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죽음은 죄의 삯이다, 명사가 아닌 동사다, 관계론적인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인 죽음과 구원의 역설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묻겠습니다. 만일 죽음이 죄의 삯이 아니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자연의 순리라면 죽음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당연히 구원할 이유도 없고, 구원할 길도 없다고 봐야 합니다. 생각해보세요. 죽음이 자연의 순리(창조의 질서)인데 뭣 때문에 죽음에서 구원한단 말입니까? 자연의 질서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자연의 순리를 어기기라도 하란 말입니까? 그럴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 하나의 생명이 살기 위해서는 다른 생명이 죽어야 하니까, 그것이 자연의 질서니까 죽도록 내버려둬야 합니다.
또 죽음이 자연의 순리라는 것은 죽음의 원인이 없다는 이야기인데, 원인이 없는 문제를 무슨 수로 해결하겠습니까? 아무리 하나님이 전능하시다 해도 원인이 없는 문제까지 마구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원인이 없는 문제까지 다 해결하는 것이 전능이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의 전능은 그런 마구잡이식 전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능은 원인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는 전능입니다. 사랑의 방식을 따라 행하는 전능이고, 정의의 방식을 따라 행하는 전능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죽음이 자연의 순리라면 죽음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없다고 봐야 합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죽음이 죄의 삯이 아니고 자연의 순리라면 죽음 문제를 풀어야 할 이유도 없고, 죽음 문제를 풀 방법도 없다고 봐야 합니다. 반대로 죽음이 자연의 순리가 아니고 죄의 삯이라면 어떻게 될까요? 죽음이 만일 죄의 삯이라면 죽음 문제를 풀어야 할 이유도 있다고 봐야 하고, 죽음 문제를 풀 방법도 있다고 봐야 합니다. 우리가 질병의 원인을 모르면 치료할 수 없지만 원인을 알면 치료할 수 있는 것처럼 죽음도 그렇다고 봐야 합니다. 죽음의 원인이 없으면 죽음을 치유할 수 없지만 원인이 있으면 치유할 수 있다고 봐야 합니다. 원인을 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원인이 있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도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성경이 구원 이야기를 하는 것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입니다. 이 세상의 죽음에는 원인이 있다, 아담의 죄가 바로 그 원인이다, 그러니 죽음 문제는 해결되어야 하고 해결될 수 있다, 이것이 성경 66권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에는 이런저런 복잡한 이야기들이 많지만 성경 66권이 하는 이야기를 요약하고 또 요약하면 결국 죽음과 구원 이야기라고 할 수 있고, 그 내용인즉 ‘죽음에는 원인이 있다. 죽음의 원인은 아담의 죄다. 그러니 죽음은 치유되어야 하고 치유될 수 있다.’ 이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성경이 말하는 죽음과 구원 이야기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죽음 문제를 어떻게 치유하고 극복하는지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자~, 죽음의 원인은 죄입니다. 죄라는 바이러스가 생명에 침투함으로 인해서 죽음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온 세상에 번졌습니다. 물론 우연히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충분히 예고되었고 경고되었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살 때 충분히 예고하셨던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예고하고 경고한 대로 죄로 인해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왔습니다. 모든 생명이 죽음에 잡아먹히는 대재앙을 피할 수 없게 됐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생명의 세계를 죽음의 굿판으로 만드는 이 대재앙을 어떻게 해야 끝낼 수 있겠습니까? 모든 생명이 죽음에 잡아먹히는 이 참담한 현실을 어떻게 해야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죽음의 원인은 죄이니까 죄 문제를 치유할 방도를 찾는 것만이 죽음 문제를 치유하는 길인데, 어떻게 해야 죄 문제를 치유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의인은 없으니 하나도 없다(롬3:10),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 모두가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롬3:11-12). 자, 이런 인간에게서 죄 문제를 치유할 방도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모두 죄에 물들어 있고,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데, 하나님이 아무리 지혜롭다고 해도 이런 인간에게서 죄 문제를 치유할 방도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전혀 불가능합니다. 죄인인 인간에게서는 죄 문제를 치유할 방도가 나올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용서하는 것밖에는 길이 없습니다. 이미 죄에 물들었고 죽음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인간과 앉아서 죄를 책망하고 따져봐야 아무런 해결책이 나올 수 없으니까, 죄를 물고 늘어지면 늘어질수록 죽음만 강화되니까,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용서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물론 무작정 아무렇게나 죄를 용서하는 건 아닙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맺은 언약에 근거해서 죄를 용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죽음이라는 이 언약은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사람이 살아있는 한 영원히 유효한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도 구속력이 있지만 하나님에게도 구속력이 있는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옳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은 영원토록 에덴동산에서 맺은 언약(행위언약)에 근거해서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이라고 해서 자기 맘대로 아무렇게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니까 무슨 일이든 자기 맘대로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도 행위언약에 부합하는 방식으로만 죄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행위언약을 지키면서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길이 뭐겠습니까? 