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들이 믿는 보편적인 믿음은 ‘예수 믿어서 천국 가는 것’입니다. 이 생각 속에는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간다’는 생각이 깔려 있고,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간다’는 생각을 더 파고 들어가 보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영혼’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뿐 아닙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도 내세를 믿는 자들이 꽤 있는데, 이들도 대부분 내세는 죽은 후에 영혼이 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땅으로 돌아가 썩어버리니까 당연히 육체는 내세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육체를 떠난 영혼만 내세에 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예수를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똑같아요. 죽은 후에 영혼만 내세에 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죽고, 죽으면 육체는 곧바로 땅으로 돌아가 썩으니까 육체에게도 내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영혼이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을 믿기는 쉬워도, 다 썩고 분해되어 흔적도 없이 소멸하는 육체가 부활하여 영원히 산다는 것을 믿는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성경도 이것을 인정합니다. 성경은 고린도교회 안에 부활을 믿지 못하는 자들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저들은 죽은 사람의 육체가 다시 부활한다는 사실도 믿기 힘들었고, 부활한 몸이 어떤 몸일지조차 상상하기 힘들었다고 말합니다(고전15:35).
사실입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부활을 믿는다는 건 정말 힘든 일입니다. 반면에 플라톤의 이원론은 인간의 죽음과 구원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게 해줍니다. 잠깐만 생각해보겠습니다. 모든 인간은 죽습니다. 겨우 백년을 살다가 죽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과 정신은 영원을 꿈꾸고 갈망합니다. 몸은 비록 이 땅에 갇혀 있지만 마음과 정신만은 아득한 과거로부터 영원한 미래까지 맘껏 상상하며 날아다닙니다. 인간의 몸과 마음은 이처럼 모순 속에 놓여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과 정신은 영원을 생각하며 꿈꾸는데 영원을 생각하며 꿈꾸는 인간의 몸은 죽습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이 처한 현실입니다. 플라톤은 이런 인간의 현실에 대하여 합리적인 설명을 합니다. 몸과 영혼은 전혀 다른 실체다, 몸은 연약하고 일시적이고 타락한 것인 반면 영혼은 영원불멸하는 존재의 근원이며 깨끗하다, 몸은 영혼을 담고 있는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설명했습니다. 죽음에 대해서도 죽음은 몸으로부터 영혼이 분리되는 것이고, 육체 안에 갇혀 있던 영혼이 육체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합리적인 설명임이 분명합니다. 인간의 몸과 마음이 모순 속에 놓여 있는 현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 또 죽음이라는 현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 별 무리가 없는 설명임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너도 나도 플라톤의 설명을 받아들였습니다. 육체는 소멸하지만 영혼은 영원히 산다는 ‘영육 이원론’과 ‘영혼 불멸설’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리스와 로마 세계로 들어간 교회도 이 생각을 받아들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설명하면서 영혼은 영원불멸하며, 예수를 믿으면 죽은 후에 영혼이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점차 교회의 핵심 메시지로 자리를 잡았고, 나중에는 교회의 전통으로 확고하게 굳어져서 오늘날까지도 동서양의 모든 교회가 믿고 따르는 가장 보편적인 구원관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관이 아닙니다. 성경은 영혼이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영혼만이 구원받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범위는 이보다 훨씬 넓고 높고 깊습니다. 영혼만 구원받는 게 아니라 육체도 구원받고, 나와 관련된 삶 전체가 구원받는다고 말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피조세계 전체가 구원받는다고 말합니다.
성경 66권에는 수많은 사건들이 나옵니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사건은 세 가지입니다. 1) 하나님의 창조, 2) 예수님의 성육신, 3)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이 세 가지 사건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뿌리이자 기둥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전적으로 이 세 가지 사건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 사건을 관통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창조, 성육신, 부활이 함의하는 공통분모는 과연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세상과 몸에 대한 긍정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심으로써 세상을 긍정하셨고, 인간의 몸을 입고 부활하심으로써 몸을 긍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성육신과 부활은 인간의 몸을 긍정하는 최고의 사건이요 최고의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성육신하심으로써 몸은 영혼의 감옥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선포하셨고,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을 부활시키심으로써 몸은 결코 썩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선포하셨습니다. 비록 지금의 몸이 썩어 소멸할지라도 반드시 썩지 아니하는 몸으로 회복된다는 위대한 메시지를 선포하셨습니다.
