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구원15 - 왜 누구는 구원받고, 왜 누구는 구원받지 못하는가(2)

새벽지기1 2015. 10. 8. 22:34

 

우리는 지금 하나님이 구원자이신데 왜 누구는 구원받고 누구는 구원받지 못하는가, 하는 문제를 살펴보고 있는 중입니다. 앞에서 칼뱅의 신학적 사색을 추적해봤으니까 오늘은 아르미니우스의 신학적 사색을 추적해보겠습니다. 아르미니우스는 칼뱅이 죽은 지 4년 후인 1559년에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칼뱅 신학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연구하면서 점차 칼뱅의 예정론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칼뱅의 예정론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권능을 높이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인간의 자유 의지가 숨 쉴 여지를 아예 없애버린다는 점, 하나님이 악의 근원이 된다는 점,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난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르미니우스는 칼뱅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신학의 초점을 맞춘 것과 달리 하나님의 은혜에 신학의 초점을 맞췄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은혜가 보편적이라는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을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신다(딤전2:4), 하나님은 만유의 주인이시고(행10:36, 고전15:28) 만유를 사랑하시는 분(요일4:16)이다,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똑같이 해를 비추시고 의로운 자에게나 불의한 자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리신다(마5:45)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아르미니우스는 하나님의 은혜가 보편적이라고 보았습니다.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구원받는데 꼭 필요한 은혜를 베푸신다고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희생의 피를 흘리신 것이 제한적이라고 말해야겠습니까 보편적이라고 말해야겠습니까? 당연히 보편적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구원받을 사람만을 위해 피를 흘린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 흘린 것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르미니우스는 칼뱅의 ‘제한 속죄’를 거부하고,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었다는 ‘보편 속죄’(Unlimited Atonement)를 주창했습니다.

여기서 오해하기 쉬운 점 하나를 짚어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인 중에는 ‘보편속죄론’과 ‘보편구원론’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보편속죄론’과 ‘보편구원론’은 완전히 다릅니다. ‘보편구원론’은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었으니까 어찌됐든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주장이고, ‘보편속죄론’은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은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자동적으로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속죄의 죽음으로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따라 구원이 결정된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니까 ‘보편속죄론’은 속죄는 보편적이지만 구원은 보편적이지 않다는 입장입니다. 아르미니우스가 주창한 것은 ‘보편구원론’이 아닙니다. ‘보편속죄론’입니다.

 

예, 아르미니우스는 예수님이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속죄의 피를 흘렸다고 ‘보편 속죄’를 주창했습니다. 그렇다면 자연히 어떤 생각이 듭니까?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위해 피를 흘렸으니까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현실을 보면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예수님 또한 모든 사람을 위해 피를 흘렸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뭐라고 말해야겠습니까?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할 수 있다고 말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할 수 없다고 말하면 보편 속죄는 즉각 보편구원론으로 직행하게 되는데, ‘보편구원론’은 성경의 지지를 받기도 어렵고 눈앞의 현실과도 맞지 않으니까 어쩔 수 없어요. 인간이 하나님이 은혜를 거부할 수 있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다행히 성경에도 그런 사례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 대다수가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났습니다(사1:4).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를 생각하면서 고린도교회에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권면했습니다(고후6:1). 그래서 아르미니우스는 확신을 갖고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에 의해 거부되기도 한다고 ‘저항할 수 있는 은혜’(Resistible Grace)를 주창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할 수 있다는 이 주장은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대립됩니다. 칼뱅은 이 둘이 대립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는 저항할 수 없다고 주창했는데 아르미니우스는 저항할 수 있다고 했으니까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대립합니다. 자,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지켜내면서 저항할 수 있는 은혜를 말해야만 이 문제가 극복되는데 어떻게 해야 해법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아르미니우스가 찾아낸 해법이 바로 ‘예지예정’입니다. 하나님은 누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거부할지를 미리 아시고(예지), 그에 따라 구원할지 안 할지를 결정(예정)하신다고 아주 절묘한 대답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따라 무조건적으로 선택하는 게 아니라 이 사람이 믿을 거라는 걸 미리 아시고(예지), 그 앎에 근거해서 구원자를 예정하시고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이라는 조건이 있는 선택을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아르미니우스가 주창한 ‘조건적 선택’(Conditional Election)의 원칙입니다. 아무튼 아르미니우스는 이렇게 예지예정을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도 ‘저항할 수 있는 은혜’를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르미니우스는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칼뱅이 주창한 ‘성도의 견인’-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성도의 견인’ 교리를 받아들이는 순간 ‘저항할 수 있는 은혜’의 원칙이 무너지기 때문에 ‘성도의 견인’ 교리를 거부하고 ‘조건적 견인’(Conditional Perseverance), 즉 신자가 인내로써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가지 못하고 중간에 믿음에서 돌아서면 구원을 잃을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아르미니우스는 칼뱅처럼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했음을 인정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도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칼뱅과 차이가 있습니다. 칼뱅은, 인간은 구원에 관한한 전적으로 무능력하다, 인간의 자유의지로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할 수 없다고 ‘전적타락’(Total Depravity)을 주장한 반면, 아르미니우스는 인간의 원천적인 무능력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의 선행하는 은혜가 인간의 자유 의지를 회복시켜서 복음에 반응할 수 있게 하시기 때문에 전적으로 무능력하지는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연적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력하지만 은혜 아래 있는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력하지 않다고 ‘자연적 무능력’(Natural Inability)을 주창했습니다.

