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앞에서 인간의 죄 문제를 하나님이 해결하셨고, 인간의 죽음 문제를 하나님이 해결하셨다는 것이 기독교 구원론의 핵심이자 독특함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옳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선포로 시작해서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한다는 선언으로 끝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창조의 주체시라는 선포로 시작하여, 하나님이 구원의 주체시라는 선언으로 끝납니다. 성경은 창조를 말할 때에도 하나님의 자유로운 뜻 ‧ 하나님의 오묘한 지혜 ‧ 하나님의 곡진한 사랑 외에는 어떤 것도 개입된 것이 없다고 말하고, 구원을 말할 때에도 하나님의 자유로운 뜻 ‧ 하나님의 오묘한 지혜 ‧ 하나님의 곡진한 사랑 외에는 어떤 것도 개입된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요한의 증언부터 들어봅시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을 가리켜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요1:13), ‘성령으로 난 사람’(요3:8)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일서에서는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라고 했습니다(요일3:9, 5:1). 예수님이 자기를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한 것 때문에 유대인들 사이에 논쟁이 분분했을 때에도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로 올 수 없다”(요6:44)고 구원의 주체가 하나님 아버지이심을 확실하게 밝혔습니다.
마태는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께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고 말한 것을 잊지 않고 전했습니다.
바울도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면서(고전2:9), 오직 하나님의 성령이 구원의 복음을 우리에게 보이셨다고 단언했습니다(고전2:10).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고전12:3). 디도서에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다고 했습니다(딛3:5).
구원 사건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출애굽 사건도 보십시오. 하나님이 출애굽의 주역인 모세를 부르실 때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출3:6)이라고 하나님 자신을 밝히신 다음 “내가 내려가서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출3: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3:10)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가장 강조하고 있는 핵심 이슈는 출애굽의 주역이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 일을 시작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모세를 통해 이 일을 행하시는 분도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구원을 말할 때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이 구원의 주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것을 한 번 뒤집어봅시다. 하나님이 구원의 주체라는 것을 뒤집으면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인간은 구원의 주체가 아니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성경은 이 이야기도 쉬지 않고 합니다.
사도 요한은 참 빛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빛을 비추었으나 어둠 속에 있는 세상은 그를 알지 못했다고 했습니다(요1:5,10). 영생에 대해서도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말하면서(요17:3), 사람들이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님께 오기를 원치 않는다고 했습니다(요5:40).
사도 바울은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단언했습니다(고전1:21). 사람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고 했습니다(엡4:18). 심지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고,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고,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다고 했습니다(롬3:10-18). 인간의 지혜와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할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롬8:7).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당부한 것도(행1:4)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하나님의 구원을 알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도 이 진실을 알고 에베소 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엡1:17-19)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골로새교회를 향해서도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골1:9)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도 자기에게 구원의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 끊임없이 기도했습니다. “주의 율례들을 내게 가르치소서.”(시119:12, 26, 33, 66, 68, 124, 135).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119:18). “주의 계명들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19). “나로 하여금 주의 계명들의 길로 행하세 하소서”(35). “내 마음을 주의 증거들에게 향하게 하소서”(36).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169). “주의 말씀대로 나를 건지소서”(170).
이처럼 성경은 인간 안에 어떤 구원의 가능성도 없다고 말합니다. 구원에 관한한 인간은 철저하게 무력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구걸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적으로 보면 매우 굴욕적인 일입니다. 인간의 자존심을 완전히 구기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의 실존입니다. 인간에게는 스스로를 구원할 능력이 없습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도 없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고,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을 수도 없는 실로 비천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이 이런 존재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인간은 한없이 불의하고 부패한 존재,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도 없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고,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을 수도 없는 실로 비천한 존재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진실을 모르고 있고, 알아도 새까맣게 잊고 삽니다.
그리고 사람이 이런 존재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기독교를 비난합니다. 기독교는 인간을 모독한다고, 인간을 지나치게 비천한 존재로 내몬다고, 인간을 따뜻하게 보듬어주기는커녕 죄인이라고 억누른다고, 회개하라고 윽박지르면서 굴욕적인 항복을 요구한다고 비난합니다. 인간에 대해 지나치게 비판적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본래 인간에 대해 회의적이고 비판적입니다. 기독교는 현재의 삶을 축복하지 않고 오히려 현재의 삶에서 돌이키라고 촉구합니다. 물론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인간을 두들겨 패고, 모든 사람을 불신의 눈초리로 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너는 이 죄를 범했고 너는 저 죄를 범했다고 끝없이 정죄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세상의 삶은 죄로 물들었으니 저주받아야 마땅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당연히 그리스도인은 서로 위로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피차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서로의 삶을 축복하고 깊이 신뢰해야 합니다. 그러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기 이전에, 서로의 삶을 축복하고 깊이 신뢰하기 이전에, 피차 용서하고 사랑하기 이전에, 인간 안에는 어떤 의도 없다는 것, 생명을 살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 인간은 근본적으로 부패하고 무지하다는 것,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왜냐?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이것이 인간의 근원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태초의 아담이야 이러지 않았지만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이래로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부패하고, 무지하고,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 것이 100% 진실이기 때문에 이 근원 진실을 알아야 합니다.
