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기독교 구원론이 왜 쉽게 뒤틀리고 왜곡되는 것인지 그 배경을 살펴보고 있는 중입니다. 앞에서는 인간의 구원 욕망이 하나님의 구원을 찌그러뜨린다는 사실을 살펴봤습니다. 오늘은 종교화의 유혹이 어떻게 구원론을 왜곡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종교화의 유혹’이라는 표현이 귀에 거슬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의 상식으로 보면 기독교도 종교의 범주에 속한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종교인 기독교가 종교화의 유혹을 받는다는 게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해는 합니다.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기독교가 종교적 형식(기도, 예배, 교리, 전도, 교회 등)을 갖추고 있고, 종교적 활동을 하기 때문에 종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상식이 다 옳은 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종교적 세계가 성경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본래 ‘종교’(宗敎)라는 말은 불교가 자신들의 가르침을 ‘으뜸가는(宗) 가르침(敎)’이라고 칭했던 데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리고 보편적으로는 초자연적인 절대자의 힘에 의존하여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 체계라고들 이해하고 있습니다. 소박하게는 삶의 절대적 한계 앞에서 느끼는 불안이나 두려움에서 벗어나 마음의 안정을 얻기 위한 정신활동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런 형태의 정신활동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정신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활동을 이야기합니다.
한 번 확인해봅시다. 먼저 우리와 친근한 종교의 세계를 간단하게 훑어보겠습니다. 불교의 창시자인 싯다르타는 생로병사의 고통에 시달리는 인생의 한계와 사람이 몸과 말과 마음으로 짓는 모든 행위(업)로 인해 고통으로 가득한 삶이 반복되는 것(윤회)을 발견하고, 업과 윤회에 속박된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 업이 완전하고 영원히 소멸된 상태, 변화하는 사물에 대한 집착뿐 아니라 변화하지 않는 사물에 대한 집착까지도 완전히 사라져 청정해진 마음의 상태를 얻는 길을 깨달았습니다. 싯다르타는 그 깨달음의 상태를 일컬어 열반(니르바나)이라, 또는 공(空, 텅빔)이라 했습니다.
도교의 시조라 할 수 있는 노자는 아주 독특한 눈으로 세상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나라를 평안케 하기 위해서 법을 만들고, 군대를 강하게 하고, 계획을 하고, 문명을 발전시키는데 노자는 그런 일들이 오히려 인간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타락시킨다고 보았습니다(도덕경 57장). 도(道)의 자발적 움직임을 거스르고 차단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무위(無爲)를 주창했습니다. 여기서 노자가 말하는 무위는 도(자연의 질서)에 위배되는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고, 사물의 본성에 어긋나는 일을 고집하지 않는 것이고, 대상 사물이 갖지 못한 부적합한 기능을 강요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사물의 고유한 내재 법칙을 따르는 것이고, 상황에 적합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그렇게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노자는 이 무위(無爲)야말로 작위(作爲)로 인해 무너진 인간 사회를 본연의 상태로 돌이키는 길이라고 보았습니다.
유교의 뿌리인 공자는 죽음이나 신(神)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크고 작은 나라들이 끊임없이 싸우느라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고 사람을 죽이는 것이 일상사가 돼버린 세상을 보면서, 이런 사회는 사람이 살만한 사회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대안으로 인(仁)을 제시했습니다. 공자가 말하는 인(仁)은 사람(人) 둘(二)을 형상화한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사람이 사람에 대해 가져야 할 바람직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공자는 이런 인(仁)을 이룬 사람을 군자(君子)라 했고, 인이 가득한 사회를 대동(大同)이라 했습니다.
공자가 꿈꾼 대동은 이렇습니다. “대도가 실행되는 시대에는 천하를 사유물로 보지 않고 공유물로 보았다. 군주는 천하를 자기 자손에게 전하지 않고 어질고 유능한 사람을 뽑아서 전하였으며, 신의를 가르치고 화목하게 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부모뿐 아니라 남의 부모도 사랑하였으며, 자기 자식 뿐 아니라 남의 자식도 사랑하였다. 노인은 편안히 살다 죽을 수 있었고, 젊은이는 자신의 능력껏 일할 수 있었으며, 어린이는 잘 자랄 수 있었고, 홀아비, 고아, 과부, 자식 없는 노인, 불구자들도 보살핌을 받았다..... 도둑도 난을 일으키는 자가 없었으며 대문을 닫을 필요도 없었다. 이것을 대동이라 한다.”(예기, 예운편).
