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전하는 최고의 증언은 둘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것이고, 하나는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냐, 사람이 어떤 존재냐 하는 것이 성경의 중심 증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은 창조의 주체이시고 구원의 주체라고 말합니다. 사람에 대해서는 회개하고 구원받아야 하는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구원의 주체라는 것은 구원에 관한한 인간은 철저하게 받는 입장에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구원에 관한한 어떤 주도권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구원은 애오라지 하나님에게 속한 일이지 사람에게 속한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구원과 관련해서 정말 복잡한 문제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구원의 주체라는 것, 인간은 오직 구원을 받을 뿐이라는 것을 믿을 때부터 시작됩니다. 이 사실을 믿고 나면 곧바로 두 가지 의문에 봉착하게 됩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구원의 주체시라면 왜 누구는 구원을 받고 누구는 구원을 받지 못하느냐 하는 의문에 봉착하게 되고, 둘째로 하나님이 구원의 주체시고 인간은 구원을 받을 뿐이라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어떻게 되는 거냐 하는 의문에 봉착하게 됩니다.
이 두 가지 의문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까다롭고 복잡한 문제일 뿐만 아니라 가장 치열하게 싸운 문제이기도 합니다. 5세기에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가 싸운 이래로 1500년 이상을 싸웠지만 여전히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아주 골치 아픈 문제입니다. 어쩌면 인간의 지혜로는 영원히 해명할 수 없는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저에게도 뾰족한 해결책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을 말하면서 이 의문을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골치가 아프고 뾰족한 해결책이 없다고 해서 이 의문을 대면하지 않고 은근슬쩍 넘어가는 것은 정직한 태도가 아니기 때문에 좌우지간 이 두 가지 의문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죽이 될지 밥이 될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두 가지 의문과 씨름해야 합니다.
사실 두 가지 문제는 긴밀하게 연결돼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구원의 주체시라면 왜 누구는 구원을 받고 누구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가, 하는 문제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잘 아는 것처럼 성경은 하나님이 공의의 하나님이시고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능히 행할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말합니다(딤전2:4, 벧후3:9). 의로운 자에게나 불의한 자에게나 차별 없이 해를 비추시고 비를 내리신다고 말합니다(마5:45).
그렇다면 여러분, 어떤 생각이 듭니까? ‘아~,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하나님에게 모든 사람을 구원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했으니까, 거기다가 하나님의 성품이나 능력이 충분히 뒷받침되니까, 당연히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습니까? 아닙니다. 구원받는 사람보다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깊은 어둠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며 신음하는 자들도 많고, 죄악에 찌들어서 자기도 불행에 빠지고 다른 사람도 불행에 빠뜨리는 자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지옥의 밑바닥에 가야 마땅할 것 같은 놈이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돌아다니고, 정말 성품이 좋고 성실한데 아무리 전도하고 설득해도 도무지 믿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현실을 보면서 우리는 묻게 됩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했지 않습니까? 또 온 세상을 구원할 충분한 성품과 능력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누구는 구원을 받고 누구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까? 놀부 심보로 가득한 저 놈은 구원받고 흥부의 마음을 가진 이 사람은 왜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까?’ 라고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 이 의문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물을 수밖에 없는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절박한 물음입니다. 신학자들도 이 의문을 붙잡고 씨름했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다양한 대답을 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모든 대답을 살펴볼 수는 없습니다. 오직 두 가지 대답만 살펴보려 합니다. 하나는 칼뱅의 대답이고, 또 하나는 아르미니우스의 대답입니다.
먼저 칼뱅의 대답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칼뱅은 사람이 구원받느냐 구원받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에 달려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기독교 강요]에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값없이 구원이 제공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길이 막히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되는 일임이 분명하다”(중권. 500쪽)고 말하면서, 토기장이가 흙을 빚어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만들고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듯이(렘18:6, 롬9:21) 하나님은 누구에게는 구원의 은혜를 베풀고, 누구에게는 구원의 은혜를 베풀지 않을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야곱과 에서가 엄마 뱃속에서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이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듯이(롬9:13)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구원할 자와 멸망할 자를 선택하신다고 말했습니다. 더욱이 창세 전에 이 선택이 이루어졌다고 말했습니다.
