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구원4 - 구원론, 왜 뒤틀리는가(3) - 자아

새벽지기1 2015. 10. 8. 22:03

 

기독교 신앙은 단지 착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전능하신 분을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온 세상의 창조주이시고 통치자이신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근원이자 핵심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에는 이 구원의 근원과 핵심이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썰물처럼 빠져나가버리고 엉뚱한 구원이 교회 안에 들어와 하나님의 구원인양 행세하고 있습니다.

구원이 이렇게 뒤틀린 세 번째 배경은 자아입니다. 자아는 보통 생각하고 느끼고 지각하고 행하고 욕망하는 주체로 이해됩니다. 종교적 · 도덕적 · 사회적 행위의 주체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자아의 실체를 정확하게 규명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내 정신의 어디까지가 자아의 정신이고 자아 밖의 정신인지, 내 감정의 어디까지가 자아의 감정이고 자아 밖의 감정인지, 내 영혼의 어디까지가 자아의 영혼이고 자아 밖의 영혼인지를 정확히 알기는 어렵습니다. ‘자아’와 ‘자기’의 경계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자아’보다 큰 개념이긴 하나 일반적으로는 구분하지 않고 ‘자기’와 ‘자아’를 같은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사람은 자아를 의식하며 사는 유일한 피조물입니다. 세상에 수많은 피조물이 있지만 사람만이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자아의식을 갖고 삽니다. 그리고 자아의식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 도덕적 주체일 수 있는 것이고,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철수가 영이에게 한 달 후에 갚겠다며 백만 원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도 돈을 갚지 않자 철수가 영이에게 찾아가서 돈을 갚으라고 추궁했습니다. 철수의 추궁을 들은 영이는 난데없이 “한 달 전에 돈을 꿀 때와 지금의 내가 같은 인물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느냐?”고 생떼를 부리며 돈 갚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꾸며낸 이야기입니다만 이런 일이 다반사로 일어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서로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서로 약속을 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전혀 불가능합니다. 사람의 자아의식이 없거나, 있다 해도 날마다 변한다면 어떤 권리도 주장할 수 없고, 어떤 약속도 신뢰할 수 없고, 누군가를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심지어 가족공동체도 이룰 수 없습니다. 말씀샘교회 또한 주일마다 예배하며 함께 밥 먹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과 같은 인간으로 거대한 사회를 이루며 살 수 있는 것은 우리 안에 자아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항상 ‘나’ 일 수 있는 것은 내 안에 동일한 자아가 있기 때문이고, 또 내 안에 나만의 자아가 있고 너 안에 너만의 자아가 있기 때문에 나와 너는 서로 다른 사람일 수 있는 것이고, 서로 관계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자아’는 이처럼 나를 나 되게 하는 중심이고, 나와 다른 사람을 구별하는 준거이며, 나와 다른 사람을 연결하는 관계의 고리입니다.

 

그리고 ‘자아’가 나를 나 되게 하는 중심이고, 나와 다른 사람을 구별하는 준거이며, 나와 다른 사람을 연결하는 관계의 고리이기 때문에 자아는 구원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우선 자아는 구원의 일차적 대상입니다. 내 자아는 죄에 갇혀 있고, 어둠에 갇혀 있습니다. 만물보다 심히 부패했습니다. 선을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내 자아는 구원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 자아가 구원받아야 내 존재와 삶도 구원받을 수 있고, 세상 또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자아가 구원받지 못했는데 삶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전혀 불가능합니다. 내 자아가 구원받아야 내 육체도 구원받을 수 있고, 내 인격과 습관과 상처도 구원받을 수 있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자아는 구원의 일차적 대상입니다.

하지만 자아가 구원의 일차적 대상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자아는 구원의 일차적 대상이면서 동시에 구원의 일차적 내용이어야 합니다. ‘당신이 구원받은 증표가 뭐요?’라고 물을 대 ‘내 자아를 보시오. 내 자아가 곧 구원받은 증표요’라고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내가 구원의 표징이 되어야 하고, 내가 받은 구원이 나를 통해 드러나야 합니다. 내가 곧 내가 받은 구원의 내용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자아를 구원의 대상으로만 보아왔습니다. 나는 구원 받아야 하는 죄인이라는 측면에서만 보아왔습니다. 구원의 내용이기도 해야 한다는 측면에서는 거의 보지 않았습니다. 자아의 양면을 다 보지 못하고 한쪽 면만 보았습니다.

