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한국교회의 구원론이 왜 뒤틀리고 왜곡된 것인지 그 배경을 살펴봤습니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뒤틀리고 왜곡됐는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뒤틀림의 실상, 뒤틀림의 내용을 하나하나 살펴보려 합니다.
우선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구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또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있는 구원관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십중팔구는 ‘예수 믿어서 천국 가는 것’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요 구원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가 영원히 사는 것, 즉 육체는 땅으로 돌아가 썩지만 영혼은 하늘나라로 올라가 영원히 사는 ‘사후 천국행’을 구원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솔직히 그렇습니다. 더 보탤 것도 없고 뺄 것도 없이, ‘예수 믿어서 천국 가는 것’이 기독교 복음이요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과연 성경적인 구원관일까요?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가 영원히 사는 것이 과연 성경이 말하는 구원관일까요?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는 먼저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가 영원히 사는 것이 구원이라는 생각 속에 어떤 세계관이 깔려 있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사후 천국행’ 구원관에는 세 가지 강력한 전제가 깔려있습니다.
1) 구원은 죽음 이후의 문제다.
2) 구원은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것이다.
3) 구원은 영혼의 문제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 전제에는 어떤 세계관이 깔려 있을까요? 성경적 세계관이 깔려 있을까요? 아닙니다. 플라톤의 철학이 깔려 있습니다. 하늘과 땅을 구분하고, 영적 세계와 물리적 세계를 구분하고, 영혼과 육체를 구분하는 플라톤의 이원론적 철학이 깔려 있습니다.
한 번 확인해봅시다. 플라톤이 말하는 것처럼 영적 세계와 물리적 세계를 구분하고, 영혼과 육체를 구분하면 구원이란 무엇이 되겠습니까? 영혼이 육체로부터 해방되는 것, 물리적 세계를 떠나서 영적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곧 구원이 됩니다. 그리고 영혼이 육체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구원이고,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것이 구원이라면 구원은 당연히 죽음 이후의 문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이 세 가지 전제는 철저하게 플라톤의 이원론 철학에 기초하고 있으며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려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구원을 말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죽음 이후에 시작되는 새로운 삶이라고, 지금 이 세상을 떠나서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것이라고, 영혼이 육체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정반대로 분리된 영혼과 육체가 다시금 하나 되는 것이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갈라진 하늘과 땅이 다시금 통합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플라톤의 이원론적 세계관에 기초한 구원관과 성경이 말하는 구원관은 완전히 다릅니다. 아예 정반대입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성경을 믿고 따른다는 교회는 성경이 말하는 구원관보다는 플라톤이 말하는 구원관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그 실상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구원을 죽음 이후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부터 살펴보겠습니다.
‘2005년 한국인의 장례 문화에 대한 갤럽조사’에 의하면 한국사람 중 40.7%는 사후 세계가 있다고 생각했고, 41.6%는 사후 세계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뭐라 말할 수 없다’는 17.7%). 여기서 사후 세계가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의 숫자를 가늠해보면 기독교인 숫자를 훨씬 뛰어넘습니다. 이것은 타종교인들 중에도 사후 세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꽤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비기독교인 중에 사후 세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의 생각이 어떨지를 추론해봅시다. 이 사람들의 생각은 아마도 ‘착하게 살면 죽은 후에 영혼이 좋은 곳에 간다’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겁니다. 이 속에는 두 가지 생각이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후에 좋은 곳에 가기 위해서는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고, 사후의 세계는 ‘극락’이 됐든 ‘천국’이 됐든 ‘하늘나라’가 됐든 아무튼 ‘이 세상보다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어 있습니다. 반면에 기독교인은 ‘착하게 살면’이라는 조건 대신에 ‘예수를 믿으면’이라는 조건이 붙고, 사후 세계를 ‘이 세상보다 좋은 곳’이 아니라 ‘천국’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용을 따지고 들어가면 사실상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아주 냉정하게 말하면 ‘예수 믿으면’이라는 조건 외에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의 차이가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죽은 후에 좋은 곳에 간다’는 면에서 일치하고, 둘째로 사후 세계를 가리켜 ‘천국’이라고 하느냐 ‘극락’이라고 하느냐 ‘좋은 곳’이라고 하느냐만 다를 뿐이지 내용은 사실상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예수를 믿는다는 것 외에는 그리스도인이 믿는 ‘사후 천국행’ 구원관이나 비기독교인이 생각하는 사후 세계나 별 차이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제 판단이 지나친 억측인가요? 여러분 스스로도 판단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사후 천국행 구원관이 매우 심각한 왜곡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전체를 무너뜨리는 매우 충격적이고 끔찍한 왜곡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교회는 지난 이천년 동안 별 문제의식 없이 ‘사후 천국행’ 구원론을 믿어왔습니다. 초대교회 시절을 빼놓고는 거의 다 ‘구원은 사후 천국행이다’라고 믿어왔습니다.
