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구원10 - 죽음이란 무엇인가?(1)

새벽지기1 2015. 10. 8. 22:14

 

우리는 그동안 한국교회의 구원론이 왜 뒤틀렸는가, 어떻게 뒤틀렸는가를 살펴봤습니다. 오늘부터는 구원론을 말할 때 빼놓아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이슈들을 살펴보려 합니다. 맨 먼저 말씀드릴 것은 죽음과 구원의 문제입니다.

모든 인간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살고 있습니다. 때로는 죽는다는 사실조차도 망각할 만큼 사는 일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결국 죽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인간을 가리켜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라고 한 대로 모든 인간의 삶은 결국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진실로 산다는 건 죽음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는 죽음이란 과연 뭘까요? 모든 삶의 행진을 정지시키는 죽음은 도대체 뭘까요? 죽음은 과연 생명의 끝일까요? 아니면 죽음 이후에도 우리가 모르는 어떤 삶이 있을까요? 죽음 이후에도 ‘나’라는 존재가 계속 남아 있을까요?

이것은 삶을 욕망하는 인간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이고 가장 궁극적인 질문입니다. 더욱이 죽음은 구원의 핵심 이슈입니다. 1) 죽음이 없었으면 구원 문제가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면에서, 2)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구원을 바라보는 태도와 내용이 달라진다는 면에서, 3) 예수님의 죽음으로써 구원을 이루셨다는 면에서 죽음은 구원의 핵심 이슈입니다. 죽음과 구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게 그리고 묘하게 얽혀 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을 이야기하면서 죽음 문제를 뺄 수는 없습니다. 아니, 맨 먼저 다루어야 하는 뜨거운 이슈입니다.

 

하여, 오늘은 죽음과 구원에 대해 살펴보려 합니다. 일반적으로 죽음을 이해하는 관점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다, 죽음 이후의 삶은 없다’는 관점과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다, 죽음은 또 다른 삶의 세계로 들어가는 시작이다’는 관점이 있습니다. 앞의 관점은 인간을 물적 존재(생물학적 존재)로만 보는 유물론적 관점이고, 뒤의 관점은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진 존재라고 보는 이원론적 관점인데, 두 관점은 모든 면에서 정반대입니다.

 

첫 번째 관점을 대표하는 사람으로는 예일대에서 17년 동안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강의한 셸리 케이건을 들 수 있습니다. 그가 대학에서 한 강의가 같은 제목의 책으로도 출판되었는데 저는 그 책을 읽었습니다. 그는 철학자답게 죽음 이후의 삶이 있다는 생각을 조목조목 따져가며 반박합니다. 영생을 꿈꾸는 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환상에 불과한 것인지를 치밀한 논리로 논증합니다. 그는 사람들이 꿈꾸는 영생을 한 마디로 ‘지루함’의 문제라고 잘라 말합니다(346쪽). 그리고는 사람들이 꿈꾸는 온갖 것들-낭만적인 사랑 ‧ 맛있는 음식 ‧ 하프를 켜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 신나는 놀이 ‧ 끝없는 탐구 ‧ 날마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기쁨 ‧ 평화 등등-이 영생 속에 다 들어 있다 해도 영생은 결국 너무 길다, 어떤 형태의 삶이라도 영원히 지속된다면 그 매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영원히 지속되는 삶은 결국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것이 될 것이며 결국은 ‘나쁜 것’으로 변하고 만다, 영생은 머지않아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싶은 악몽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영생은 환상적인 인생과는 거리가 먼 끔찍한 삶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라고 끈질기게 주장합니다(죽음이란 무엇인가. 340,341,349쪽).

 

그는 ‘영생은 결코 갈망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이 아니’라는 영국의 철학자 버나드 윌리엄스의 말에 동의하고, ‘노년의 삶을 힘들게 만드는 고통과 괴로움과 비참함에 종지부를 찍어주는 죽음은 축복’이라는 프랑스의 사상가 몽테뉴의 말에도 동의합니다. 그러면서 ‘영생은 우리에게 축복이 아니라 저주에 가깝다’고 선언합니다.

