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앞에서 한국교회의 구원론은 구원받아야 하며, 뒤틀리고 왜곡된 구원론이 한국교회 일만 악의 근원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구원론은 왜 뒤틀리고 왜곡되는 것일까요? 한국교회의 구원론은 왜 누더기가 된 것일까요? 네 가지 배경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1) 구원이 인간의 욕망과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2) 교회가 종교화의 유혹에 굴복하기 때문입니다. 3)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4) 구원 이후에도 자아의 감옥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1)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구원론적 존재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애당초 분열되어 있는데다가, 이 세상 또한 악과 어둠의 권세가 창궐하고 있기 때문에 구원은 모든 인간이 직면한 가장 급박하면서도 근원적인 문제입니다.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보편적인 문제입니다.
복음서에는 사마리아 여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름도 없는 여자가 한 낮에 물 길러 나갔다가 우연히 예수님과 마주쳤습니다. 유대 땅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갈릴리로 돌아가는 길에 잠시 우물가에 앉아 쉬고 있던 예수님과 마주쳤습니다. 한 낮의 뜨거운 열기에 목이 말랐던 예수님은 여인에게 다가가 물을 청했습니다. 하지만 이 여자는 예수님이 유대인인 것을 알고 유대인 남정네가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면서 멈칫거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상야릇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만일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당신은 나에게 생수를 구했을 것이고, 나는 당신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라고. 여자는 의아했습니다. 의미심장한 말 같기는 한데 선뜻 알아듣기가 어려워서 물었습니다. “여기는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당신이 어디서 생수를 얻는단 말입니까?”(요4:11). 그러자 예수님은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3-14)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자는 이 말씀을 듣자 기다렸다는 듯이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15절)라고 구했습니다.
여러분, 이 여자의 행동이 이해되십니까? 낯선 유대인 남자의 말을 듣고 즉각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 않게 해달라’고 구하는 이 여자의 행동이 이해되십니까? 만일 이해된다면, 그 사람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구원론적 존재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는 겁니다.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에 대한 목마름, 즉 구원에 대한 갈망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는 겁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구원에 목말라 하는 인간의 전형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포함해서 모든 인간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 사마리아 여자입니다.
인간의 행위를 한 번 들여다봅시다. 사람이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 행동하는 것 같습니까? 인간을 행동하게 만드는 원초적인 에너지가 어디에서 나오는 것 같습니까? 성공 욕망일까요? 권력 욕망일까요? 재물 욕망일까요? 애정 욕망일까요? 아닙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성공 욕망, 권력 욕망, 재물 욕망, 애정 욕망까지만 인식하는데, 그런 욕망 밑에 하나의 욕망이 더 숨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 욕망입니다. 사람의 마음 저 밑바닥에 숨어 있는 구원 욕망이 솟구쳐서 어떤 사람에게는 성공 욕망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권력 욕망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재물 욕망이나 애정 욕망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애쓰는 것, 학생들이 잠을 줄여가며 공부하는 것, 공무원이 출세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것, 구도자들이 진리를 체득하기 위해 수행하는 것도 결국은 구원을 향한 몸부림입니다. 훌륭한 정치가가 나와서 세상을 바꿔주기를 기대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소시민의 구원 욕망입니다. 문학을 비롯한 각종 예술에 영혼을 쏟아 붓는 것도 구원을 향한 갈망을 표현한 것입니다. 심지어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는 것이나 절망의 나락에서 두려워 떠는 것도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구원을 향한 부르짖음에 다름 아닙니다.
싯다르타나 노자나 공자 또한 구원 욕망에 이끌려 구도의 길을 걸은 것이고, 소크라테스 · 간디 · 정약용 · 세종대왕 · 알렉산더 · 나폴레옹 · 베토벤 · 모짜르트도 구원 욕망에 이끌려 진리의 길, 정치의 길, 정복의 길, 음악의 길을 걸은 것입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종교, 정치, 교육, 예술, 전쟁, 의술, 스포츠, 섹스, 놀이, 마약, 과학, 기술, 경제 등 인간이 수행하는 모든 행위는 사실상 구원 욕망과 맞닿아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실로 구원 지향적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마음 저 밑바닥에는 왜 구원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심층심리학자 융의 ‘집단무의식’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인간 속에 무의식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전까지는 의식의 세계가 전부인 줄 알았는데 프로이트에 의해서 1) 무의식의 세계가 있다, 2) 무의식의 세계가 의식의 세계보다 훨씬 풍부하고 깊다, 3) 무의식의 세계가 의식의 세계보다 인간의 행동과 삶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확인됐습니다.
