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구원11 - 죽음이란 무엇인가?(2)

새벽지기1 2015. 10. 8. 22:29

 

앞에서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에는 두 가지가 있다는 것, 죽음은 생명의 끝이라는 관점과 죽음은 생명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는 관점이 있다는 것, 그리고 두 관점 모두 일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말하는 죽음의 본질을 담아내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과연 죽음을 어떻게 바라볼까요? 성경이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은 매우 독특합니다.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것과 많이 다릅니다. 성경은 죽음을 죄와 연계해 이해합니다. 바울은 죽음을 죄의 삯이라고 했습니다(롬6:23).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그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다고 했습니다(롬5:12). 야고보는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는다고 했습니다(약1:15).

그러면 이들은 어떤 근거로 죄가 사망을 초래했다고 말하는 걸까요?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과 아담 사이의 언약 사건에 근거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만드시고 에덴동산에 살게 하시고는 ‘동산에 있는 모든 과실을 맘껏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아라.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창2:16-17)는 말씀을 하셨는데, 바로 이 말씀에 근거해서 죄가 죽음을 초래했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하나님과 사람이 나눈 첫 번째 대화이자 언약입니다. 아담의 생명과 죽음이 걸린 아주 의미심장한 언약입니다. 성경은 이 언약 사건을 통해서 에덴동산에서의 삶이 아담 자신의 삶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과 언약적 관계에 있는 삶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생명이라는 것, 삶이라는 것은 객관적인 무엇이 아니고 관계적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생명과 죽음을 좌우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죽음이 왜 있는지를 말해주는 최초의 해명이면서 동시에 죽음의 근원이 무엇인지, 죽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최초의 말씀인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죽음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 말씀에서 죽음이 무엇과 엮여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과 엮여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즉시 죽음에 내몰릴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죽음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하셨을 때의 죽음이 과연 뭘 뜻하는 것이었을까요?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죽음과 관련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로 아담이 현재 향유하고 있는 생명활동이 끝난다(육체적 죽음)는 뜻이었을까요?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생명이 절멸한다는 뜻이었을까요? 만일 하나님이 말씀하신 죽음이 단지 생명활동의 멈춤, 생명의 절멸을 뜻하는 것이었다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었을 때 바로 죽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죽지 않았습니다. 선악과를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식과 감각이 생생하게 살아서 하나님을 피해 나무 사이로 숨기도 했고, 선악과를 먹게 된 책임을 하와와 뱀에게 떠넘기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가인과 아벨 등 자식까지도 낳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죽음이 생명의 절멸이 아니라는 걸 반증입니다.

물론 이렇게 반박할 수도 있습니다.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는 말씀이 꼭 즉각 죽는다는 뜻이 아니라 늙어서 죽는다는 뜻일 수도 있다, 라고 반박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백 번을 양보해서 이 반박을 받아들인다 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이 살아있는 사람을 가리켜 ‘죽은 자’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그(예수 그리스도)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2:1)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버젓이 살아 있는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향해 ‘죽었던 너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 중의 한 사람이 아버지를 장사한 후에 주님을 따르겠다고 말했을 때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 두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응대하셨습니다(마8:22). 여기서도 앞의 ‘죽은 자’는 죽은 시신을 가리키지만, 뒤의 ‘죽은 자’는 살아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또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는 말씀도 했습니다(요5:25). 여기서도 ‘죽은 자’는 죽은 시신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성경은 살아있는 사람을 가리켜 ‘죽은 자’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담에게 말씀하신 죽음이 생명의 절멸(육체적인 죽음)을 뜻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아담에게 말씀하신 죽음이 영혼이 육체를 떠난다는 뜻이었을까요?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을 보낼 필요도 없고, 예수님이 세상을 위해 대속의 죽음을 죽을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가만히 놔둬도 때가 되면 모든 사람이 죽을 것이고,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육체를 떠날 것이고, 영혼이 육체를 떠나면 영혼은 자기 세계로 돌아가 영원히 존재할 텐데 예수님이 죽어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럴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을 부활시키는 것은 영혼을 다시금 육체의 감옥에 가두는 것밖에 안 되는데 부활시킬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럴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고,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에 비추어볼 때 하나님이 아담에게 말씀하신 죽음이 영혼이 육체를 떠난다는 걸 뜻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죽음은 과연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했을 때 그 죽음이 말한 것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다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것이 곧 죽음이라는 뜻이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자기 몸과 정신의 에너지만으로 사는 것이 곧 죽음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는 말씀은 죽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행위의 결과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행위 자체가 이미 죽음이라는 뜻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것 자체,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 자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 자체가 곧 죽음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나 바울이 살아있는 자들을 향해 ‘죽은 자들’이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하나님께 등을 돌린 채 사는 자들,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없이 사는 자들은 살아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라는 뜻으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외에도 아주 많습니다. “생명에 이르게 할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롬7:10)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15:26)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7:10)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4)