그 실상을 조금만 들여다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좋은데 꼭 젊어서부터 믿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젊었을 때는 세상 재미 좀 보며 살다가 죽기 전에 예수 믿어도 천국 가지 않습니까?’라고 솔직하게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을 좀 아는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죽은 십자가상의 강도 이야기도 곁들입니다.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직전에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눅23:42)라고 한 마디를 하고 구원받은 강도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도 그러면 안 되냐고 말합니다. 또 직접 대놓고 그런 말은 안 하지만 은근히 십자가상의 강도를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 왜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상의 강도를 부러워하는 것일까요? 간단합니다. ‘구원은 죽음 이후의 문제’라는 생각이 의식 저변에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젊어서 믿으나 죽기 직전에 믿으나 죽은 후에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똑같다면 굳이 젊어서부터 믿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되고, 젊어서 믿는 것은 오히려 손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십자가상의 강도를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또 있습니다. 구원을 받았는지 여부를 확인할 때 대부분 이렇게 묻습니다. ‘형제님, 오늘 밤에 죽더라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으십니까?’라고 묻습니다. ‘형제님, 구원받으셨습니까? 지금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고 계십니까?’라고 묻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이렇게 물으면 오히려 이단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 이단이 그렇게 묻거든요.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구원을 죽음 이후로 밀어놓았다는 것을 알고, 그 허점을 공격하기 위해 ‘형제님은 지금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고 계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여러분, 구원받았는지 여부를 확인할 때 왜 ‘오늘 밤에 죽더라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느냐’고 묻는 걸까요? 이것 역시도 ‘구원은 죽음 이후의 문제’라는 생각이 의식 저변에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의식 속에는 ‘구원은 죽음 이후의 문제’라는 생각이 매우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생각은 신앙생활에 심각한 문제를 발생시킵니다.
1)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이 분리됩니다. 교회 안에서는 신앙으로 살고, 교회 밖에서는 세상의 가치관과 방식을 따라 사는 괴리가 생깁니다. 사실 기독교 신앙은 삶과 분리되면 안 됩니다. 야고보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요 헛것이라고’(약2:18,20) 한 것처럼 신앙과 삶이 분리되면 그 믿음은 죽은 것이요 헛것이 됩니다. 기독교 신앙은 반드시 삶과 통합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구원과 삶이 통합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구원과 삶이 통합되려면 구원이 죽음 이후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이 땅의 문제가 돼야 합니다. 구원이 지금 이 땅의 문제가 아니고 죽음 이후의 문제라고 생각하면, 구원은 이 땅의 삶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 돼버립니다. 지금 여기서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할 어떤 이유도 찾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게 되면 자연스럽게 교회 안에서는 신앙으로 살고, 교회 밖에서는 세상의 가치관과 방식을 따라 사는 괴리가 발생하게 됩니다. 신앙과 삶이 통합되지 못하고 분리되는 실로 엄청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2) 신앙생활의 본질과 성격이 변질됩니다. 신앙생활이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사후 천국행을 보장받는 보험으로 변질됩니다. 신앙생활은 본래 사후 천국행을 보장받는 보험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공기를 호흡하며 살듯이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이 죽음 이후의 문제로 밀려나면 당연히 지금 여기의 일상에서 구원을 기뻐하고 구원을 사는 신앙생활이 불가능해집니다. 일상에서 구원을 기뻐하며 구원을 사는 신앙생활은커녕 죽고 난 다음에 천국행을 보장받겠다는 내세의 욕망만 춤추게 됩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구원을 죽음 이후의 문제라고 생각하면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이 분리되고, 신앙생활이 구원을 향유하고 구원을 사는 일이 아니라 죽고 난 후에 영생을 얻기 위한 사후 보험으로 변질되게 됩니다. 지금의 한국교회가 그렇습니다. 상당수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서는 신앙을 고백하지만 교회 밖에서는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세상의 방식으로 살고 있습니다. 때때로 신앙과 삶의 괴리에 고민하기도 하지만 그런 고민은 잠깐이고, 이내 곧 삶의 소용돌이에 파묻혀서 자기 욕망을 추구하며 정신없이 삽니다. 때로는 믿음으로 자기 욕망을 정당화하면서, 때로는 거룩한 비전으로 자기 욕망을 포장하면서 세상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세상의 방식으로 세상의 욕망을 추구하며 사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만사형통의 복을 누리고, 저 세상에서는 영생의 복을 누리겠다는 마음으로 신앙생활 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말로는 이 세상은 죄악과 어둠이 가득한 세상이요 멸망 받을 세상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만사형통을 열망합니다. 