일단은 죄 값을 치러야 합니다. 죄 값도 치르지 않고 죄를 용서한다는 것은 행위언약을 무시하는 것이니까 일단은 죄 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런데 행위언약에 따르면 죄 값은 죽음입니다. 그렇다면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음이라는 죄 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것도 인간의 죽음으로 치러야 합니다. 아담의 죄 값으로 소나 양이 죽는다고 한 게 아니라 아담이 죽는다고 했으니까 반드시 인간의 죽음으로 죄 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래야만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모든 인간은 이미 죄 값으로 죽은 존재입니다. 그러니 죄 값으로 죽은 존재의 죽음으로 어떻게 죄 값을 치를 수 있겠습니까?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또 모든 인간은 죄 값으로 이미 죽었는데 어떻게 또 죽는단 말입니까? 이것 또한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결국 해법은 하나입니다. 죄 없는 인간이 인간의 죄 값으로 죽는 것밖에 없습니다. 죄 없는 인간이 죄 있는 인간을 대신하여 죽는 것만이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입니다. 행위언약을 만족시키면서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정당한 해법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이 유일하고도 정당한 해법을 실현할만한 길은 사실상 없습니다. 죄 없는 인간이 인간의 죄 값을 치르는 것이 유일한 해법인데, 죄 없는 인간이 없으니까 그 해법을 실현할 길도 없다고 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주저앉아야 할까요?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생명이 죽음에 삼키우는 이 참담한 현실을 그저 보고 있어야만 할까요? 저들을 구원할 길이 없다고 탄식만 하고 있어야 할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든지 길을 찾아야 합니다. 온 세상을 죽음에서 건져낼 방도를 찾아야 합니다.
이것 역시도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이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셔서 인간의 죄 값을 치르는 것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고, 인간을 죽음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나님은 결국 이 길을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 스스로 참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연약한 인간의 몸속에 하늘 영광을 감추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마리아의 아들 예수입니다. 이분은 연약한 핏덩어리였지만 한 점 흠 없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다 체휼하셨지만 죄는 없으신 참 하나님이셨습니다(히4:15). 참 인간이면서 참 하나님이신 그분께서는 인간의 죄를 자기 몸에 다 짊어지셨습니다. 인간의 죄 값으로 자기 몸을 내주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인간의 죄 값을 온전히 치르셨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9:13).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다(막10:45).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는다(요6:3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14:6).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생명의 떡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의 종노릇하는 모든 인간의 죄 값을 치르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인간의 죄 값을 치르러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실 때에 “다 이루었다”라고 실로 엄청난 선언을 하실 수 있었습니다(요19:30). 바울도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딤전1:15).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다(고후5:21). 진실로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담과 맺은 약정대로 인간의 죄 값을 완전하게 치르셨습니다.
이것이 객관적으로 이루어진 구원 사건입니다. 나와 아무 상관없이 이루어진 구원 사건입니다. 사실 인간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인간이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한 것도 일체 없습니다. 오직 성삼위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죄 값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죄 값을 완전하게 치르셨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의 죄 값을 받으시고 인간의 죄를 용서하셨고,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눈을 열어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을 보고 깨닫게 하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 구원론의 독특함이 있습니다. 인간의 죄 문제를 하나님이 해결하셨고, 인간의 죽음 문제를 하나님이 해결하셨다는 것이 기독교 구원론의 핵심이자 독특함입니다.
그리고 성삼위 하나님께서 구원과 관련된 모든 일을 행하셨다는 이 독특한 사실 때문에 뒤따르는 것이 ‘믿음’과 ‘칭의’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능력으로 구원을 쟁취했다면 믿음은 필요치 않습니다. 내가 힘쓰고 애써서 구원을 쟁취했는데 왜 믿음이 필요하겠습니까? 전혀 필요치 않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행하셨다면 어떻게 될까요? 나와 아무 상관없이 하나님이 행하셨다면 그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믿지 않으면, 적어도 나에게는 하나님이 행하신 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것이 아닌 게 됩니다. 믿어야 하나님이 행하신 게 돼요.