아주 간략하게 세 종교의 가르침을 훑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싯다르타나 노자나 공자의 가르침은 ‘으뜸가는 가르침’이라는 말뜻 그대로 매우 중요한 가르침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들은 시시한 문제를 건드리지 않았어요. 사람들이 세상에서 겪는 갖가지 근심과 고통과 불행의 근본 원인을 극복하고자 구도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들이 제시한 해법 또한 매우 훌륭하고 심오하고 덕스럽고 지혜롭고 이상적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싯다르타나 노자나 공자의 가르침을 사탄의 앞잡이쯤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매우 심오하고 덕스럽고 지혜롭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듣고 배워야 할 것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르침이 훌륭하고 심오하고 덕스럽고 지혜로움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가르침은 진리와 구원을 찾아가는 인간의 활동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활동은 없고 인간의 활동만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활동이라는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생명의 깊이에로 나아가지도 못합니다. 프랑스의 신학자요 사회비평가인 자크 엘룰은 종교의 한계를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종교심은 궁극적 진리를 준거로 삼는다고 하지만 정확히 말해 궁극 이전의 것을 준거로 삼고 있다.”(의심을 거친 믿음. 167쪽). 매우 정확한 지적입니다. 종교가 추구하는 것들은 일견 현실을 초월하는 것도 같고, 내세를 추구하는 것도 같고, 궁극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도 같지만, 사실은 세계 내적인 차원, 궁극 이전의 차원을 뛰어넘지 못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종교가 제시하는 해법과 하나님이 가져온 해법은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한 것 같아 보일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가져온 해법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부활생명의 세계입니다. 욕심을 죽이고, 마음을 정화하고,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 정도가 아니에요. 모든 사람이 평안히 살고, 약자들도 보살핌을 받으며, 도둑이 없어서 대문을 닫을 필요가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 정도가 아니에요. 업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정도가 아니에요.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 정도가 아니에요. 이런 것들은 다 종교가 제시한 해법들인데, 하나님이 제시한 해법은 이런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전혀 다른 차원의 생명을 사는 것입니다. 죄와 죽음의 권세로부터 해방되어 의와 부활생명의 세계를 사는 것입니다. 영원 무궁히 생명이시고 온 세상의 왕이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사는 것입니다. 지구의 모든 생명이 태양의 온기를 받아 살듯이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온기를 받아 사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기독교와 종교의 차이는 너무 많습니다. 종교는 인간이 하늘의 신을 향해 올라가는 상승운동인 반면, 기독교는 하늘의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려오는 하강운동입니다. 종교는 인간의 관심사와 질문에 답변을 가져다주는 반면, 기독교는 인간의 관심사와 물음을 뒤집어엎습니다. 종교는 교리와 윤리와 제도로 사람들을 통제하는 반면, 기독교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지배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시킵니다. 종교는 인간의 종교성과 구원 욕망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반면, 기독교는 인간의 종교성과 구원 욕망을 산산이 깨부숩니다. 종교는 내가 믿음을 휘두르는 반면, 기독교는 겸허히 믿음에 머무릅니다. 종교는 인간의 자기 초월을 향해 나아가는 반면, 기독교는 인간의 자기 회복을 향해 나아갑니다. 종교는 현세 기복적이거나 현세 도피적인 반면, 기독교는 현세를 초월함으로써 현세를 긍정합니다. 종교는 인간의 지혜가 발견하고 터득한 길인 반면, 기독교는 오직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 행위를 경험하는 은혜의 사건에 의지합니다. 종교는 사회를 안정시키고 제도화하고 규정하는 반면, 기독교는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과 같은 성령의 사건입니다(요3:8). 이처럼 기독교와 종교는 모든 것이 다릅니다. 신앙의 뿌리, 신앙의 행태, 신앙의 양식도 다 다르고, 구원의 방식, 구원의 차원, 구원의 내용도 다 다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그동안 이 둘의 다름에 거의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의 우월성을 강조하면서 다른 종교를 멸시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신앙과 우리의 신앙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는 깊이 따져보지 않았습니다. 교회생활과 선교하는 일에는 열심이었지만,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깨우치고 그 신앙의 깊이를 천착하는 일에는 무관심했습니다. 성경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 성도를 주님의 제자로 훈련하는 일에는 열심이었지만, 그마저도 신앙을 강화하고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게 하는 데만 집중했지 신앙을 심화하고 세상의 모든 우상들로부터 해방시키는 데는 눈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의 친 백성으로 세우고 받은 구원을 살게 하는 일에는 소홀했습니다.