 

지금부터 그 실상을 살펴보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아는 구원의 일차적 대상입니다. 우리의 자아는 죄에 갇혀 있고, 어둠에 갇혀 있고, 만물보다 심히 부패했고, 선을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바울은 이 자아를 가리켜 ‘옛사람’(옛자아)이라고 했습니다(롬6:6, 엡4:17,22, 골3:9). 그리고 이 옛사람(옛자아)이 죽어야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새사람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롬6:6, 갈2:20), ‘예수와 함께 죽은 자’(골3:3)라고 했습니다. 옳습니다. 옛 자아는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죽음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 그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 가치관, 습관, 욕망, 꿈, 상처, 아픔 등등의 것들이 다 소멸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 가지고 있던 소속과 신분이 다 소멸되었다는 뜻입니다. 그전까지는 사탄의 지배를 받고 죄의 종노릇을 하며 죽음의 권세에 갇혀 살았지만 그 모든 것이 다 끝장났다는 뜻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실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봄에 꽃다운 생명들을 앗아간 세월호 참사를 겪었습니다.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사건 앞에서 온 국민이 함께 울고 아파했습니다. 검찰과 경찰은 이 참사의 책임을 묻기 위해 실소유주인 유병언씨를 붙잡으려고 5억의 포상금을 내걸고 전 국민 반상회까지 개최해가면서 실로 엄청난 인력을 투입했습니다. 그러나 유병언씨는 잡히지 않았고 결국 죽은 시신으로 발견됐습니다. 결국 그는 죽음으로써 모든 혐의와 책임으로부터 벗어났습니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유병언 씨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바울도 같은 맥락에서 말합니다. 옛 자아가 죽은 사람은 옛 자아와 관련된 모든 혐의와 책임으로부터 자유하다, 옛 자아가 속했던 모든 소속과 신분으로부터 자유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로마서를 봅시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6:1-2). 여기서 바울은 죄에 대하여 죽은 자는 죄에 대한 혐의와 책임으로부터 자유할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죄의 지배를 받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옳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아의 죽음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구원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입니다. 모든 구원은 일단 자아의 죽음으로부터 출발합니다. 하지만 죽음이 궁극적인 구원의 목표가 아닙니다. 자아가 죽는 것은 구원의 출발일 뿐이지 아직 온전한 구원은 아닙니다. 예수와 함께 전인이 죽음으로써 예수와 함께 전인이 살아나야만 비로소 구원입니다. 내 자아와 나와 관련된 모든 것이 죽고, 이 모든 것이 다시 살아나야만 비로소 구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원칙적으로 보면 전인이 죽고 전인이 살아나는 것이 구원 맞지만 정말 죽었고, 정말 살았느냐 하는 걸 고민해봐야 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옛자아가 정말 죽었습니까? 아닙니다. 아직도 팔팔하게 살아 있습니다. 분명히 예수와 함께 죽었는데 죽지 않았어요. 칭의와 똑같아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을 받았습니다. 의인이 됐습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의인입니까? 아닙니다. 여전히 크고 작은 죄를 범하며 사는 죄인입니다.

 

이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의인인데 의인이 아니고, 의인이 아닌데 의인입니다. 죽었는데 죽지 않았고, 죽지 않았는데 죽었습니다. 모순이고 역설입니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이 모순과 역설을 갖고 사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바울도 이 모순과 역설을 인정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했습니다(갈2:20). 그런데 죽었다고 선언했던 바울이 다른 편지에서는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했습니다(고전15:31). 또 성도들을 향해서도 너희는 이미 예수와 함께 죽은 자라고 해놓고 뒤에 가서는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골3:5),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라(롬8:13)고 권면했습니다. 명백한 모순입니다. 이미 죽었다고 한 사람이 날마다 죽는다는 것도 모순이고, 이미 죽은 성도들에게 죽으라고 말하는 것도 모순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바울 자신도 이 모순 속에 있었기 때문에, 모순임을 알면서도 역설적인 고백과 권면을 했던 것입니다. 예, 바울도 같은 모순 속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죽었으나 죽지 않았고, 죽지 않았으나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랬기 때문에 날마다 죽어야 했습니다.

 