 

살펴본 것처럼 아르미니우스의 주장도 매우 논리적인 체계로 엮여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보편적이라는 전제 위에서 ‘보편 속죄’를 말했고, ‘보편 속죄’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 ‘저항할 수 있는 은혜’를 말했고, ‘저항할 수 있는 은혜’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 ‘조건적 선택’을 말했고, ‘조건적 선택’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 ‘조건적 견인’과 ‘자연적 무능력’을 말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칼뱅과 아르미니우스는 공히 구원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믿었고,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누구도 구원받지 못한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근본 토대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왜 누구는 구원을 받고 누구는 구원을 받지 못하느냐’하는 문제를 해명하는 과정에서 전혀 다른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서로 간에 교집합이 없는 정반대의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그렇다면 물읍시다. 칼뱅과 아르미니우스 중 누가 옳고 누가 그른 것일까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둘 중 하나만이 옳다고 말합니다. 칼뱅주의가 옳든지 아르미니우스주의가 옳든지 둘 중 하나만 옳기 때문에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둘 다 옳은 부분이 있고, 둘 다 틀린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둘 다 옳으면서도 둘 다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성경을 보면 칼뱅주의를 지지하는 말씀도 있고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지지하는 말씀도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는 절대 주권자라고도 말하고(딤전6:15), 하나님의 은혜가 크고 놀랍다고도 말합니다(롬5:15). 하나님의 은혜는 헛되지 않다고도 말하고(엡1:4),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렸다고도 말합니다(마23:37). 무조건적 선택도 말하고(롬9:13), 조건적 선택도 말합니다(마9:2, 눅5:20). 제한적 속죄도 말하고(요17:6,9), 무제한적 속죄도 말합니다(딤전2:4, 요3:16). 은혜로만 구원 받는다고도 말하고(고전4:7),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도 말합니다(마1:15). 이외에도 이들의 주장을 지지하는 성경 말씀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아무리 싸워도 끝이 나지 않을 정도로 많습니다.

 

하지만 저들의 주장이 옳음에도 불구하고 틀렸다는 게 제 판단입니다. 전적으로 틀린 건 아니지만 근본적으로는 틀렸다는 게 제 판단입니다.

칼뱅이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영광을 중시한 것은 백 번 옳았습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에 몰입한 나머지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을 다 무력화시켰다는 면에서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칼뱅이야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항변하겠지만, 칼뱅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면, 결국 하나님은 바늘구멍 하나 들어가지 않는 완고한 전제 군주가 되고, 인간은 어떤 자유도 없는 하나님의 꼭두각시가 되어버립니다.

아르미니우스 또한 하나님의 은혜의 보편성을 강조한 것은 백 번 옳았습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은혜의 보편성에 몰입한 나머지 인간의 자유의지와 선택 능력을 과도하게 격상시켰다는 면에서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아르미니우스야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 자유의지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고 항변하겠지만, 아르미니우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면, 결국 하나님의 주권이 흐물흐물해지고, 구원에 대한 궁극적인 선택권을 인간이 쥐게 됩니다. 그래서 저들의 주장이 옳으면서도 틀렸다고 말하는 겁니다.

 

여기서 묻겠습니다. 칼뱅과 아르미니우스가 왜 이런 오류에 빠진 걸까요? 저들이 성경에 토대를 둔 신학적 사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했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절대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오류에 빠진 걸까요?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칼뱅과 아르미니우스가 자기들의 신학적 전제(칼뱅은 하나님의 주권, 아르미니우스는 은혜의 보편성)를 극단적으로 밀고 나갔고, 지나치리만큼 논리적인 완결성을 추구했기 때문이라는 게 제 판단입니다. 지나치게 논리적 일관성에 집착하다보니 성경의 진리를 자기들의 신학적 틀에 가두어버리는 잘못을 범한 것이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논리에 함몰되어 한쪽으로 치우친 주장을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성경은 논리적인 책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변증법적 긴장과 모순이 가득합니다. 철학적 논리로는 도무지 체계화되지 않는 변증법적 긴장과 역설과 모순이 가득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 어렵고 성경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성경 속에 이런 모순과 역설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성경만 그런 게 아닙니다. 생명도 그래요. 여러분, 생명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지금 생명을 살고 있지만 생명이 무엇인지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일관된 논리로 체계화할 수 있습니까? 전혀 불가능합니다. 생명이란 이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모종의 논리나 계통적인 질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생명은 본질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과정과 관계가 뒤섞인 것이기 때문에 일관된 논리로 체계화할 수 없습니다.