진짜 기독교 복음은 인간의 구원 욕망과 종교성을 산산이 깨부수고, 사람들을 억압하고 지배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해방시키고, 현세를 초월함으로써 현세를 긍정하는데, 잠잠히 믿음에 머물며 하나님의 구원을 사는 일에 집중하는데, 한국교회는 인간의 구원 욕망과 종교심을 활활 타오르게 했고, 교리와 율법적인 규범으로 성도들을 억압했고, 만사형통의 복을 남발하며 교회성장에 몰입했고, 믿음을 휘두르기에 바빴고, 예배당 짓고 성도 관리하는 일에 매달렸습니다. 이런 것들은 고작해야 종교의 차원에 속한 것이거나, 아니면 자아의 욕망에 지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에 전념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한국교회는 종교화의 유혹에 굴복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리와 말로는 다른 종교를 부정하고 멸시하고 증오했지만, 실제적으로는 종교화의 유혹에 넘어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여러분, 종교는 결단코 기독교가 될 수 없습니다. 종교가 아무리 진화하고 또 진화한다 해도 종교는 기독교가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언제든 종교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종교는 기독교가 될 수 없어도 기독교는 언제든 종교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흔한 일이었고, 언제든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성경에도 나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이집트를 탈출한 후 시내산에 올라가 하나님의 율법을 받느라 자리를 비웠을 때에 일어난 일을 보십시오. 모세가 40일 동안 시내산에 머무르며 내려오지 않자 백성들이 아론에게 소리쳤습니다.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출32:1).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론에게 부르짖은 이 외침이 바로 종교의 외침입니다. 사실 종교의 본질은 다른 게 아닙니다.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하는 신을 만들어내는 것이 종교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를 빠져나오고 홍해를 건너는 과정에서 전무후무한 하나님의 이적을 경험하고 목도했으면서도 잠시 잠간 사이에 종교의 차원으로 떨어져버렸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며 전인적인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몸으로 가로막았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16:22). 그러자 예수님은 아주 단호하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23절)라고 내쳤습니다.
사실 베드로의 행동은 인간적으로 보면 매우 의리 있는 행동입니다. 제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일갈하시면서 뒤로 물러나라고 내쳤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유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사람의 일을 도모하는 것이 종교의 속성인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통해 사람의 일을 도모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 때부터 신약의 교회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은 너무 쉽게 종교화의 유혹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렇다면 물읍시다. 기독교는 왜 이토록 쉽게 종교로 떨어지는 것일까요? 자크 엘룰에게 귀 기울여 봅시다. 자크 엘룰은 첫째로 모든 인간은 안정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고, 둘째로 모든 인간은 계시가 던져주는 자유를 증오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의심을 거친 믿음. 204쪽). 맞습니다. 모든 인간은 어떤 보호막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또 하나님의 계시가 던져주는 자유-이 자유는 모든 뒤틀린 철학을 분쇄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가로막기 위해 세워진 장벽들을 허물고, 모든 흐트러진 생각과 감정과 충동을 그리스도께서 조성하신 삶의 구조에 맞게 변화시키는 자유(고후10:4-5)-를 살아내기에는 너무 벅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종교의 길을 선호하는 것이고, 교회가 종교의 길로 빠져드는 것입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종교적 시스템으로 변질시켰던 것처럼, 오늘날 교회도 생활의 안정이나 심리적 안정을 꾀하고 버거운 자유의 짐을 회피하기 위해 하나님의 진리를 종교적 시스템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종교적 차원의 보호막으로 변질시켰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게 가톨릭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종교화된 기독교의 완성판입니다. 기독교가 종교화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장 완벽하게 실현한 최고의 종교시스템이 바로 가톨릭이고 교황 제도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인류가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의 종교적 작품이 가톨릭이라고 생각합니다. 매우 세련되고 우아하고 성스럽고 신비하고 일사불란한 최고의 종교시스템이 가톨릭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가톨릭에 비하면 한국교회의 종교적인 모습은 지나치게 유치하고 조잡하고 천박하고 세속적입니다. 가톨릭은 종교적인 깊이와 성스러움이라도 있는데 개신교는 그것마저도 없습니다. 하지만 종교화의 길을 걷고 있다는 면에서는 가톨릭이나 개신교나 오십보백보입니다. 도토리 키재기에 불과해요.