여기서 이미 죽은 바울이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했던 것을 숙고해봅시다. 이미 죽은 바울이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했던 것 속에는 1)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은 날마다 죽어야 한다는 뜻이 들어 있고, 2) 받은 구원은 완성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예수 안에서 정말 죽은 사람은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날마다 죽는 사람만이 정말 죽은 사람입니다. 또 거듭난 사람은 날마다 죽음으로써 구원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구원은 순간의 일이지만 동시에 날마다 계속되어야 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구원에는 즉각성과 점진성이 공존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구원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놓치지 않아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할 때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것, 절대로 빠지면 안 되는 것이 뭐겠습니까? 건강일까요? 성공일까요? 행복일까요? 아닙니다. 자아입니다. 죽었던 자아가 살아나고, 어둠에 갇혀 있던 자아가 빛 가운데로 나오고, 죄의 종노릇하던 자아가 의의 종노릇하는 자아로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나야만 제대로 된 구원입니다. 자아 회복이 구원의 전부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자아 회복은 구원의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아 회복이 구원의 출발이요 구원의 중심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자아 회복을 ‘중생’(딛3:5), ‘거듭남’(요3:3,7, 벧전1:3,23)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다’(요3:3)고 말씀하셨고, 바울은 거듭남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롬6:3-5)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또 다른 편지에서는 거듭난 사람을 일컬어 ‘새로운 피조물’(고후5:17), 새 사람(골3:10)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예수님과 바울은 구원을 도덕적 갱신이나 영적인 깨달음 정도로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전적인 새로움, 전인적인 새로움으로 이해했습니다. 우리 안에 잠자고 있던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자아의 죽음을 구원의 요체로 보지 않고 자아의 회복을 구원의 요체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어떠했습니까? 자아 회복을 구원의 요체로 보았습니까? 자아 회복을 구원의 내용으로 보았습니까? 아닙니다. 거듭남과 중생을 열심히 외치기는 했지만 거듭남과 중생의 실제적 내용인 자아회복에 대해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거듭남과 중생을 열심히 외치고는 돌아서서 성도들의 자아 욕망을 부추기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거기다가 인간의 전적 부패를 강조한 칼뱅의 가르침을 따른답시고 대다수 목회자들이 옛사람의 죽음과 회개만 강조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죄와 죽음의 종노릇하던 자아에서 의와 생명이 충만한 자아로 회복되었는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된 자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회복된 자아’에는 주목하지 않고 죄와 죽음에 종노릇하는 ‘옛 자아’에만 주목했습니다. 예수와 함께 죽은 자아, 죄와 죽음의 권세에 갇힌 ‘옛 자아’만 두들겨 팼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이미 받은 구원을 사는 것이고, 내 인격과 언행심사 속에 구원을 담아내는 것이고, 구원받은 자아를 아름답게 가꾸고 구원의 깊은 맛을 경험하는 것인데, 이런 일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오로지 옛사람의 회개와 죽음만 강조했습니다.

심지어 자아로부터의 해방을 구원이라고 생각하는(플라톤적 사고) 목회자와 그리스도인들도 많았습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자아가 모든 죄악과 어둠의 진원지이니까 자아는 죽어야 되고 없어져야 된다, 그래야 구원의 길이 열린다고 외쳤습니다.

 

물론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죽음으로써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의 옛 사람(자아)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구원에 참여할 수 있고, 옛사람이 죽는 만큼 새사람이 회복되니까 어쨌든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이 핵심 이슈가 되면 안 됩니다. 죽음이 최종 목표가 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죽음으로 내모는 것은 오직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자아를 살리기 위해서 죽음을 말하는 것이지 자아를 죽이기 위해서 죽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자아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도 반쪽 진실에 불과합니다. 거짓된 옛자아로부터는 해방되어야 하지만 그것은 구원으로 나아가기 위한 출발일 뿐이지 그것 자체가 구원은 아닙니다. 진정한 구원은 오직 참된 자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고 고백했던 바울을 보십시오.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고전15:10). 무슨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자기 자아가 회복되었다는 말입니다.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구원이란 참 인간, 왕적인 인간, 영적인 인간, 새로운 인간, 즉 하나님의 품위에 걸맞은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칼 바르트. 교회교의학. 10권. 527쪽). 자아는 소멸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회복되어야 하는 것이고, 자아가 회복되어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한국교회는 세 가지 오류를 범했습니다. 1) 죽어야 하는 자아의 욕망을 부추기는데 앞장섰습니다. 2)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자아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이미 죽은 옛자아를 두들겨 패고 억압하는데 집중했습니다. 3) 자아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마치 구원인 것처럼 왜곡하고 호도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구원은 욕망 중심의 구원, 소유 중심의 구원으로 심히 뒤틀리고 왜곡되고 쥐방울만해졌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대신에 엉뚱한 구원이 하나님의 구원인양 행세했습니다. 신앙생활도 어둡고 침울하고 율법적이고 심판받고 정죄하는 것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교회 안에서 구원받은 자아를 돌보고 온전케 하기는커녕 옛자아만 들볶이고 억압당했습니까? 받은 구원을 기뻐하고 구원의 내용을 채워가기는커녕 끝없이 구원을 좇느라 초조하고 바쁘고 여유가 없었습니다. 결국 구원의 내용은 없고 구원받으라는 외침만 가득한 교회가 됐습니다.

 

결국 자아를 구원의 대상으로만 보았기 때문에, 자아로부터의 해방을 구원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이런 엄청난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신을 구원의 대상으로만 보지 마시고 구원의 내용으로도 보시기 바랍니다. 자아를 죽이려고만 대들지 마시고, 거듭난 자아를 사랑하고 돌보고 온전케 하는 일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날마다 죽고, 날마다 구원받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구원의 표징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이 밝히 드러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의 구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제 삶의 희망이고, 제 목회의 희망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구원의 표징이 되도록 자라는 것, 여러분이 하나님의 구원의 표징이 되도록 자라는 것,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가장 중요한 책무이자 희망입니다. 이 책무와 희망을 붙들고 나아갑시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립니다. 모든 구원은 언제나 내 안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고, 내 존재로부터 시작되어야 하고, 내 삶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