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구원7 - 뒤틀림의 실상(2) - 지상에서 하늘 나라로?

새벽지기1 2015. 10. 8. 22:08

 

앞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대부분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믿어서 천국 가는 것’을 복음의 요지요 구원의 요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습니다. 천국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전적으로 맞을 수도 있고 전적으로 틀릴 수도 있습니다. 사실 기독교 복음과 기독교 구원을 좌우하는 것은 천국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천국을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라고 생각하면 ‘예수 믿어서 천국 가는 것’이 기독교 복음이라고 믿는 것이 맞는 것이고, 천국을 ‘하늘의 어떤 장소’라고 생각하면 그 믿음은 틀린 것입니다. 영어와 한자어 표기를 보면 뜻이 좀 더 분명해집니다. ‘하늘의 어떤 장소’는 영어로 ‘the Kingdom in heaven’이고, 한자는 ‘천당’(天堂)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는 영어로 ‘The Kingdom of heaven/The Kingdom of God’이고, 한자는 ‘천국’(天國)입니다.

 

여기서 ‘천당’과 ‘천국’을 그게 그거 아니냐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이 둘은 엄청나게 다릅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다스림에 초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 영역에 소속되었다는데 초점이 있습니다. 반면에 ‘천당’은 지상의 물질세계가 아닌 영적 세계에 초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 영역에 소속되었느냐 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단지 영들이 사는 세계라는데 초점이 있습니다. 쉽게 정리하면 천국은 ‘하나님의 통치 세계’이고, 천당은 ‘영들의 세계’입니다.

이처럼 천국과 천당은 개념이 전혀 다릅니다. 천국은 성경적인 개념이고 천당은 비성경적인 개념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그동안 천국과 천당을 같은 개념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천국이 곧 천당이고, 천당이 곧 천국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에도 ‘천국’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으레 ‘천당’(하늘에 있는 어떤 장소-the Kingdom in heaven)이라고 생각하며 읽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엄청난 왜곡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세계를 단지 영들의 세계로 변질시키는 실로 엄청난 왜곡입니다. 그런데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왜곡인지도 모른 채 별 문제의식 없이 ‘천국’을 ‘천당’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거의 일상적으로 또 보편적으로 그렇게 해왔습니다. 구체적인 사례들을 확인해보겠습니다.

 

제가 처음 예수를 믿고 C.C.C라는 선교단체에서 신앙훈련을 받을 때 많이 부른 찬양이 있습니다.

 

“나는 구원 열차 올라타고서 하늘나라 가지요

죄악 역 벗어나 달려가다가 다시 내리지 않죠

차표 필요 없어요, 주님 차장되시니 나는 염려 없어요

나는 구원 열차 올라타고서 하늘나라 가지요”

 

여기서 구원은 하늘나라 가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죄악으로 가득한 곳이기 때문에 구원 열차 타고 속히 떠나야 하는 곳으로 표현되어 있고, 예수님은 죄악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사람들을 구출해 하늘나라로 데려가는 차장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또 많이 부른 찬양 하나를 더 소개하겠습니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화는 저 하늘에 있네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여기서도 이 세상은 죄 많은 곳이요 반드시 떠나야 할 곳이니 정들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반면에 저 하늘에 있는 천당이 우리의 본향이라고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이 세상은 다 가짜이고, 하늘에 있는 천당이 진짜 집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찬송가에도 이런 내용이 널려 있습니다. 491장 [저 높은 곳을 향하여]만 보겠습니다.

 

1절 :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2절 : 괴롬과 죄가 있는 곳 나 비록 여기 살아도 빛나고 높은 저곳을 날마다 바라봅니다.

5절 : 내 주를 따라 올라가 저 높은 곳에 우뚝 서 영원한 복락 누리며 즐거운 노래 부르리

 

여기서도 이 세상은 괴롬과 죄만 있는 곳이고, 천국은 저 높은 곳에 있으며 영원한 복락이 넘치는 곳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목사님들의 설교 레퍼토리도 그런 내용입니다. 이 세상은 저주 받은 세상이요 멸망 받을 세상이다, 저 하늘나라가 우리의 본향이고 이 땅의 삶은 잠시 거쳐 가는 나그네길이다, 순례길이다, 그리스도인은 순례자다, 라는 이야기를 반복하고 또 반복했습니다.