이 말씀들이 다 사망을 말하고 있지만 육신의 사망을 뜻하는 단락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사망이 다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뜻합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 바로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죽음의 근원 진실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열리면 생명의 세계가 열린다고 말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닫히면 죽음의 세계가 열린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일차적으로는 죽음이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단절되는 것을 뜻하지만 이차적으로는 영적인 세계와 물질적인 세계가 단절되는 것을 뜻합니다.

성경은 맨 먼저 이렇게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여기서 천지는 눈에 보이는 하늘과 땅이 아닙니다. 천(天)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총칭하고, 지(地)는 눈에 보이는 하늘과 땅 전체를 총칭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이 선언은 눈에 보이는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르기도 하고 구별되기도 하지만 분리될 수는 없는 한 덩어리라는 뜻입니다. 이 세계가 영적인 세계와 물질적인 세계로 이원화되어 있긴 하나 둘이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두 세계가 서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런 세계가 죄로 말미암아 어떻게 됐습니까? 영적인 세계와 물질적인 세계 사이의 조화와 균형이 깨졌습니다. 본래 하나였던 세계가 심각하게 균열되고 분리되는 재앙이 발생했습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에게 하신 말씀을 보면 압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창3:15-18). 이 말씀들을 한 마디로 줄이면 모든 관계가 뒤엉키고 대립하고 반목하고 소외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아담아, 내가 너에게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했지? 그때 말한 죽음이 바로 이런 거야, 모든 관계가 뒤엉키고 대립하고 반목하고 소외되는 것, 이런 것이 죽음이란다. 알겠니?’

 

예, 바로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죽음입니다. 성경은 죽음을 존재가 소멸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아요. 존재와 존재 사이의 분리 ‧ 단절 ‧ 떠남 ‧ 소외가 곧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를 윤리적으로 말하지 않아요. 율법적으로 말하지 않아요. 죄 역시 관계적으로 말합니다.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것,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것이 곧 죄라고 말합니다. 형제를 미워하고 외면하는 것이 죄요, 자연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것이 죄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이처럼 죄와 죽음을 철저하게 관계론적 차원에서 봅니다. 존재론적 차원에서 보지 않고 관계론적 차원에서 봐요. 그런데 사람들은 죽음을 관계라는 차원에서 보지 않습니다. 죄의 삯이라는 차원에서 보지 않습니다. 거의 언제나 존재론적 차원에서 봅니다. 존재가 소멸하는 것, 육체적인 생명이 멈추는 것이라고 봅니다.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공부를 할 때는 아담의 불순종으로 죽음이 왔다고 말하고,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 죽음이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여전히 죽음은 생명활동이 멈추는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존재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은연중 그런 생각을 해요.

 