좀 길지만 그의 마지막 결론을 인용하겠습니다. “영혼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기계에 불과하다, 물론 일반적인 기계가 아니라 ‘놀라운’ 기계다. 우리는 사랑하고 꿈꾸고, 창조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기계다. 계획을 세우고, 이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그런 기계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기계다. 그리고 기계가 작동을 멈추는 순간 모든 게 끝난다. 죽음은 우리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신비가 아니다. 죽음은 결국 컴퓨터가 고장 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현상이다. 모든 기계는 언젠가 망가지게 되어 있다.

인간은 모두 죽는다는 사실이 결코 슬퍼할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건 아니니 부디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삶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마지막 축복을 누릴 때까지 우리가 살아갈 수 있다면 그건 분명 좋은 일이다. 오래 사는 것이 전체적으로 내게 좋은 것인 한 죽음은 나쁜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죽음은 너무나 일찍 찾아온다. 하지만 영생을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사실 영생은 우리에게 축복이 아니라 저주에 가깝다”(506쪽).

 

이것은 셸리 케이건만의 독특한 주장이 아닙니다. 이 강의가 예일대에서 17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로 꼽혔다는 것만 봐도 이것이 죽음을 바라보는 새로운 흐름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사후 세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절반이나 됩니다. 앞에서도 한 번 말씀드렸습니다만, ‘2005년 한국인의 장례 문화에 대한 갤럽조사’에 의하면 한국사람 중 40.7%는 사후 세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41.6%는 사후 세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뭐라 말할 수 없다’는 17.7%).

이처럼 사람들은 점차 ‘죽음 이후의 삶은 없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이들의 생각은 매우 확고합니다. 모든 생명은 본질적으로 순환한다는 것입니다. 생명이 태어나서 자라다가 때가 되면 죽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고, 또 죽어야만 다른 생명이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산천에 널려 있는 모든 풀과 나무들이 났다가 씨앗을 맺고 죽으면 그 씨앗이 또 다른 생명으로 피어나듯이, 동물들이 태어나서 새끼를 낳고 죽음으로써 새끼들이 살아가듯이, 인간 또한 태어나서 자식을 낳고 죽는 것이 자연스런 과정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삶이 소중하고 가치 있다는 것입니다.

 

예, 일리가 있습니다. 현상적으로만 판단한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삶이 소중한 것이고, 죽음이 있기 때문에 다른 생명이 사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진실의 전부일까요? 죽음은 정말 생명의 절멸일까요? 죽음과 함께 하나의 생명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일까요?

만일 참으로 그렇다면, 인간의 생명과 삶이라는 게 지나치게 하찮고 허무한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인간의 존귀함을 찾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구원을 말하는 성경의 모든 이야기가 새빨간 거짓이 되지 않겠습니까? 구원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워지지 않겠습니까?

정말입니다. 진실로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면, 자연스런 생명의 순환이라면, 구원이나 영생을 상상하고 꿈꾸는 것도 우스워지고, 삶의 의미를 추구한다는 것도 우스워집니다. 또 죽음이 사물화 됩니다. 죽는다는 건 단지 때가 되어 생명 현상이 끝나는 것일 뿐이기 때문에 죽음의 무게가 사라지고, 죽음을 슬퍼하거나 두려워할 이유도 없어집니다.

 

자살 문제도 걸립니다. 죽음을 생명의 자연 현상으로 보게 되면 자살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자살이 왜 비인간적인 죄악인지를 설명할 수 있는 도덕적 근거가 없어지기 때문에 자살할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리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살을 장려하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상황에 따라 자살해도 된다는 논리가 얼마든지 가능해집니다. 실제로 셸리 케이건은 자살에 대해 “우리는 특정한 상황에서 자살을 정당화할 수 있다. … 특정한 상황에서 자살을 합리적인 선택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 항상은 아니지만 때로는 도덕적으로 적절한 선택이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죽음이란 무엇인가. 480, 503쪽). 세상에는 얼마든지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나쁜 삶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개인이 처한 상황을 합리적으로 심사숙고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는 것보다 더 낫겠다고 판단될 경우에는 자살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자살만 그런 게 아닙니다. 살인도 더 쉬워집니다. 사람이 동물을 죽이는데 심각한 죄의식을 갖지 않는 것처럼 사람을 죽이는 것도 심각한 죄의식 없이 죽일 수 있게 됩니다.