세상의 온갖 좋을 것들은 다 누리고 싶어 하고, 성공과 부와 명예를 다 거머쥐고 싶어 합니다. 이 세상을 아름답고 복된 세상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다면 이해할 수라도 있겠는데, 이 세상을 죄악과 어둠이 가득한 세상이요 심판받을 세상이라고 말하면서 세상의 좋은 자리, 좋은 것은 다 차지하겠다고 덤빕니다. 이런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있노라면 ‘참 기이한 족속이다, 정말 대단한 욕심꾸러기다’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이보다 더 욕심스러울 수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 사람들 눈에도 아마 보일 겁니다. 교회 안에서는 신앙으로 살지만 교회 밖에서는 세상의 가치관과 방식을 따라 사는 게 보일 겁니다. 신앙과 삶이 통합되지 못하고 분리되어 있는 게 보일 겁니다. 이 땅에서는 현세의 복을 추구하고 죽어서는 내세의 복을 추구하는 욕심꾸러기 중에 욕심꾸러기라는 게 보일 겁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저것들은 입으로는 구원받았다고 하는데 사는 걸 보면 우리와 다를 것이 없다, 신앙과 삶이 다르다, 위선자다. 욕심으로 꽉 차 있다’라고 욕하는지도 모릅니다.
사실입니다. 한국교회가 이렇게 된 것은 구원을 ‘죽음 이후의 문제’, ‘사후 천국행’이라고 잘못 가르치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우리는 죽은 후에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로 약속 받은 게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구원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증언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여기서 예수님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옮겼다’고 완료형으로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살아나는 때가 오는데 그 때가 곧 이 때’라고 했습니다(요5:25). 산상수훈에서도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죽은 후에 천국을 볼 것이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지금 천국을 본다고 했습니다(마5:3). 삭개오에게도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19:9)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한 번도 ‘사후 천국행’을 약속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에게 구원은 지금 여기의 문제였지 죽음 이후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치유 받은 사건도 보십시오.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예수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하고 군중 틈에 끼어들어가 지나가던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자 곧바로 병이 떠나는 기이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러자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았습니다(마9:22). 이처럼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구원은 죽음 이후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사건이었습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5:1)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죽은 후에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지금 여기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원과 하나님의 구원을 맘껏 누리자고 했습니다.
물론 구원이 현재적이기만 한 건 아닙니다. 구원은 종말론적 사건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에야 비로소 온전히 실현되는 종말론적 실재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지금 여기에 있는 구체적 실재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경험하고 향유할 수 있는, 아니 경험하고 향유해야 하는 실재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가 공기를 호흡하듯 하나님의 구원도 지금 여기서 호흡해야 하는 실재이기도 합니다. 지금 여기에 없는 구원은 죽음 이후에도 없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죽은 후에 영혼을 천국으로 데려가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지금 여기서 천국의 삶을 살라고 불렀습니다.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구원을 살라고 불렀습니다. 지금 여기서 하나님나라의 방식으로 살라고 불렀습니다. 특히 혼자로서는 하나님나라 방식으로 사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함께 모여서 서로 가르치고 배우라고 교회의 지체로 불렀고, 교회 속으로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의 구원을 죽음 이후로 미루지 마십시오. 죽음 이후로 미루는 것은 너무 어리석은 바보짓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이 땅의 아픔 가운데 뒤섞여 있고, 이 땅의 어둠 속에 숨어 있고, 우리의 슬픈 상처 속에 은폐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의 만남 속에, 이 시간 우리들이 드리는 작은 예배 속에, 또 서로가 정성껏 준비하는 식탁 교제 속에 녹아 있습니다. 사랑의 나눔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바로 그곳에 하나님의 구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에 임한 구원을 사는 일에 집중하십시오. 날마다의 언행심사를 하나님나라의 방식에 걸맞게 조정해서 하나님나라의 삶을 살도록 힘쓰십시오.
지금 여기에 없는 구원은 죽음 이후에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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