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구원5 - 구원론, 왜 뒤틀리는가(4) - 무지

새벽지기1 2015. 10. 8. 22:05

 

우리는 지금 기독교 구원론이 왜 누더기가 되었는지 그 배경을 살펴보고 있는 중입니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무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 중에는 예수 믿고 천국만 가면 된다, 다른 것은 다 목회자나 신학자에게 맡기고 성도는 그저 예수만 잘 믿으면 된다, 깊이 알려고 하면 머리만 복잡해지니까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단순하게 예수만 믿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또 ‘아는 것이 병이다’, ‘모르는 것이 약이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을 깊이 연구하고 살핀 솔로몬도 “지혜가 많으면 번민이 많고, 지식이 많으면 근심이 많은 법”(전1:18)이라고 내뱉었습니다.

옳습니다. 철학자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라고 말했고, 중국의 손자는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 -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백 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으며, 요즘도 정보력이 곧 돈이고, 정보를 손에 넣어야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아는 것이 우환이 되는 경우도 많고, 모르는 것이 약이 되는 경우도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지를 권장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아는 것이 병이라고 해서 무지를 권장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왜냐? 아는 것이 병이라면 무지는 훨씬 심각한 병이기 때문입니다. 옛말에도 있어요. “무지가 병을 키운다.” 사실입니다. 자기 몸이 병에 걸렸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다들 병을 키우는 겁니다. 사회도 그래요. 무지가 사회를 병들게 합니다. 사람들이 무지하면 힘 있는 놈들이 자기 맘대로 나쁜 짓을 저지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와 성도들이 무지하면 교회가 병듭니다. 성도가 무지해도 교회가 병들고, 목사가 무지해도 교회가 병듭니다.

 

저는 한국교회가 지금처럼 골병든 것은 8할이 목회자의 무지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의 열심이 있다고 해서 기본적인 학습 능력조차 안 되는 사람들을 신학 공부시키고 목사로 안수한 것이 한국교회가 범한 최고의 실수였다고 생각합니다. 목회 분위기도 공부하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신학교를 은혜로 졸업하고 현장에 나가면 다들 교회 성장에 몰두했지 공부에 몰두하지 않았습니다. 성도들도 공부하는 목사를 원치 않았습니다. 부지런히 발로 뛰는 목사를 신실한 하나님의 종이요 충성스런 일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도 신학교 다닐 때 선배 목사님들로부터 ‘목회를 잘 하려면 책을 많이 읽지 말라’는 충고를 들었습니다. 그러니 교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용이 부실한 교회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한국교회는 성경공부에 열심이었습니다. 성도들 중에 성경공부 프로그램 몇 가지를 이수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만큼 성경공부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사람이 고학력인데 비해 머리에 든 게 없는 것처럼, 한국교회 성도들도 성경공부 프로그램은 열심히 이수했는데 영적 지식은 빈약합니다. 성경을 열심히 읽기는 하는데 말씀의 세계로 들어가지는 못했습니다. 아는 것이 많은 것 같기는 한데 정말 알아야 할 것은 영 모릅니다. 구원이 무엇인지, 영생이 무엇인지조차도 잘 모릅니다. 솔직히 그래요. 한국교회는 무지의 늪에 빠졌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무지의 늪에 빠진 것 같지 않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무지의 늪에 빠져 있습니다. 사회의 큰 이슈가 터질 때마다 목회자들이 하는 발언을 들어보면 압니다. 하는 말마다 무지가 하늘을 찌릅니다. 정말 성경도 모르고, 세상도 모르고, 인간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는 목사들이 수두룩합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왜 무지의 늪에 빠지게 된 걸까요? 두 가지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는 구원의 확신과 구령의 열정이 지나치게 뜨거웠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믿음과 지식을 배타적으로 바라봤기 때문입니다.

물론 제가 구원의 확신과 구령(救靈)의 열정을 부정적으로만 보는 건 아닙니다. 구원의 확신과 구령의 열정은 한국교회를 이끌어온 긍정적인 원동력이었습니다. 지금은 형편이 좀 달라졌지만, 1990년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구원의 확신과 구원의 감격이 뜨거웠습니다. 영혼을 구원해야 한다는 구령의 열정 또한 차고 넘쳤습니다. 그 덕에 한국교회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부터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습니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부족함만 못한 법입니다. 구원의 확신도 너무 강고하다보니 다들 열정적으로 믿음에만 매달렸지 왜 구원받아야 하는지, 내가 받은 구원이 어떤 구원인지를 세심하게 묻고 살피지를 못한 채 지나가버렸습니다. 구령의 열정도 워낙 뜨겁다보니 길거리에 나가 복음 전하는 데만 열심이었지 내 안에 임한 구원 속으로 잠잠히 들어가지는 못했습니다. 조용히 구원의 삶을 음미하며 천착할 여유도 갖지 못했고, 믿음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도 못했습니다. 결국 구원의 확신과 구령(救靈)의 열정이 오히려 무지의 원인이 됐습니다.