또 마음과 정신의 실재도 막연해집니다. 이들은 모든 의식(마음과 정신)이 뇌에서 나온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판단하고 꿈꾸고 의욕하는 모든 것들이 다 뇌의 작용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검증되지 않은 주장입니다. 영국의 심리철학자 콜린 맥긴(Colin Mcginn)은 ‘의식이 뇌의 산물’이라는 주장에 대해서 ‘그것은 결코 풀 수 없는 문제’라고 인정했고, 미국의 심리철학자 토머스 네이글(Thomas Nagel) 또한 ‘현재의 물질론은 그것이 어떻게 사실일 수 있는지에 대해 어떤 개념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입장이다’라고 결론 내렸습니다(켄 윌버. 통합심리학. 237쪽에서 재인용).

 

그러면 이제 두 번째 관점을 살펴봅시다. 두 번째 관점의 대표자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은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여사입니다. 이 사람은 정신과 의사이면서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친구로 평생을 살았습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 또 죽음을 체험한 사람들(잠간의 죽음 사이에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인터뷰하면서 죽음이 뭔지를 깊이 연구했습니다. 이렇게 평생을 연구하고는 최종적인 결론으로 ‘죽음은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죽음의 경험은 출생의 경험과 같다, 즉 죽음은 다른 존재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죽음은 그저 한 집에서 더 아름다운 집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나비가 고치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단지 육체를 벗어나는 것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사후생. 17-18쪽). 또 죽음은 현재의 삶으로부터 고통과 고뇌가 없는 다른 존재로 변화하는 것이고, 죽음과 함께 모든 아픔과 부조화가 사라질 것이라고 했습니다(160쪽).

 

퀴블러 로스 여사처럼 10년 동안 1,300명의 임사체험자들의 사례를 조사하고 분석한 후 [죽음, 그 후]라는 보고서를 쓴 의학박사(방사성 종양학자) 제프리 롱도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고 강변합니다. 현대과학은 죽음을 존재의 마침표라고 믿도록 강요하지만, 그런 믿음이 전 인류에게 자리 잡은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고 말하면서, ‘죽음 이후의 삶은 존재한다’고 단언합니다(죽음, 그 후. 13-14쪽). 이 책에는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정말 놀랍고 기상천외한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제가 본래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잘 믿는 편이 아니라서 의혹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조심스럽게 읽었는데 허무맹랑한 거짓이라고 내치기가 어려웠습니다. 왜냐? 독자들이 꾸며낸 이야기라고 할까봐 제프리 롱은 거듭거듭 과학자로서의 양심을 걸고 최대한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방법을 총동원해 임사체험을 검증하고 분석했다고 강조하기 때문에 일단은 과학자로서의 양식을 신뢰하고 읽었습니다.

 