그러나 융은 프로이트에게 전적으로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프로이트가 주장하는 무의식이 단편적일 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측면으로 치우쳤다고 생각한 융은 무의식의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무의식을 ‘개인무의식’과 ‘집단무의식’으로 구별했습니다. 융은 사람이 경험한 것은 뭐든 지워지지 않고 저장된다고 했습니다. 모든 경험이 의식에 남는 게 아니고 어떤 것은 무의식의 세계로 추방되지만, 어쨌든 개인이 경험한 것은 다 저장된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 속에는 개인의 경험에서 유래하지 않은 인류 공통의 심적 기능이 있다고 했습니다. 유전에 의해 계승되는 본래적이고 훼손되지 않은 기억, 즉 인류 정신의 총량이 있다고 했습니다. 융은 이것을 ‘집단무의식’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융이 말한 ‘집단무의식’을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아담과 하와 이야기도 ‘집단무의식’에 근거해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깊이 소통하며 온전한 생명을 향유했습니다. 둘이서 서로 사랑하며 한 몸처럼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에덴동산에 있는 온 생명을 다스렸습니다. 그러다가 선악과를 먹어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했습니다.
그렇다면 에덴에서 경험했던 삶의 기억까지 사라졌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몸은 비록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했지만 에덴동산에서 행복하게 살았던 갖가지 삶의 경험들은 고스란히 아담과 하와의 영혼 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지워지지 않은 채 흔적으로 남았습니다. 그리고 에덴에서 살았던 삶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이 생겼습니다. 다시금 에덴으로 돌아가고 싶은 갈망이 솟구쳤습니다. 그들뿐 아닙니다. 그들이 에덴에서 살았던 삶의 흔적은 유전을 통해 후손에게 전해졌습니다. 그 결과 후손들은 에덴동산의 삶을 직접 경험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담과 하와처럼 에덴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을 마음에 품고 사는 것입니다.
저는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에덴동산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 경험한 감정의 편린 가운데 뚜렷이 기억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동네 친구들과 놀다가 해질녘이 되어 뉘엿뉘엿 떨어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돌아갈 때면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어떤 아련함 같은 것, 어디론가 끝없이 달려가고 싶은 강렬한 충동 같은 걸 느끼곤 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에덴동산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의 편린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봅니다. 융의 언어로 표현하면 제 안에 있는 집단무의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싯다르타나 노자나 소크라테스의 마음속에도 이 집단무의식이 있고,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린 아이의 영혼 속에도 에덴동산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이 구조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집단무의식이 바로 구원 욕망의 실체라고 생각합니다. 이 집단무의식이 에덴동산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을 불러일으키는 것이고, 에덴동산에 그리움과 동경이 구원 욕망의 근원 실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람이 매순간 에덴동산에 그리움과 동경에 사로잡혀 사는 건 아닙니다. 대부분은 자잘한 일상을 좇느라 정신없이 삽니다. 돈과 성공에 영혼을 빼앗긴 채 삽니다. 그런데 일상에 파묻혀 살다가도 불현 듯 인생의 공허감이 밀려올 때가 있습니다. 웃고 떠들며 작은 일상의 행복을 만끽하다가도 뿌리칠 수 없는 삶의 공허와 죽음이라는 절대 한계를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자기도 모르게 왜 사는지를 묻게 됩니다. 인생의 뒷골목에 내몰리거나 감당하기 힘든 상처를 받고 휘청거릴 때에도 나는 누구이며 인생이 무엇인지를 곱씹게 됩니다. 저는 이런 것도 에덴동산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이 불러일으키는 잔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구원 욕망은 매우 자연스런 본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없으면 안 되는, 아니 없을 수 없는 인간의 근원 욕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없으면 안 되는, 아니 꼭 있어야 하는 구원 욕망이 기독교 구원론을 왜곡하고 변질시키는 주범입니다. 정말 아이러니컬하게도 구원 욕망이 하나님의 구원을 짓밟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구원 욕망이 하나님의 구원을 왜곡하고 변질시키는 것일까요? 그것은 모든 욕망이 그러한 것처럼, 구원 욕망도 가만히 있지를 않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구원을 할퀴고 물어뜯고 쥐고 흔들어대기 때문입니다.