 

두 번째 원인은 믿음과 이성(지식)을 배타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한국교회 안에는 믿음은 이성(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성(지식)은 믿음을 방해한다는 생각이 꽤 강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서 질문하고 토론해본 적이 있습니까? 교실에도 질문이 없지만 교회 안에는 더더욱 질문이 없었습니다. 어쩌다가 질문을 하면 대뜸 믿음이 없는 사람, 의심이 많은 사람으로 낙인찍히기 일쑤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권면도 들어야 했습니다. ‘형제님, 의심하지 말고 그냥 믿으세요. 의심의 영에 사로잡히면 위험합니다. 열심히 기도해서 의심의 영을 내쫓으세요.’ 심지어 어떤 목회자들은 성경 외에는 어떤 책도 읽지 말라고 금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책을 많이 읽으면 머리가 커져서 믿음에 방해된다고 읽지 말라 했습니다. 정말입니다. 한국교회가 강조한 것은 오직 믿음이었지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이 두 가지, 너무 강고한 구원의 확신과 너무 뜨거운 구령의 열정, 믿음과 이성을 배타적으로 이해하는 잘못된 관점이 한국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을 무지의 늪에 빠뜨린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은 것도 사실은 무지 때문이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내 백성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므로 망한다’고 탄식했습니다(호4:6). 바울은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하나님의 지혜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했습니다(고전2:8).

또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오류에 빠지게 된 배경을 ‘하나님께 열심은 있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나님의 의를 몰랐기 때문에 자기 의를 내세운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롬10:2-3). 참으로 놀라운 역설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무지를 낳았습니다.

한국교회도 이런 역설적인 오류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오히려 하나님의 지혜를 보지 못하게 가로막는 장애가 됐습니다. 더욱이 한국교회는 믿음과 이성을 배타적이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러니 무지의 늪에 빠지지 않을 도리가 없었던 겁니다.

 

진실을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믿음과 이성은 결코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무지의 세계로 부르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지의 세계가 아니라 계시의 세계로 불렀습니다. 진리와 빛의 세계로 불렀습니다. 참된 지혜의 세계로 불렀습니다. 이 지혜가 비록 인간의 지혜를 넘어선 지혜이고, 이성의 논리를 넘어선 논리이긴 하지만 어쨌든 무지의 세계로 부른 게 아니라 진리와 지혜의 세계로 불렀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진실입니다. 어거스틴을 보십시오. 그는 진지하게 진리를 찾아 다녔습니다. 마니교에도 깊이 들어가 봤습니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진리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진리에 눈을 떴다고 고백했습니다.

저 또한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깊은 어둠에 있었습니다. 정말 알아야 할 어떤 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갑자기 눈이 밝아졌습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는 순간 눈이 밝아졌다고 했는데, 저는 하나님을 만난 순간 눈이 밝아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빛, 하나님의 지혜에 눈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빛, 하나님의 지혜에 눈에 열리자 세계를 보는 눈이 열렸고, 인간을 보는 눈이 열렸습니다. 잠자던 이성이 깨어나고, 지적인 호기심과 사고력이 왕성해지고, 세상 모든 것에 관심이 생기고, 물음이 많아지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눈을 감았을 때는 물어야 되고 눈을 뜨면 물음이 없어져야 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러지 않았어요. 눈을 뜨고 나니까 오히려 물음이 생겼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나서 세상이 재미없어졌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은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이고 죄악이 가득한 세상이기 때문에 세상은 등지고 십자가만 보게 됐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저는 예수님을 믿고 나서 오히려 세상이 흥미진진해졌습니다. 세상이 아름답고 귀하고 사랑스러워졌습니다. 내가 이토록 아름답고 찬란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 너무 기쁘고 행복하고 황홀하고 감사했습니다. 세상을 등지기는커녕 세상일에 관심을 갖고 탐구하고 뛰어들게 됐습니다. 이성을 멸시하거나 배척한 적도 없습니다. 오히려 이성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이성을 적극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은 저에게 이성과 지식을 멀리하라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 손을 잡아 책속으로 이끄셨습니다.

 

저는 이런 것들이 지극히 정상적인 믿음의 결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만 따져보십시오. 하나님이 온 세상을 창조하셨으니까,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만나면 온 세상이 아름답고 푸근하게 다가오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성을 주셨으니까, 이성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만나면 이성이 깨어나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사도의 말도 들어보십시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고 했습니다(골2:3). 또 그리스도인은 사람을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라고 했습니다(골3:10). 베드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했습니다(벧후3:18). 옳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신령한 지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무지의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넘치는 세계입니다. 무지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야말로 빼놓을 수 없는 구원의 요소입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지의 감옥에 가두지 않고 해방시킵니다.

