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구원16 -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1)

새벽지기1 2015. 10. 8. 22:35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이 구원의 주체시라면 왜 누구는 구원받고 누구는 구원받지 못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를 살펴봤습니다. 특히 칼뱅과 아르미니우스가 내놓은 5가지 대답을 중심으로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저들의 논쟁을 살펴보면 그 속에는 더 근원적인 문제, 즉 하나님이 구원의 주체시라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어떻게 되는 거냐 - 인간의 자유의지는 있으나마나 한 무용지물인 거냐 아니면 모종의 역할을 하는 거냐 - 하는 문제가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5가지 쟁점이 칼뱅과 아르미니우스 사이의 핵심 쟁점인 줄 아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5가지 쟁점보다도 훨씬 중요한 핵심 쟁점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문제입니다. 칼뱅과 아르미니우스가 전혀 다른 대답을 내놓은 것도 사실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 사이의 긴장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는 이 문제를 좀 상세하게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칼뱅의 견해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칼뱅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신학의 방점을 찍었습니다. 바울이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11:36)이라고 말하여 하나님 절대주권 사상을 소리 높이 외친 것처럼, 칼뱅도 모든 것의 원인과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는 하나님 절대주권 사상을 소리 높이 외쳤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의 원인과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는 하나님 절대 주권사상은 필연적으로 예정론을 낳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 이전에 구원받을 사람과 구원받지 못할 사람을 예정하셨으며 이 예정에 따라 선택이 이루어진다는 예정론이 없으면 하나님 절대주권 사상은 유명무실한 것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칼뱅은 하나님 절대주권 사상을 고수하기 위해 예정론도 소리 높이 외쳤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칼뱅이 예정론을 그리 강조하지 않았다고 말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칼뱅이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예정)에 대해 서술하면서 서두에 “예정의 교리는 중요하므로 무례한 논의나 침묵은 불가하다”(기독교 강요 중권. 499쪽)고 밝힌 데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예정론은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상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신학의 중심이었습니다. 하나님 절대주권 사상과 예정론은 분리될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정론을 통해 하나님 절대주권 사상을 논증하고 강화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칼뱅의 하나님 절대주권 사상은 철저하게 예정론에 근거하고 있고, 칼뱅의 예정론은 철저하게 성경 말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야곱과 에서 이야기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도 전에 엄마인 리브가에게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25:23). 또 모세에게는,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신다고 말씀했습니다(출33:19). 심지어 이집트 바로 왕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했습니다(출7:3, 9:12).

예수님께서도 모든 사람이 나에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가 올 것이라고 했고(요6:37), 세상을 향해 기도하실 때에도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한 게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제한적으로 말했습니다(요17:9).

바울은 구원의 비밀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결론 맺었습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롬9:16,18).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는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엡1:3-4)고 하셨고, 곧이어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다.”(엡1:11)고 했습니다. 베드로 또한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벧전1:2).

 

이 말씀들은 하나같이 의심의 여지가 없을 만큼 확실하게 예정론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의지나 선택은 완전히 배제한 채로 오직 하나님의 뜻과 선택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 구원을 받느냐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로운 선택과 은혜에 달려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주체는 오직 하나님이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골치 아픈 것은 성경이 이것만 말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칼뱅의 예정론을 지지하는 말씀도 있지만 예정론과 어긋나는 말씀도 숱하게 많습니다.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이 구원을 좌우한다는 말씀도 있지만 인간의 선택과 행동이 구원을 좌우한다는 말씀도 숱하게 많습니다.

아담의 아들 이야기부터가 그렇습니다. 아담에게는 가인과 아벨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가인은 농사를 지었고, 아벨은 양을 쳤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은 이 일로 인해 마음이 몹시 상했습니다. 얼굴색이 확 변할 만큼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했습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6-7).