소설이나 동화나 영화에서도 천국을 하늘에 있는 어떤 장소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John F. 케네디의 조카인 마리아 슈라이버가 쓴 [착한 사람이 가는 곳 하늘나라]란 동화책은 할머니의 죽음을 어린 딸에게 설명하는 이야기입니다. 할머니의 죽음을 천국에 간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천국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천국은 푹신한 구름 위에 앉아서 다른 사람들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아름다운 장소란다. 밤이 되면 이 우주에서도 가장 밝게 빛나는 별 옆에 앉아 있을 수도 있단다. … 평생 착하게 살았다면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날 때 천국에 가게 되는데,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셔서 하나님과 함께 있도록 천국으로 데려가신단다.”

사실 이 동화만이 아닙니다. 거의 모든 동화가 천국을 이런 식으로 묘사합니다.

 

또 천국에 갔다 왔다는 사람들의 간증도 비슷합니다. 그들이 보고하는 간증의 내용은 대부분 이렇습니다. ‘천국에 갔더니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있고, 다니엘도 있고, 베드로도 있고, 첫 번째 순교자 스데반 집사도 있고, 한경직 목사도 있더라. 대궐 같은 집들이 즐비하고, 모든 길이 황금으로 포장되어 있더라.’ 뭐 이런 내용입니다.

 

성경은 어떨까요? 성경에도 이런 생각을 부추기는 이야기가 꽤 있습니다. 십자가상의 강도 이야기만 해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가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직전에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눅23:42)라고 애원하자 예수님이 즉각 응답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예수님이 하나님을 말할 때에도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마5:45)라고 표현했습니다. 또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자들을 향해서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요3:12)고 탄식했습니다. 바울도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고후5:1),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2:5-6),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3:20)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바울도 하늘과 땅을 대조적으로 말함으로써 ‘천국’을 ‘천당’이라고 착각할 수 있게 했습니다.

 

살펴본 것처럼 교회와 그리스도인 주변에는 천국을 천당이라고 생각하게 할 만한 요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찬송을 비롯해서 설교와 동화, 소설, 영화, 심지어 성경까지 ‘천국’은 구원받은 사람이 죽은 후에 가는 특별한 장소다,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곳이다, 성도들이 하얀 구름 위에 앉아 하프를 켜면서 끝없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곳이다, 라는 생각을 하도록 만듭니다.

우리나라만 이러는 게 아닙니다. 영국이나 미국의 그리스도인들도 똑같습니다. 영국의 신약학자 톰 라이트도 영국교회의 상황을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기독교가 구원받은 혹은 복 받은 사람들이 들어가게 될 위에 있는 천국과, 악하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이 가게 될 아래에 있는 지옥에 대해 가르친다고 생각해왔다. 지금도 여전히 교회 안팎의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교회의 공적 입장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마침내 드러난 하나님나라. 49쪽).

여러분, 이것은 완전한 오해이고 철저한 왜곡입니다. 천국은 결코 하늘에 있는 특별한 장소(the Kingdom in heaven)가 아닙니다. 천당이 아닙니다. 영들의 세계가 아닙니다(천국과 지옥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할 것임).

 

그런데 톰 라이트가 말한 대로 교회는 전통적으로 천국을 천당이요 영들의 세계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기독교 신학이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배경은 이렇습니다. 예수의 복음이 삽시간에 예루살렘과 유대의 경계를 넘어 그리스와 로마로 확장되자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에게 기독교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플라톤의 철학적 틀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 방식인 삼단논법을 빌렸습니다. 예수의 복음은 철저하게 히브리인의 통전적 사유 체계로 구성되어 있는데 반해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석적 사유 체계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복음을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플라톤 철학의 내용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론을 빌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가면서 뒤집어졌습니다. 처음에는 플라톤 철학이 기독교 복음을 설명하는 도구였는데 나중에는 플라톤 철학이 기독교 복음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플라톤의 이원론 철학이 기독교 신학을 규정하는 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교회가 물질로 된 이 세상은 근본적으로 허망한 그림자에 불과하고 영들의 세계만이 흠 없고 완전한 세계다, 영들의 세계가 진정한 천국이요 영원한 세계다, 라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늘(영들의 세계)과 땅(물질의 세계)을 두 세계로 보지 않습니다. 하늘에 속한 것과 땅에 속한 것을 배타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늘과 땅을 하나의 세계로 봅니다. 하늘과 땅을 배타적으로 보지 않고 상호적으로 봅니다. 상호 공존하고 협력해야 하는 통합적 세계로 봅니다.