2) 인간의 근원 진실을 알아야 하나님 앞에 굴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나님의 의 앞에 나아갈 수 있고, 내가 진실로 부패한 죄인임을 알아야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이 근원 진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구원이 뭡니까? 방금 앞에서 말한 대로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사는 것, 피차 용서하고 사랑하며 사는 것, 서로의 삶을 축복하고 깊은 신뢰를 보내주며 사는 것이 구원입니다. 구원이 뭐 대단한 게 아니에요. 신비한 무엇이 아니에요.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사는 것, 피차 용서하고 사랑하며 사는 것, 서로의 삶을 축복하고 깊은 신뢰를 보내주며 사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런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서로에게 분노하고 원망하고 미워하고 배척하고 싸우는 것이 우리의 일상입니다. 그렇다면 뭣 때문에 이렇게 분노하고 원망하고 미워하고 배척하고 싸우며 사는 것일까요? 십중팔구는 비현실적인 기대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아, 이 사람은 능력이 있겠구나. 나만 사랑하겠구나. 진리를 따르겠구나. 마음이 선하겠구나. 뭐든 잘 통하겠구나.’ 등등 온갖 기대를 갖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요? 전혀 아닙니다. 능력이 있으면서 나만 사랑하고, 진리만을 충실히 따르고, 뭐든 잘 통하는 사람 없습니다. 사람은 본래 그렇게 훌륭한 존재가 못돼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사람만은 그럴 거라는 환상을 갖습니다. 그러다가 환상이 깨지고 기대가 무너지면 ‘네가 그럴 줄 몰랐다’며 원망하고 불평하고 분노하고 미워하고 돌아서고 별별 짓을 다 합니다. 정말입니다. 인간 안에 어떤 의도 없다는 것, 생명을 살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 인간은 근본적으로 부패하고 무지하다는 것,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환상과 기대를 갖는 것이고, 비현실적인 환상과 기대를 갖기 때문에 피차 원망하고 불평하고 분노하고 미워하고 돌아서는 것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형편없는 존재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형제를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고, 제대로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고, 제대로 격려하지 못하는 것이고, 제대로 존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인간에 대한 모든 환상과 기대를 깨부수는 작업을 합니다. 인간 안에는 어떤 의도 없다, 생명을 살 능력도 없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부패하고 무지하다,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다, 깊은 어둠에 갇혀 있다, 철저하게 신성 모독적인 방식으로 살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모든 환상과 기대를 깨부숩니다. 인간에 대한 모든 환상과 기대를 깨부숴야만 인간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고, 기꺼이 용서할 수 있고, 마음 다해 존중할 수 있고, 너그러이 용납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인간이 얼마나 어둡고 무지하고 부패했는지를 깨우치십니다.
기독교 신앙은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합니다. 인간 안에는 어떤 의도 없다는 것, 생명을 살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 인간은 근본적으로 부패하고 무지하다는 것,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다는 것, 깊은 어둠에 갇혀 있다는 것, 철저하게 신성 모독적인 방식으로 산다는 것, 이 근원 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아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내 안에 아무런 의가 없다는 것, 내 안에 생명을 살 능력이 없다는 것, 나는 근본적으로 부패하고 무지하다는 것,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다는 것, 깊은 어둠에 갇혀 있다는 것, 철저하게 신성 모독적인 방식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처절하게 인식하기 전까지는 참된 신앙의 세계에 들어갔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깨달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기 전까지는, 나에 대한 모든 환상이 깨지기 전까지는 구원의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용서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일만 달란트 빚진 자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마18:21-35). 어느 부자가 일만 달란트 빚진 자를 불러서 다 갚으라고 말했습니다. 네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갚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빚진 자는 엎드려 절하며 조금만 참아달라고, 조금만 더 참아주면 다 갚겠다고 통사정을 했습니다. 하도 통사정을 하니까 주인이 그를 불쌍히 여겨 빚을 다 탕감해주었습니다.
그런데 빚을 다 탕감 받은 사람이 길을 가다가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났습니다(달란트:데나리온/6000:1). 그는 즉각 백 데나리온 빚을 갚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도 엎드려 간구하며 제발 참아달라고, 조금만 참아주면 반드시 갚겠다고 통사정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불쌍히 여기지 않고 빚을 갚으라며 옥에 가두어버렸습니다.
자, 이 사람이 왜 이렇게 못된 짓을 했을까요? 이유는 분명합니다. 자기가 얼마나 엄청난 빚을 탕감 받았는지를 몰랐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일만 달란트라는 거액의 빚을 탕감 받은 것을 횡재라고만 생각했지 그 사건의 실체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자기가 얼마나 누추한 존재인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불쌍히 여기지 않은 것이지, 만일 알았다면, 자기가 정말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라는 것을 뼛속 깊이 알았다면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감옥에 보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엎드려 빌기 전에 백 데나리온의 빚을 탕감해줬을 것입니다.
무릇 인간의 모든 행위는 자기 인식으로부터 나옵니다. 내가 얼마나 불쌍한 자요 못난 자요 비천한 자인지를 알아야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길 수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무지하고 부패한 자인지를 알아야 다른 사람을 정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비열하고 뻔뻔하고 옹졸한지를 알아야 다른 사람을 함부로 멸시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교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결국 누가 구원받은 자입니까?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이 구원받은 자입니다. 나는 근본적으로 부패하고 무지하다는 것,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다는 것, 깊은 어둠에 갇혀 있다는 것, 철저하게 신성 모독적인 방식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뼛속 깊이 인식하는 사람이 진실로 구원받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런 사람인지를 뼛속 깊이 인식하는 사람만이 진실로 형제를 사랑할 수 있고, 기꺼이 형제의 허물을 용서할 수 있고, 마음 다해 형제를 존중하고 축복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이런 자임을 뼛속 깊이 인식하십니까? 날마다 순간마다 이 진실을 지각하며 사십니까? 꼭 그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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