 

여러분, 여기서 예정론의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까? 만일 예정론만이 성경의 진실이라면 여기서도 에서와 야곱 때처럼 여호와께서 가인의 마음을 완악하게 했다고 말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은 미워하고 아벨은 사랑했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말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가인의 행위가 선하지 못하다고 책망하시면서 죄가 너를 집어 삼키려고 하고 있으나 너는 죄의 유혹을 다스려야 한다고 책임 있는 행동을 권고했을 뿐입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무참히 죽였을 때에도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고는, 땅이 너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라고 저주를 선포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이처럼 가인의 이야기 어디에도 하나님의 예정을 암시하는 대목이 없습니다. 가인의 자의적인 선택과 행동이 부각되어 있고, 가인의 자의적인 선택과 행동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행위가 기술되어 있을 뿐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를 봅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열심히 말씀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지고, 어떤 씨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고, 어떤 씨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고, 어떤 씨는 좋은 밭에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떨어진 곳의 상황에 따라 어떤 씨는 싹이 트지도 못했고, 어떤 씨는 싹이 나오기는 했으나 곧바로 말라 죽어버렸고, 어떤 씨는 한참 자라다가 말리 비틀어졌고, 어떤 씨는 잘 자라 풍성한 열매를 맺었습니다(마13:3-23).

이 말씀도 잘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으니까 상황이 어떻든지 간에 말씀이 열매를 맺는다고 말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상황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칼뱅이 하나님의 은혜는 불가항력적이다, 반드시 유효한 열매를 맺는다고 주장한 바에 따르면 땅의 상태가 어떠냐와 상관없이 말씀이 독자적으로 뿌리를 내리고 자라서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예수님은 그렇다고 말씀하지 않고 땅의 상태가 어떠냐에 따라, 즉 하나님 말씀에 인간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열 처녀 비유도 그렇습니다. 열 처녀가 똑같이 신랑을 기다리고 있는데, 미련한 다섯 처녀는 등만 가졌지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고,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등과 함께 기름도 준비했습니다. 그래서 밤중에 신랑이 왔을 때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처녀는 신랑을 맞이하지 못했고,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갔습니다(마25:1-13).

이 비유가 말하는 것도 다른 게 아닙니다. 처녀들이 어떤 준비를 했느냐가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못 들어가고를 결정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심판에 대한 이야기도 똑같습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심판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선택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나라에 들어간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각 사람의 행위를 따라 심판한다고 말씀했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본 자들은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지만,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않았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히지 않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않은 자들은 영원한 불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마25:31-43).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을 죽이고, 마침내 메시아까지도 죽일 예루살렘을 향해서도 심히 슬퍼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23:37). 이게 무슨 말입니까? 예루살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거부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저들을 버린 것이 아니라 저들이 예수님을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직설적인 표현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안다고 하셨고(마7:16), 바울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고 했습니다(롬2:6). 또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하지 아니하면 승리의 면류관을 얻지 못한다고도 했습니다(딤후2:5).

살펴본 것처럼 이 말씀들은 다 칼뱅의 예정론과 엇박자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이 구원을 좌우한다고 말하지 않고, 인간의 반응과 행위가 구원을 좌우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의 세계입니다. 성경은 한쪽에서는 구원이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에 달려 있다고 말하고, 다른 쪽에서는 인간의 반응과 행위에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한쪽에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예정을 말하고, 다른 쪽에서는 인간의 지유의지와 행위를 말합니다. 논리적으로 따지면 분명히 모순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논리적으로 모순된 이야기를 마구 쏟아내고 있습니다.

바로 이 대목이 성경에서 가장 골치 아픈 대목입니다. 논리적으로 도무지 양립할 수 없는 이야기, 완전히 모순되는 이야기가 성경 여기저기에 널려 있으니까 수많은 신학자와 그리스도인들이 어찌해야 할지를 몰라 골치를 썩였습니다. 성경 말씀을 정직하게 들으면 칼뱅이 주장하는 예정론을 전적으로 부정하기도 어렵고 전적으로 받아들이기도 어려우니까 어느 말씀에 장단을 맞춰야 할지를 몰라 헷갈려했습니다. 종교개혁 당시인 500여 년 전에 루터와 에라스무스가 싸운 것도 바로 이 문제였고, 칼뱅과 아르미니우스가 싸운 것도 결국 이 문제였습니다. 특히 사람은 이성적인 존재라서 논리적인 모순을 잘 견디지 못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논리적인 모순에서 벗어나려고 무진 애를 씁니다.