임사체험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육체가 죽는 순간 영혼이 육체에서 이탈하여 자기 몸 위에 떠오릅니다. 의학적으로는 분명히 죽었습니다. 뇌와 심장의 박동이 멎었고, 심장박동이 멈추면 뇌로 혈액 공급이 안 되고, 뇌로 혈액 공급이 안 되는 상황에서 10-20초만 지나도 뇌파도가 평평해지고, 뇌파도가 평평해진다는 것은 모든 감각과 의식이 없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임사체험을 한 자들은 예외 없이 살았을 때보다도 감각과 의식이 더 또렷했습니다. 시신을 두고 벌어지는 상황을 다 보고 느끼고 의식합니다. 자기를 살리려고 애쓰는 의사들의 모습도 생생하게 보고, 슬퍼하는 가족들의 감정까지도 생생하게 느낍니다. 물론 본인은 조금도 슬퍼하거나 아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깊은 평안을 느낍니다. 그리고는 터널이나 동굴 같은 곳을 통과하게 되는데 터널을 지나면 찬란한 빛을 만나게 되고, 그 순간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사랑에 휩싸입니다. 그러다가 자의나 타의에 의해서 다시 몸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하나의 사례를 소개하겠습니다. 한 여자는 태어날 때 어머니의 자궁에 심한 출혈이 있어서 시각 장애자가 됐습니다. 그러니까 태어나서 한 번도 사물을 본 적이 없는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임사체험 중에 처음으로 사물을 보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다시 육체로 돌아왔을 때는 본래처럼 볼 수 없었지만 임사체험 중에는 물체는 물론이고 색깔까지도 정확하게 보았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임사체험을 하고 나서 고질적인 질병에서 치유되기도 하고, 그 전에는 없던 영적인 능력을 얻게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삶을 매우 긍정적으로 바라봤습니다. 그 전의 삶이 불행했든 행복했든 관계없이 임사체험을 하고 나서는 삶을 한없이 아름답고 사랑으로 충만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이가 경험한 것이나 성인이 경험한 것이나 다르지 않았습니다. 동양 사람이 경험한 것이나 서양 사람이 경험한 것도 크게 다르지 않았고, 종교와 문화의 차이도 없었습니다. 전 세계인의 경험이 대부분 동일했습니다.

 

저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나 제프리 롱이 전하는 사례들을 읽으면서 임사체험을 경험한 자들의 증언이 새빨간 거짓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습니다. 심리적 쇼크에 의한 것이거나 뇌의 환각이 일으킨 현상에 불과하다고 폄하하기도 어려웠습니다. 분명히 우리가 귀기울일만한 상당한 진실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증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습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볼 때 받아들이기 어려운 한계가 있었습니다.

세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몸과 마음의 상호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길이 없어집니다. 몸과 마음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이미 확인된 사실입니다. 마음이 우울하거나 스트레스가 많으면 몸이 상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상식입니다. 그런데 임사체험자들은 몸이 없어도 정신과 마음의 지각은 여전하다고 말합니다. 아니, 오히려 더 각성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마음과 몸을 완전히 분리시키는 것이고, 마음을 허공에 매달아놓는 것이 됩니다.

둘째로, 죽음이 없어집니다. 이들은 몸과 영혼 중에 진정한 실재는 영혼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몸만 죽지 영혼은 죽지 않습니다. 때문에 죽음은 있으나 없는 것이 됩니다. 아니, 단지 죽음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죽음은 구원이 됩니다. 죽음은 환영하고 기뻐해야 하는 일이 됩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구원에서 가장 중요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용서가 끼어들 여지가 없어집니다. 개별 인간의 죽음이 곧 구원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가 필요치 않게 됩니다.

 

지금까지 죽음을 바라보는 두 관점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다, 죽음 이후의 삶은 없다’는 관점과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다, 죽음은 또 다른 삶의 세계로 들어가는 시작이다’는 관점을 살펴봤습니다. 두 관점 모두 나름의 일리가 있습니다. 완전히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의 일단이 있습니다. 특히 첫 번째 관점은 요즘 사람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중에도 죽음을 자연스런 생명의 현상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자연스런 생명의 현상으로 보는 것은 죽음의 본질을 외면하는 것이고 왜곡하는 것입니다. 죽음 속에 담겨 있는 구원론적 지평을 허물어뜨리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을 완전히 희화화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두 관점으로는 성경이 말하는 죽음의 본질을 담아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했던 말씀(창2:17)을 담아낼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이 죽음의 근원과 본질이 무엇인지를 암시하는 최초의 말씀인데 이 말씀을 담아낼 수 없습니다.

 

그러면 성경은 죽음을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이것에 대해서는 다음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