이 되는 이방원이 정몽주에게
 다 썩어 가는 고려에 더 이상 미련 두지 말고
 함께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칡넝쿨처럼 얽혀 살아가자는 내용이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비록 나라가 썩었지만 그래도 고려를 바꿔보려고 했던 정몽주가
 결코 죽어서도 고려 임금만을 섬기겠다며 이방원에 읊었던 결기에 찬 시다.


이 두시는 우리가 다 잘 아는 <하여가와 단심가>가다.
결국 이방원은 정몽주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걸 깨닫고 그를 선죽교에서 암살하고 만다.
이로서 고려 왕조는 태조 왕건이 나라를 세운 지 474년 만에
 공양왕을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조선 건국이 아주 중요한 변환점에 이 <하여가와 단심가>가 있다.


나는 자문해 본다.
나는 이방원인가? 정몽주인가?
이방원은 정몽주를 죽여서라도 얻고 싶은 절실함이 있었고
정몽주는 목숨을 걸고라도 지켜야 할 신념이 있었다.
이방원 편에 서자니 아무리 목적이 선하더라도 방법이 잘 못되었고
정몽주의 편에 서자니 명분 때문에 비현실적인 선택을 해야하고 참 어려운 선택이다.
또한 이방원이 정말 나라와 민족을 위해 정몽주를 죽였는지
아니면 자신의 권력욕 때문에 그랬는지 알 수 없다.
정몽주는 충신이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가 충성해야 할 대상이 왕조인지 불쌍한 민초인지 분별하지 못한 아쉬움도 있다.

그래서 선택적 적용을 한다면
이방원에게는 <확신에 찬 결기와 추진력>을
정몽주에게는 <목숨을 걸 만큼 중요시했던 지조>를 본받고 싶다.
젊은이를 대상으로 하는 복음 운동에서는 결기와 추진력이 필요하고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지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방원에게는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식의 <현실 타협>을
정몽주에게서는 명분 때문에 대의를 잃어버린 <아집>을 버려야 한다.
이방원과 정몽주!
이 두 분의 장점을 지닌 믿음의 선배가 바로 내가 존경하는 사도 바울이다.
‘먹든지 마시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고전10:31)’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빌1:20)’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고후5:9)’
그리고 사도행전20장 24절이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이것은 사도 바울의 <단심가>다.
우리의 단심가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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