제가 종교의 미덕을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종교의 역할과 가치를 멸시하는 게 아닙니다. 종교는 종교로서의 사회적 역할이 있고, 그 역할은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이번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다녀갔습니다. 수많은 일화와 큰 감동을 남겼습니다. 우리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 가치를 부정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그의 영향력을 깔아뭉갤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입니다.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신선한 충격과 약간의 영향을 미친 것, 그로 인해서 가톨릭에 대한 이미지가 좋아지고 예수님의 인기가 올라간 것이 전부입니다. 아주 냉정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보다 대중화하고 종교화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황이 의도한 건 아닐지라도 결과적으로는 기독교 구원론을 대중화하고 종교화하는데 크게 이바지 한 것일 뿐이라는 게 제 판단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대중화와 종교화의 방식으로 타락했습니다. 대중을 얻기 위해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을 대중의 기호에 맞게 손질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사람들 속에 내재되어 있는 종교적 관심사로 치환하면서부터 교회 타락은 시작됐습니다. 지금의 한국교회도 그렇습니다. 한국교회가 성장한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만, 교회가 성장의 붐을 타면서부터 점차 대중을 얻기 위한 교회 간의 경쟁이 불붙었고, 그 경쟁의 와중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은 대중의 기호에 맞게, 하나님의 진리는 사람들 속에 내재되어 있는 종교적 관심사에 맞게 손질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몇 십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 열매를 거두고 있습니다. 쉬지 않고 터지는 온갖 부조리, 하나님의 구원과 진리에서 멀리 떠난 한국교회의 강단이 바로 그 열매입니다. 이 수치스러운 열매는 막는다고 해서 막아질 문제가 아닙니다. 몇 가지 부조리를 극복한다고 해서 회복될 문제가 아닙니다. 오직 종교화의 길로부터 돌아서는 것만이 교회가 회복될 수 있는 길입니다.
여러분, 종교화는 유혹입니다. 종교화는 결코 혐오스러운 길이 아니에요. 종교화는 매우 우아하고 고상하고 성스럽고 평안하고 멋지고 매혹적인 길입니다. 종교화를 잘 하면 할수록 사람의 마음을 얻는데 도움이 됩니다. 때문에 교회는 언제나 종교화의 유혹에 넘어졌고, 지금도 넘어지고 있고, 앞으로도 넘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교화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아야겠습니다. 우아하고 고상하고 성스럽고 편안한 종교화의 유혹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아야겠습니다.
'좋은 말씀 > 정병선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원5 - 구원론, 왜 뒤틀리는가(4) - 무지 (0) | 2015.10.08 |
---|---|
구원4 - 구원론, 왜 뒤틀리는가(3) - 자아 (0) | 2015.10.08 |
구원2 - 구원론, 왜 뒤틀르는가(1) - 구원 욕망 (0) | 2015.10.08 |
구원론을 구원하라 - 1. 여는 글 (0) | 2015.10.08 |
[스크랩] 기도대로 이루어지는 꿈같은 세상-정병선 (0) | 2015.08.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