공기를 생각해보겠습니다. 공기를 손에 쥘 수 있습니까? 바람을 방 안에 저장할 수 있습니까? 전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단지 매순간 공기를 호흡할 뿐이지 공기를 손에 쥐거나 방 안에 저장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도 그래요. 하나님의 구원은 마치 공기와 같아서 손에 쥘 수도 없고 어디에 저장할 수도 없습니다. 그저 매순간 구원을 살 뿐이지 어떤 방법으로도 소유하거나 저장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서 꿈틀거리는 구원 욕망은 이걸 견디지 못합니다. 손에 쥐어지지 않는 구원, 어디에도 저장되지 않는 구원을 도무지 견디지 못합니다. 욕망이라는 건 뭐든지 손에 쥐어야만 안심이 되고, 가득 채워놓아야만 직성이 풀리니까, 구원 욕망도 구원을 손에 쥐려 하고, 가득 채워놓으려고 기를 씁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구원에 손을 댑니다. 하나님의 구원에다가 뭔가를 덧칠하고, 구원론을 이리저리 비틀고 일그러뜨립니다. 심지어 손에 쥘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을 손에 쥘 수 있는 것으로 바꿔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39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영생(구원)에 대하여 관심이 있다는 것, 또 영생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성경을 상고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런데 곧바로 폐부를 찌르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40절). 사람들이 영생에 관심이 있으면서도 정작 생명의 주이신 예수님께 오기를 원치 않는다는 겁니다. 구원을 갈망하면서 구원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외면한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왜 이렇게 모순된 행동을 하는 걸까요?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44절). 사람들이 세상의 영광, 사람들이 알아주는 영광을 차지하는데 정신이 팔려 있어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에는 관심이 없다는 겁니다. 진정한 영광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인데도 사람들은 그 영광에는 관심이 없고, 누가 더 큰 면류관을 쓰느냐, 누가 더 빛나는 면류관을 쓰느냐에 온통 관심이 쏠려 있다는 겁니다.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손에 쥐어지지 않으니까 손에 쥘 수 있는 이 세상의 영광에 미쳐 날뛴다는 이야기입니다.
구원도 그렇습니다. 한국교회가 그동안 열심히 구원을 말하고 가르치기는 했지만 정작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구원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피상적이고, 종교적이고, 자기 욕망 중심적인 구원을 추구해왔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구원을 추구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은 손에 쥘 수가 없으니까 손에 쥘 수 있는 구원, 즉 만사형통의 구원, 무병장수의 구원, 재물과 성공의 구원에 열광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구원은 천국행 티켓을 손에 넣는 것이 되어버렸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구원이 인간의 욕망 성취로 떨어져버렸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구원의 주체가 아니고 우리의 구원 욕망을 채워주는 방편이나 하수인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한국교회의 구원론이 왜곡되고 변질된 것은 다른 무엇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구원 욕망 때문입니다. 교회가 인간의 구원 욕망에 굴복했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보다 인간의 구원 욕망을 앞세웠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말씀으로 구원 욕망을 잠재우고 다스려야 하거든요. 구원 욕망이 악한 것도 아니고, 없어야 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 욕망이 충동질하는 대로 휘둘리면 안 됩니다. 구원 욕망을 잠잠히 다스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구원에 집중할 수 있고, 하나님의 구원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구원 욕망이 충동질하는 대로 끌려갔습니다. 중세 가톨릭교회가 죄악의 온상이 된 것도 소극적으로는 인간의 구원 욕망에 굴복했기 때문이고, 적극적으로는 인간의 구원 욕망을 역이용했기 때문이었는데 한국교회도 똑같은 오류를 범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을 인간의 구원 욕망에 맞게 뜯어고치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이처럼 역사는 반복됩니다. 실패는 반복됩니다. 기독교 역사는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변질시킨 구원론 타락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구원 욕망을 삼가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안에 꿈틀거리고 있는 구원 욕망이 날뛰지 않도록 잘 다스려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부탁드립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소유하려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구원을 손에 쥐려 하지 마십시오.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소유하려 하다가 오히려 구원에서 나가떨어졌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저 받은 구원을 사는데 집중하세요. 결코 취소되지 않는 하나님의 구원, 결코 도망치지 않는 하나님의 구원을 순간순간 구원을 호흡하며 사는데 집중하세요.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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