나라는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내가 누구인지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나라는 존재를 설명할 수 있는 방식은 많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는 존재는 어떤 논리로도 설명이 안 되고, 어떤 구조로도 체계화되지 않습니다. 나라는 존재는 지극히 복잡하고 다면적이라서 이런가 하면 저렇고, 저런가 하면 이렇습니다. 에니어그램식으로 말하면 저는 사색가인가 하면 평화주의지이고, 평화주의자인가 하면 개혁가이고, 개혁가인가 하면 예술가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9가지 유형이 제 안에 다 있습니다.

 

저 한 사람도 이런데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어떻겠습니까? 일관된 논리로 체계화할 수 있겠습니까? 어불성설입니다.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최고의 신학자인 바울은 고백했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정말입니다. 하나님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어떤 지성이나 감각이나 상상력으로도 포착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주보다 더 광대하시고, 구중궁궐보다 더 깊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어떤 논리, 어떤 범주, 어떤 신학으로도 충분히 해명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칼뱅과 아르미니우스는 어떤 논리, 어떤 범주, 어떤 신학으로도 충분히 해명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과 행위를 지나치게 논리화 ‧ 신학화 ‧ 철학화했다고 생각됩니다. 절대로 체계화될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을 체계화했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행위를 자기 논리의 틀 속에 가두는 의도하지 않은 폭력을 자행했다고 생각됩니다. 왜 누구는 구원을 받고 누구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가 하는 문제는 명백하게 해명하기가 어려운 문제인데, 그걸 명명백백하게 해명하겠다고 욕심을 부린 나머지 꼭 긋지 않아도 될 선을 그었다고 생각됩니다. 우주보다 더 광대하시고, 구중궁궐보다 더 깊으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행위를 좁쌀만한 인간의 논리 속에 가두었다고 생각됩니다.

 

자고로 지나친 것이 문제입니다. 옛날부터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습니다. 지나치면 미치지 못한다, 이것은 세상살이의 진리일 뿐 아니라 신앙에서도 진리입니다. 신앙을 논리적으로 해명하는 신학 작업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긴 하나 이것도 지나치면 참된 진리에 미치지 못합니다. 참된 진리에 미치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왜곡하고 죽이게 됩니다. 신학 작업이 지나치면 논리가 신학을 지배하게 되고, 논리가 신학을 지배하게 되면 신학이 하나님을 지배하게 되고, 신학이 하나님을 지배하게 되면 결국 신학이 하나님을 왜곡하고 죽이게 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지나치면 반드시 어둠에 빠집니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반드시 진실을 왜곡하고 생명을 죽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결코 지나치지 마십시오. 극단에 서지 마십시오. 내 생각이 아무리 옳다고 생각되더라도 내 생각을 절대로 절대화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지나치면 위험하고, 아무리 옳은 것이라도 절대화하면 넘어집니다. 저도 매사에 지나치지 않도록 조심하겠습니다. 극단에 서지 않도록 조심하겠습니다. 제 지식과 경험과 생각이 아무리 옳더라도 일리에 불과하다는 것, 부분적이고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지 않겠습니다.

모든 신학 또한 절대적이지도 않고 전체적이지도 않습니다. 칼뱅의 신학이든, 루터의 신학이든, 아르미니우스의 신학이든, 바르트의 신학이든, 브루너의 신학이든, 판넨베르크의 신학이든 모든 신학은 상대적이고 부분적입니다. 칼뱅의 신학도 다 옳지 않고, 바르트의 신학도 다 옳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상대적으로 옳고 부분적으로 옳을 뿐이지 절대적으로 옳거나 전체적으로 옳지는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저는 칼뱅이 옳으냐, 아르미니우스가 옳으냐를 따지는 건 부질없는 일이고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칼뱅이 옳으냐, 아르미니우스가 옳으냐를 놓고 고민할 게 아니라 칼뱅과 아르미니우스 사이의 모순과 긴장을 놓치지 않고 유지하는 것이 훨씬 성경적 진리에 부합하는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좀 어정쩡하지요? 그러나 오늘은 여기서 정리하고 다음 단계에서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