저와 제 부모님의 관계를 생각해봅시다. 저는 제 부모님의 자식입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따지면 제가 부모님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검증하거나 확인한 적은 없습니다. 제가 부모님의 자식이 되기 위해서 노력한 적도 없습니다. 단지 부모님이 나를 낳으셨다고 말씀하니까, 그리고 그분들께서 나를 키우셨으니까 그렇게 믿은 것뿐이지 DNA 검사를 하거나, 태어날 때 나를 낳으신 분이 누군지를 눈으로 보고 확인한 객관적 사실이 아닙니다. 단지 믿은 겁니다. 단지 믿음으로써 부모님은 나의 부모님이 되셨고, 나는 부모님의 자식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똑같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 삼기 위해 해야 할 일을 다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값을 다 치르셨다고 말씀합니다. 또 성령님께서 제 안에 그것을 믿고 싶은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행하신 모든 것을 믿었고, 하나님이 내 죄를 용서하셨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믿은 게 아니라 믿어졌습니다. 왠지 믿어졌어요. 그래서 믿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행하신 객관적인 구원 사건이 나에게 주관적인 구원 사건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셨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칭의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구원 사건을 믿고 신뢰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해주시는 것이 칭의이고, 우리가 죄인이지만 예수님이 우리의 죄 값을 다 치르셨기 때문에 깨끗한 의인이라고 보는 것이 칭의인데, 만약 우리가 우리의 능력으로 구원을 쟁취했다면 칭의가 필요하겠습니까? 내가 힘쓰고 애써서 구원에 합당한 의를 쟁취했다는데 왜 칭의가 필요하겠습니까? 이미 죄를 다 벗고 의로워졌는데 왜 칭의가 필요하겠습니까? 전혀 필요치 않습니다. 칭의가 필요한 것은 우리가 실제로 의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 사건을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죄인이기 때문에 칭의가 필요한 것입니다. 실제로 죄를 용서했으니까 죄는 있지만 죄가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정말 의로워졌다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의롭다고 인정받을만한 자격이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우리는 아무런 자격이 없지만 예수님이 죄 값을 지불했으니까 죄 없는 것으로 보아준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의를 나의 의로 인정해주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의’를 가리켜 ‘하나님의 의’라고 했습니다(롬1:17, 3:5, 3:22). 그리고 이 의는 값없이 얻었다고 했습니다(롬3:24).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롬4:6). 옳습니다. 이 ‘의(義)’는 우리 안에 있는 의도 아니고, 행위로 얻은 의도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의입니다. 예수님의 의입니다. 일한 것이 없이 받은 의입니다. 우리는 이 의를 얻는데 털끝 하나라도 보탠 것이 없습니다. 0.00000001%라도 보탠 것이 없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예수님이 하신 일입니다.
창조와 똑같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만드실 때 우리가 털끝만큼이라도 보탠 것이 있습니까? 태양을 만드실 때 우리가 힘을 보탰습니까? 바다의 경계를 정하실 때 우리가 힘을 보탰습니까? 밝음과 어둠을 가르실 때 우리가 지혜를 보탰습니까? 모래 한 알, 풀 한 포기라도 우리로 인해 존재하는 것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거저 받았을 뿐입니다. 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의를 위해서 우리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
때문에 누구도 이 의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만일 자랑하는 자가 있다면, 조금이라도 우쭐해하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는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고작해야 걸레 같은 자기 의, 도덕적인 의, 종교적인 의만 알았지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의를 아는 사람은 절대 자랑할 수 없습니다. 거만할 수 없습니다. 눈곱만큼이라도 생색을 낼 수 없습니다. 오직 감사할 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찬양할 뿐입니다. 한없이 겸허할 뿐입니다.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다른 게 아닙니다. 인간의 죄 문제를 하나님이 해결하셨고, 인간의 죽음 문제를 하나님이 해결하셨다는 것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죄의 삯인 죽음으로 구원의 길을 열었다는 것이 기독교 복음의 독특함입니다. 인간의 죄 문제를 하나님이 해결하셨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인간의 자존심을 구기는 일이고, 죄의 삯인 죽음으로 죽음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이 영 말이 안 되는 것같이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죽음이 죄의 삯이기 때문에 죽음이 구원의 길이 될 수 있었습니다. 만일 죽음이 죄의 삯이 아니라면 어떻게 죽음으로 죄의 삯을 지불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죽음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전혀 불가능합니다. 죽음이 죄의 삯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으로 죄의 삯을 지불할 수 있었던 것이고, 예수님의 죽음으로 죄의 삯을 지불했기 때문에 우리가 죄에서 해방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정말입니다. 죽음이 죄의 삯이기 때문에 오히려 죽음이 구원의 길이 될 수 있었고, 죽음으로 죽음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이것이 바로 죽음과 구원의 역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죽음이 죄의 삯이라고 해서 죽음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요즘 사람들은 죽음을 멀리하고 외면할 뿐만 아니라 죽음을 볼 수 없도록 감추는데 그래서는 안 됩니다. 죽음에 눈 감으면 죽음만 보이지 않는 게 아니라 생명도 보이지 않고, 구원의 은총도 보이지 않습니다. 죽음에 눈 감으면 그저 열심히 죽음을 살다가 영원한 죽음으로 나아갈 뿐입니다. 그러지 않으려면 죽음에 눈 떠야 돼요. 죽음을 깊이 응시해야 합니다. 죽음에 눈을 떠야 생명의 신비에 눈이 뜨이고,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의 은총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립니다. 죽음 속에 생명의 진실이 숨어 있고, 죽음 속에 구원의 은총이 담겨 있습니다.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고 말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진실로 날마다 죽는 자는 날마다 생명을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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