 

물론 지식이 믿음은 아닙니다. 지식이 구원을 가져다주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 속에는 지식이 있고, 은혜 속에도 지식이 있고, 구원 속에도 지식이 있습니다. 믿음 안에 지식이 없으면 그 믿음은 자기 확신에 불과하고, 은혜 안에 지식이 없으면 그 은혜는 거짓 평안에 불과하고, 구원 안에 지식이 없으면 그 구원은 자기 욕망의 투사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어떻게 했습니까? 믿음, 은혜, 구원에 꼭 있어야 하는 지식을 폐기처분해버렸습니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고(골2:3),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라고(골3:10),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벧후3:18) 말씀했지만 한국교회는 이런 말씀은 다 폐기처분해버리고, 주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는다(행16:31),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다(요3:16),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라는 말씀(마7:7)만 주문처럼 반복했습니다.

 

사실입니다. 믿음 안에 지식이 있어야 진짜 믿음이고, 은혜 안에 지식이 있어야 진짜 은혜이고, 구원 안에 지식이 있어야 진짜 구원인데, 한국교회는 목이 터지라고 믿음과 은혜와 구원만 강조했지 그 속에 있어야 하는 알짜배기 지식은 다 폐기처분해버렸습니다. 그 결과 믿음은 자기 확신이 돼버렸고, 은혜는 거짓 평안이 돼버렸고, 구원은 자기 욕망의 투사가 돼버렸습니다. 속은 텅 비고 쓸데없는 것들만 덕지덕지 붙은 이상야릇한 믿음, 이상야릇한 은혜, 이상야릇한 구원이 돼버렸습니다.

 

예, 다시 말씀드리지만 무지가 원인입니다. 무지가 한국교회를 병들게 했고, 무지가 그리스도인들의 인격과 삶을 찌그러뜨렸습니다. 목회자의 무지가 성도들을 무지하게 하고, 한국교회를 골병들게 한 가장 직접적인 원인입니다.

계몽의 시대를 거쳐 이성이 활짝 꽃핀 과학 기술 시대에 무지를 들먹이느냐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아직도 무지에 갇혀 있습니다. 무지로부터 많이 빠져나온 것도 사실이지만, 정말 중요한 것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무지에 갇혀 있습니다. 특히 영적인 무지는 매우 심각합니다. 영국교회의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영국의 신학자 톰 라이트가 “내 경험으로 보자면 많은 그리스도인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궁극적인 희망이 정말로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다.”(마침내 드러난 하나님나라. 9쪽)고 말한 걸 보면 영국교회도 한국교회나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물읍시다. 무지가 왜 이토록 보편적인 걸까요? 두 사람의 진단을 들어보겠습니다. 정신과 의사인 스코트 팩은 생각하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고, 일본의 문화학자 우치다 타츠루는 “무지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지식의 결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알고 싶지 않다’라는 마음가짐을 갖고 한결같이 노력해온 결과가 바로 무지”(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7쪽)라고 일갈했습니다. 옳습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갈대임에도 불구하고 생각하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또 ‘아는 것이 병’이라고 핑계하며 ‘알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굳게 지키며 살기 때문에 무지에 갇혀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지에 갇혀 살기 때문에 존재와 삶이 헝클어지고 뒤틀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뒤틀리는 것도 똑같습니다. 사람들이 구원을 욕망하면서도 하나님의 구원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이 아닌 것을 붙잡고 씨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어리석음에 빠지지 마십시오. 생각하기 싫어하는 게으름에 빠지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정말 구원을 받았다면, 정말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았다면 무지의 감옥에서 잠자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계시와 은혜는 이성을 배척하지도 않고, 지식을 배제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잠자는 이성을 깨워 무지로부터 해방시킵니다. 그런 면에서 무지를 방조하거나 조장하는 자는 다 가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짓 목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성을 배척하는 믿음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길을 걸어가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예수 안에서 이성이 회복되었습니다. 무지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교만하지도 않지만 무지의 늪에 빠지지도 않습니다. 한없이 겸손하면서도 밝은 이성으로 살아갑니다. 믿음으로 살면서도 회복된 이성으로 살고, 회복된 이성으로 살면서도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무지로부터 해방시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날마다 무지로부터의 해방을 향해 걸어갑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주님 안에서 회복된 이성은 믿음을 부정하지 않고, 진리의 영이신 성령으로 말미암은 믿음은 이성을 배척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구원론이 뒤틀리게 된 배경을 하나하나 살펴봤습니다. 1) 지나친 구원 욕망, 2) 종교화의 유혹, 3) 편협한 자아인식, 4) 무지가 어떻게 구원론을 왜곡했는지를 살펴봤습니다. 결국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무지와 욕망입니다. 무지와 욕망, 이 둘이 기독교 복음, 기독교 구원론을 왜곡하고 무너뜨린 주범입니다. 이건 기독교 복음에만 해당되는 게 아닙니다. 모든 삶의 왜곡과 일탈은 거의 다 무지와 욕망에서 비롯됩니다. 이 엄정한 진실을 잊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