성경의 세계관은 이원론이 아니라 일원론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행하신 사역을 한 마디로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0). 예, 바로 이겁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더 이상 분리되지 않고 통합되는 것, 더 이상 배척하지 않고 아름다운 조화를 회복하는 것,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 사역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이 물질세계를 멸하거나, 영혼을 물질세계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분리된 물질세계와 영적세계, 하늘과 땅을 다시금 하나로 통합시키는데 궁극적인 목표가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 땅에서 하늘나라로 삶의 자리를 옮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계를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사탄의 지배를 받는 삶, 죽음의 권세에 짓밟혀 죽임살이를 하는 삶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삶, 생명살이를 하는 삶으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흑암의 권세에서 건짐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로 옮기는 것입니다(골1:13).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계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계를 선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사랑으로 돌보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 여기서 그 삶을 온전히 살아내지는 못합니다. 궁극적인 구원은 종말이 돼야 그 실체가 드러납니다. 하지만 지금 이 세상이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라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이 지금 이 땅에 임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선포하실 때 맨 처음에 외쳤던 말씀이 뭐였습니까? “때가 찼고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였습니다(막1:15). 이 말씀은 이 땅에서 하늘나라로 떠날 채비를 하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나라가 지금 여기에 도래했으니 삶의 방식을 전환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실 때에도 뭐라고 간구했습니까?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17:15)라고 간구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칠 때에도 “주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10)라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구약의 이사야와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의 구원을 세계 열방이 참여할 것이라고 했고,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고,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사2:2,4; 미4:1-3). 이사야는 한 마디 더 했습니다. 구원의 날이 이르면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고 했습니다(사11:6-8).

이처럼 성경은 신구약을 막론하고 구원을 죽음 이후에 영혼이 하늘나라로 가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창조세계를 떠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땅에서부터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지난 이천년 동안 지상에서 천상으로 삶의 자리를 옮기는 것을 구원이라고 믿고 가르쳤습니다. 플라톤적 구원관을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이라고 믿고 따랐습니다. 그 결과 다섯 가지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1) 천국이 천당으로 변질됐습니다.

2) 구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 하나님의 통치 시스템에 소속하는 것인데 여기에는 관심이 없고 사후의 운명이 지옥행이냐 천당행이냐 하는 것에만 관심을 쏟았습니다.

3) 하나님나라는 하늘에서 임하는 것인데 우리의 영혼이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것으로 완전히 뒤집어졌습니다.

4)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 사이의 상관관계가 단절됐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완전한 실패로 끝나고, 이 세상은 완벽하게 구원에서 제외되는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5) 지금 여기의 삶에는 관심이 없고 온통 영혼 구원에만 목숨을 걸었습니다.

 

사실 기독교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창조에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을 창조하셨고 온 세상의 주인이시라는 게 성경의 일관된 메시지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창조와 구원을 떨어질 수 없는 하나로 봅니다. 창조는 구원의 토대이고, 구원은 창조의 완성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구원을 지상에서 천상으로 올라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완전한 실패로 끝나버리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상은 구원에서 완벽하게 제외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완전한 실패로 끝나버리는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일 수 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사후의 운명일 수도 없고, 지상에서 벗어나 천상으로 이동하는 것일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하늘에서 뜻이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과 지혜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삶입니다. 좀 더 단순하게 말하면 구원은 하나님 안에서 사는 삶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 바로 이 삶이 ‘참살이’이고 ‘생명살이’이고, 이 ‘참살이’와 ‘생명살이’가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늘나라로 올라갈 생각일랑 하지 마십시오.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고 맛보며 사는 일,

즉 ‘참살이’와 ‘생명살이’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