사도들이 증언한 것도 바로 이 부활이야기였습니다. 십자가에 죽은 예수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 사도들의 증언이었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믿는 자들도 부활한다는 것이 초대교회의 신앙이었습니다. 바울의 말을 들어봅시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5:23). 여기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이루어질 종말론적 구원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종말론적 구원이 완성되는 때에 영혼만 구원에 참여하는 게 아니라 몸도 흠 없이 보전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로마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신다고 했고(롬8:11), 우리는 모두 몸의 속량을 기다린다고 했습니다(롬8:23). 이처럼 몸의 부활을 믿는 것이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이었습니다. 죽음으로 분리된 영혼과 육체가 다시 재결합한다는 것이 저들의 궁극적인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그리스 로마 세계로 들어가면서부터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부활을 부정하는 플라톤의 사상을 넙죽 받아들였습니다. 사도들의 증언과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은 다 팔아먹고 영혼이 천국에 들어간다는 플라톤식 구원론을 너무 쉽게 받아들였습니다. 그 후 플라톤 사상은 교회의 전통으로 자리를 잡았고, 기독교 신학과 그리스도인의 의식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영국의 신약학자 톰 라이트와 독일의 조직신학자 몰트만은 이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톰 라이트는 ‘많은 기독교와 하위 기독교 전통은 우리에게 실제로 영혼이 있고, 구원을 받는다면 바로 그 영혼이 받으며, 구원의 내용인즉 죽은 후에 천국에 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고 지적했고(마침내 드러난 하나님나라. 71쪽), 몰트만은 ‘교회의 신학이 영혼 불멸이라는 플라톤의 관념을 일찍이 받아들였으며, 플라톤의 관념이 오늘까지도 교회의 신학을 대변하고 있다’고 잘라 말했습니다(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 294쪽). 니체는 아예 ‘플라톤 철학을 대중화한 것이 기독교’라고 조롱했습니다. 사실입니다. 서구 기독교가 플라톤화 했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진실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왜 이리도 쉽게 플라톤화 된 걸까요? 플라톤의 이원론이 말하는 구원관을 교회가 넙죽 받아들인 배경이 뭘까요? 1)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플라톤의 이원론이 인간의 죽음과 구원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현실적이고 합리적이었기 때문입니다. 2) 성경 말씀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마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영혼이 떠나셨다’고 표현했습니다(마27:50). 예수님 자신도 운명하시기 전에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눅23:46).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에도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행7:59). 히브리서 저자도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이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라고 했습니다(히10:39). 베드로도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고 했습니다(벧전1:9). 바울도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고전15:50).
이 말씀을 문자대로 읽어보십시오. 플라톤이 말한 것과 똑같이 읽힙니다. 혈과 육(몸)은 구원받지 못하고 영혼만이 구원받는다는 말씀처럼 읽힙니다. 그러나 이렇게 읽는 것은 말씀을 완전히 오독하는 것입니다. 마태가 예수님의 죽음을 ‘예수님의 영혼이 떠나셨다’고 표현한 것은, 몸은 죽었으나 영혼은 살아서 하늘로 올라갔다는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 예수님의 존재가 완전히 죽었다, 즉 육체만이 아니라 존재 전체가 세상을 떠났다는 뜻으로 말한 것입니다.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한다’는 말씀도, 육체는 죽으나 영혼만은 구원해달라는 뜻으로 말씀한 게 아니라 자기 존재 전체를 아버지께 의탁한다는 뜻으로 말씀한 것입니다. ‘혈과 육은 하나님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고,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말씀도 육체는 소멸하고 영혼만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세속에 속한 모든 삶의 양식은 결단코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 없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정말 그런지 한 번 확인해봅시다. 바울은 부활 이야기를 하면서 “혈과 육은 하나님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고전15:50).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것이로다.”(51-53절). 여기서 바울은 앞뒤가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앞에서는 ‘육체는 하나님이 유업을 받지 못한다’고 말해 놓고, 뒤에 가서는 ‘썩지 않는 몸을 입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말한 ‘혈과 육’을 문자대로 읽으면 뒤에 말한 것이 해석이 안 됩니다. 앞에서 말한 ‘혈과 육’을 문자대로 읽지 않고 ‘하나님을 떠난 모든 것’, ‘하나님과 상관없이 행한 모든 삶’을 표상하는 것으로 읽어야 비로소 해석이 됩니다.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을 문자대로 읽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몸만 죽는 것이지 영혼은 죽지 않은 게 되는데, 만일 몸만 죽고 영혼은 죽지 않는다면 예수님이 왜 ‘자기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한다’고 기도했겠습니까? 몸이야 어떻게 되든지 영혼은 아무 영향을 받지 않는데 왜 영혼을 부탁한다고 기도했겠습니까? ‘영혼’을 문자대로 읽지 않고 존재 전체를 의미하는 표상으로 읽어야 제대로 해석됩니다.