 

루터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절대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이었기 때문에 루터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앞세워 인간의 자유 선택이 불가하다고 역설했습니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봅시다. “하나님의 예지와 전능은 인간의 자유선택과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 하나님의 예지와 전능은 자유선택의 교리를 완전히 폐지해버린다.”(같은 책. 334쪽). 이어서 루터는 “여기서 그리스도인에게 근본적으로 필수적이고 유익한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연하게 미리 아시는 것은 하나도 없고, 자신의 영원하고 변치 않으며 한 치의 오류도 없는 의지에 따라 모든 것들을 예지하시고 목적하며 실행하신다는 점을 아는 것이다. 이 점은 바로 자유 선택을 완전히 전복시키고 산산조각 내버리는 청천벽력이다.”(루터와 에라스무스:자유의지와 구원. 169쪽)고 확실하게 못을 박았습니다. 루터는 이렇게 모순의 한 축을 폐기처분함으로써 양립할 수 없는 논리적 모순을 해결했습니다.

칼뱅도 인간의 자유선택을 그릇된 생각이라고 일축하면서 하나님의 예정을 믿는 것이 왜 중요하고 유익한지를 세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을 알기까지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시는 자비의 원천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을 결코 충분히 또 분명하게 확신하지 못한다. 둘째, 어떤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은총을 주시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거절하시는 이 대조에 의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명백하게 드러난다. 셋째, 이 교리 이외에는 우리에게 올바른 겸손을 가르치는 것이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가를 진지하게 느끼게 하는 것이 없다(기독교 강요. 중권. 500-501쪽).

칼뱅은 이렇게 하나님의 예정 교리가 매우 유익하다는 점을 내세우면서 인간의 자유 선택을 부정했습니다. 예, 옳습니다. 칼뱅이 말한 대로 하나님의 예정 교리를 믿는 것은 영적으로 많은 유익이 있습니다. 신앙적인 확신을 얻고, 신앙적인 몰입을 하고, 마음의 안정을 얻는데 많은 유익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물인 구원을 살고 은총으로 가득한 삶을 향유하는 데는 그리 유익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더욱이 어떤 사람에게는 구원을 베푸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구원을 베풀지 않는 대조에 의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명백하게 드러난다는 주장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조금만 생각해보십시오. 영원히 멸망하는 자들이 있어야만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의 크심이 증명되는 것일까요? 누군가가 멸망해야만 구원의 은총이 빛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멸망해야만 구원의 은총이 빛난다면, 이것은 너무나 잔인하고 사특한 행위입니다. 타인의 불행을 통해서 자기의 행복을 확인하는 것만큼이나 잔인하고 사특한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사특하고 잔인한 분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불행을 통해 누군가의 행복을 증명하고 그로 인해 찬양을 받는 미치광이 같은 분이 아닙니다. 때문에 저는 칼뱅의 설명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아니, 받아들일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왜곡하고 모독하는 신성모독적인 발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루터와 칼뱅은 양립 불가능한 모순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함으로써 모순을 제거하는 결단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절대로 양립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을 지키기 위해 인간의 자유 선택을 포기했습니다. 둘 사이에 끼어서 엉거주춤하는 모습을 보이면 성도들이 혼돈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 교리가 흐물흐물해질 수 있기 있기 때문에, 루터와 칼뱅은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이라는 깃발을 높이 치켜들었습니다.

 

그러나 성경 안에 있는 모순은 하나를 제거하는 것으로는 극복되지 않습니다. 성경 안에 있는 모순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만 극복됩니다. 그렇다면 모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극복하는 길은 과연 무엇일까요? 함께 그 길을 찾아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