반면에 아르미니우스는 칼뱅의 대답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칼뱅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충분한 은혜의 도움을 베풀지 않은 채 태어나기도 전에, 아니 세상을 창조하기도 전에 구원할 자와 멸망할 자를 결정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도 어긋나고 인간에게 허락한 자유 의지도 완전히 짓밟는 것이 되기 때문에, 또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악의 창시자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동의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르미니우스는 하나님의 은혜가 보편적이라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차별이 없이 보편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먼저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이고도 충분한 은혜를 베푸신다, 그리고 그 은혜를 통해 복음을 믿을 수 있도록 자극하고 돕고 자유의지를 회복시키고 감화시킨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을 수 있도록 모든 사람에게 ‘인도하는 은혜’ 혹은 ‘일깨우는 은혜’를 주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회복된 인간의 의지가 복음을 받아들일지 거부할지를 아시고 그에 따라 구원을 행하신다고 말했습니다(십자가와 구원. 브루스 데머리스트. 79-84쪽에서 재인용). 결국 사람이 구원받느냐 구원받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에 달려있는 게 아니라 은혜 아래 있는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두 사람은 공히 성경 말씀에 충실한 신학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결코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 하나님만이 구원의 주체시라는 것을 확고히 믿은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저들의 대답은 확연히 달랐습니다. 칼뱅은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이 구원을 좌우한다고 했고, 아르미니우스는 인간의 선택이 구원을 좌우한다고 했습니다(인간이 구원의 주체라는 것은 아님).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렇게 확연히 다른 대답을 했을까요? 두 사람 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 하나님만이 구원의 주체시라는 것을 확고히 믿었는데 왜 대답은 정반대로 갈라진 걸까요? 이것은 간단히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두 사람의 신학적 사색을 좀 더 깊이 따라가야만 저들이 왜 저렇게 다른 대답을 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럼 두 사람의 신학적 사색을 따라가 봅시다. 이번에도 칼뱅부터 보겠습니다. 왜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하는가 하는 의문에 대하여 칼뱅이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을 대답으로 내놓은 것은 그의 신학적 사고의 토대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전적 부패’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칼뱅 신학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어떤 경우에도 구멍이 뚫릴 수 없고, 그 무엇에 의해서도 훼손될 수 없다는 것이 칼뱅의 믿음이고 확신이었습니다. 칼뱅의 모든 신학적 사고는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했습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모든 영광은 오직 주에게만 돌아가야 한다(롬11:36)는 것이 칼뱅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반드시 유효해야만 합니다. 비가 하늘에서 내리면 헛되이 돌아가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도 누군가에게 임하면 헛되이 돌아가지 않고 반드시 구원이라는 선한 열매를 맺어야만 합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이 거부할 수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구멍이 생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는데도 불구하고 사람이 거부할 수 있다고 하면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니까 인간은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할 수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면 그 사람은 반드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칼뱅은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에 의해 거절될 수 없다고 ‘저항할 수 없는 은혜’(Irresistible Grace)의 원칙을 주창했습니다.
그런데 이 원칙을 주창해도 의문은 여전히 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실패하는 법이 없는데, 누구에게 은혜를 베푸시면 그 사람은 반드시 구원을 받는데, 세상에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많으니까 이제 뭐라고 해명해야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임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임한다고 말하면, 누군가가 구원받지 못한 것은 결과적으로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한 것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고, 그렇게 되면 곧바로 ‘저항할 수 없는 은혜’의 원칙이 무너지고,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주권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버리는데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을 사람에게만 제한적으로 임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도 모든 사람을 위해서 피를 흘린 게 아니라 구원받을 사람만을 위해서 흘린 것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래서 칼뱅은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의 원칙을 주창했습니다.
그런데 ‘제한 속죄’를 말하게 되면 또다시 즉각 나오는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고 공의로우신데 왜 누군가를 위해서만 피를 흘렸느냐, 왜 누구는 선택하고 누구는 선택하지 않았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칼뱅은 이 문제를 사실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지만 모든 사람을 구원하지 않고 몇몇 사람들만 구원하기로 작정하셨다고 받아들였습니다. 여러 성경적 근거를 대면서(요16:12, 롬9:13, 말1:2-3, 사14:1, 사41:9) 하나님의 선택은 이중적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중 예정과 이중 선택을 말하지 않으면 ‘제한 속죄’의 원칙이 무너지고, ‘제한 속죄’의 원칙이 무너지면 연달아 앞에 있는 것들도 다 무너지기 때문에 칼뱅은 이중 예정과 이중 선택을 주장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이중 예정과 이중 선택은 인간의 능력이나 행위와 같은 조건을 따져서, 싹수가 파란 놈은 구원하고 싹수가 노란 놈은 구원하지 않는 게 아니라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결정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어떤 것도 고려함이 없이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선택하는 것이어야만 하나님이 절대 주권이 지켜지기 때문에 칼뱅은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을 주창했습니다.
그리고 ‘무조건적 선택’과 ‘저항할 수 없는 은혜’를 합하면 자연히 뒤따르는 것이 있습니다.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일 한 번 구원받은 사람이 중간에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질 수도 있다고 말하게 되면 그 순간 ‘저항할 수 없는 은혜’의 원칙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선택 또한 실패로 돌아가 버리기 때문에 한 번 구원받은 사람은 영원히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는다고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칼뱅은 한 번 구원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다는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을 주창했습니다.
여기까지가 칼뱅주의 5대 원칙(앞 글자를 따서 TULIP이라고 함) 중 4가지에 해당됩니다. 칼뱅주의가 맨 앞에 내세운 원칙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전적타락’(Total Depravity)입니다. 인간은 완전히 타락했기 때문에 선을 행할 능력도 없고,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의지도 없다는 것이 칼뱅주의 신학의 첫 번째 원칙입니다.
그런데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칼뱅주의 5대 강령은 따로따로 떨어진 주장이 아닙니다. 5대 강령은 기계의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려 있습니다. 칼뱅 신학의 근본 토대인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저항할 수 없는 은혜’를 말해야 했고, ‘저항할 수 없는 은혜’를 지키기 위해서는 ‘제한 속죄’를 말해야 했고, ‘제한 속죄’를 지키기 위해서는 ‘무조건적 선택’을 말해야 했고, ‘무조건적 선택’을 지키기 위해서는 ‘성도의 견인’을 말해야 했습니다. 여기에다 ‘인간의 전적 타락’을 덧붙임으로써 칼뱅주의자들은 빈틈없고 수미일관된 논리적 체계, 신학적 체계를 완성했습니다. 모든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 실로 완벽한 신학적 체계를 완성했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전적으로 옳을까요? 다음에 아르미니우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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