이런 용법은 지금도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제 아버님께서 자식들을 혼내실 때 종종 ‘넋 빠진 놈’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아내가 하는 말에 남편이 성의 없이 대답하고 돌아설 때 아내들이 한 마디 합니다. ‘아이고, 저 영혼 없이 대답하는 것 좀 봐라. 저걸 남편이라고. 차라리 벽에다 대고 말하는 게 낫겠다’고 하소연합니다. 아주 잔인하게 살인을 한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은 영혼이 없는 것 같아’라고 혀를 끌끌 팝니다. 반대로 한없이 착한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은 영혼이 참 맑다’라고 칭찬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넋’이니 ‘영혼’이니 하는 말은 다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몸과 구별된 ‘영혼’을 말하는 게 아니고 인간됨됨이가 어떠한지를 표현하는 하나의 상징적 수사입니다. 좀 오래 전에 안철수 씨가 쓴 책 중에 [영혼이 있는 승부]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여기서 ‘영혼이 있는’이라는 표현도, 다른 사람은 영혼이 없고 자기만 영혼이 있다는 뜻으로 말한 게 아니고 CEO로서 승부를 걸되 돈을 버느냐 못 버느냐 하는 차원에서 사업의 승부를 건 게 아니라 훨씬 근본적인 승부에 목표를 두었다는 것, 인간미를 잃지 않은 승부를 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성경이 ‘영혼’을 말할 때도 이런 뜻으로 한 겁니다.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영혼’이라는 실재를 말한 게 아니고 존재 전체, 혹은 존재의 중심을 의미하는 표상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뇌리 속에는 이미 플라톤의 이원론이 강하게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영혼’이라는 말이 나오면 자동적으로 플라톤 식으로 읽습니다. 육체는 구원받지 못하고 영혼만 구원받는다는 식으로 읽습니다.
그러나 영혼이 구원받는다는 생각 속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1) 예수님의 부활이 필요치 않게 됩니다. 영혼만 구원받는데 몸의 부활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몸의 부활은 전혀 필요치 않게 됩니다.
2) 죽음이 상실됩니다. 존재의 근원인 영혼은 죽지 않고 껍데기인 육체만 죽기 때문에 사실상 죽음은 없는 것이 됩니다.
3) 하나님의 창조와 예수님의 성육신도 무의미한 것이 돼버립니다. 영혼만이 참된 실재이고 영혼만이 구원받기 때문에 물질세계를 창조한 것이나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신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 돼버립니다.
이처럼 ‘육체는 멸망하고 영혼이 구원받는다’는 생각은 기독교 신앙의 뿌리이자 기둥인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고, 예수님이 성육신을 부정하고, 부활을 부정하는 실로 엄청난 도발입니다.
그런데도 교회는 지난 이천년 동안 영혼이 구원받는다고 생각해왔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교회가, 매년 크리스마스와 부활절 절기를 성대하게 지키는 교회가, 주일마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교회가 ‘육체는 죽고 영혼이 구원받는다’고 믿어버렸습니다. 입으로는 창조를 말하면서 창조를 부정하는 구원관을 믿었고, 입으로는 예수님의 성육신과 부활을 말하면서 성육신과 부활을 부정하는 구원관을 믿었습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예수님의 성육신과 부활을 믿는 기독교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구원관, 성경의 근본 진리와 배치되는 구원관을 믿고 따른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이해가 안 됩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얼토당토않은 갈 짓자 걸음을 걷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공부 시간에는 창조를 말하고 성육신과 부활을 말하면서 실제적으로는 창조와 성육신과 부활을 부정하는 구원관을 믿고 따르는 갈 짓자 걸음을 걷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을 하늘나라로 데려가기 위해 이 땅에 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몸을 포함해서 우리의 존재 전체, 우리의 삶 전체, 그리고 피조세계 전체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부조화로 일그러지고 깨어진 하늘가 땅을 다시금 조화롭게 회복시키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톰 라이트는 육체의 부활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육체의 부활은 기독교적 희망의 사소한 부분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에 대한 이야기에 의미와 형태를 부여해주는 요소다.”(마침내 드러난 하나님나라. 236쪽). 진실로 그렇습니다. 육체의 부활이야말로 기독교의 기독교다움을 보증하는 핵심 진실입니다. 육체의 부활이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의 궁극적 내용입니다. 몸의 부활을 부정하고 필요로 하지 않는 영혼의 구원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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