왜 그럴까요? 사람의 뇌가 논리적인 지식이나 믿음보다는 눈에 보이는 것을 더 잘 받아들이고, 눈에 보이는 것의 영향을 더 많이 받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예수님이나 바울은 예수 밖에 있는 사람을 가리켜 ‘죽은 자’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자로 보입니다. 우리 눈에는 살아있는 자로 보이기 때문에 예수 믿지 않는 직장 동료나 가족들을 바라보면서 죽은 자라는 생각을 안 합니다. 산 자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이 아무리 죽은 자라고 말해도 우리의 뇌는 산 사람이라고 이해합니다. 바로 이것이 뇌의 정직함이고 한계입니다. 우리의 뇌는 성경과는 멀고 현실과는 가깝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죽음을 창조질서의 일부분이라고, 생명의 자연스런 순환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우리의 뇌 때문입니다. 일단은 누구나 다 죽으니까, 의롭게 산 예수도 죽임을 당했고, 구원받았다는 그리스도인들도 죽임을 당했고, 위대한 삶을 산 간디도 죽임을 당했고, 인문 철학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소크라테스도 죽임을 당했으니까, 사람뿐 아니라 모든 생명이 다 죽으니까, 이것이 눈에 보이는 현실이니까, ‘아~ 죽음은 창조질서의 일부분이구나. 죽음은 태초부터 있었던 것이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구나, 생명의 자연스런 순환이구나.’라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솔직히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이 죽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죽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죽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뇌가 그렇게 인식하기 때문에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일단 눈에 보이는 것은 육체적인 생명활동이 멈추는 것이 전부이고, 모든 생명이 죽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피상적인 진실일 뿐입니다. 죽음의 껍데기만 본 것이지 죽음의 속살을 본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의하면 죽음은 결코 창조질서의 일부분이 아닙니다. 자연의 순리가 아닙니다. 인간 이외의 다른 생명체들은 모르겠습니다. 개나 고양이가 태어나서 죽는 것이 자연의 순리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인간에 대해서만큼은 태어나서 죽는 것을 자연의 순리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죽음을 자연의 순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부정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구원 행위 전체를 부정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웃음거리로 만들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만일 육체적인 생명활동의 멈춤이 죽음의 전부라면 죽음을 자연의 순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매우 합리적입니다. 하지만 육체적인 생명활동의 멈춤은 죽음의 본질도 아니고 죽음의 전부도 아닙니다. 죽음의 일부분이긴 하나 죽음의 전부는 아니에요.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육체적인 생명활동이 멈추는 것보다 훨씬 깊고 근원적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단절되는 것입니다.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존재와 존재 사이의 분리 ‧ 단절 ‧ 떠남 ‧ 소외가 죽음입니다.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죄가 곧 죽음입니다. 죄를 짓는 것이 죽음이고, 죄를 짓는 것이 죽음을 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 원수를 갚기 위해서 사는 것, 너를 이기기 위해 사는 것, 미움과 원망 가득한 마음으로 사는 것, 남을 해치는 것, 사기 치는 것, 끼리끼리 당을 짓는 것, 비방하고 욕하는 것, 왕따 시키는 것, 해로운 음식 파는 것, 교만한 것, 자랑하는 것, 남을 없이 여기는 것, 자기만을 사랑하는 것, 전쟁하는 것, 수군수군하는 것은 모짝 죽음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모든 삶은 죽음을 사는 것입니다. 설령 가족을 먹여 살린다 해도, 돈을 잘 번다 해도, 사회적인 성공을 한다 해도, 첨단 지식에 밝다 해도, 죄 속에서 사는 모든 삶은 오직 죽음을 사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간은 죽은 자이고, 죽음을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말씀하신 것도 결국 이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너는 더 이상 생명을 살지 못하고 죽음을 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은 죽음을 살아왔고, 지금도 죽음을 살고 있습니다. 바꿔 말하겠습니다. 죽음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정지해 있는 명사가 아니라 꿈틀거리는 동사입니다. 죽음은 객관적 실체가 아니에요. 존재의 소멸이 아니에요. 생명활동의 멈춤이 아니에요. 삶의 해체가 아니에요. 죽음은 삶의 양상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생명을 억압하고 생명을 거스르는 모든 삶의 양상, 죽음을 부르고 죽음을 낳는 모든 삶의 양상이 곧 죽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죽음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죽음이 왕 노릇한다고 말했습니다(롬5:14). 정말입니다. 죽음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막강한 힘이자 권세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생명의 질서를 부패시키는 무서운 독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을 괴롭히고 더럽히는 것도 바로 이 죽음이란 놈입니다. 그런데 이 죽음이 자연의 순리라고요? 아닙니다. 죽음은 죄의 삯입니다.

 

그리고 죽음이 죄의 삯이기 때문에, 죽음이 명사가 아닌 동사이기 때문에, 죽음이 관계론적이기 때문에 구원이 가능한 것입니다. 다음에는 죽음이 어떻게 구원과 연결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