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자 루터는 하나님의 예지와 전능하심은 인간의 자유선택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며 자유선택의 교리를 완전히 폐지해버린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양립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정말 양립할 수 없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절대주권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짓밟고 인간의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침해하는 것일까요? 이성의 논리로 보면 도무지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긴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양립해야 하고, 양립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구원은 전적인 은혜요 선물입니다. 인간이 발견하거나 성취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 받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구원에 관한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인간은 오직 구원을 받을 뿐입니다. 인간이 제 아무리 이성과 의지와 열정을 불태워도 구원을 발견할 수가 없고, 구원을 성취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이 존재하고 내가 존재하는데 내가 기여한 것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구원에도 내가 기여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루터와 칼뱅은 성경에서 이 진리를 발견했습니다. 오직 은혜로 구원받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놀라운 진리를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라는 기치를 높이 내걸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상과 예정론을 더해서 종교개혁의 신학적 틀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예정론이라는 건 결국 이런 겁니다. 여기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너는 내가 구원하기로 작정했거든? 그러니까 너는 무조건 구원받아야 해. 네가 원하든 원치 않든 구원은 따놓은 당상이야.’ 또 한 사람은 ‘너는 내가 구원하지 않기로 작정했거든? 그러니까 죽었다 깨어나도, 별별 짓을 다해도 너는 절대로 구원받지 못해.’ 이것이 예정론입니다. 이 예정론을 확장하면 하나님 절대주권 사상이 됩니다. 하나님 절대주권 사상을 구원에 한정하면 예정론이 되고, 예정론을 삶 전체로 확장하면 절대주권 사상이 됩니다. 그리고 예정론과 하나님 절대주권 사상이 결합하게 되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됩니다.
저는 바로 이것이 종교개혁 신학의 가장 큰 실수였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대립적으로 바라본 것, 양립할 수 없다고 바라본 것이야말로 가장 큰 실수였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것은 종교개혁 당시에 이미 에라스무스에 의해서 제기된 문제였습니다. 에라스무스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예정만을 강조할 때 발생하는 문제들을 나열했습니다. “당신(하나님)의 의지로 결정되는 조건하에서 왜 당신은 약속을 하는 것입니까? 내 안에 있는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당신이 마음대로 내 안에서 성취한다면, 당신은 왜 권면하십니까? 당신이 나에게 주신 것을 지키거나 당신이 나에게 주신 악한 것을 배제할 능력이 나에게 없다면, 당신은 왜 나를 비난하십니까? 모든 것이 당신에게 달려 있고 당신의 즐거움을 향하고 있다면, 당신은 왜 나에게 간구하십니까? 이루어진 모든 것이 당신의 행위였다면, 내가 비록 선을 행했더라도, 당신은 왜 나에게 복을 내리십니까? 내가 필연성에 의해 죄를 졌다면, 당신은 왜 나에게 저주를 내리십니까? 만일 당신이 명령한 것을 지킬 능력이 인간에게 전혀 없다면, 그 무수한 계명들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루터와 에라스무스:자유의지와 구원. 95쪽). 에라스무스가 제기한 문제들은 매우 재치 있을 뿐만 아니라 정곡을 찌르는 문제들입니다.
친구 목사와 이 문제로 논쟁할 때 성폭력, 세월호 참사, 당신을 태어나게 하기 위해 부모들의 만남을 하나님이 정하신 거냐, 결혼과 이혼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이것 외에도 숱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루터와 칼뱅의 신학으로는 이런 문제가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동안 이런 문제로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제가 이런 문제로 끝없이 고민을 거듭한 것은 하나님은 인간을 관리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마주해야 하는 상대로 대하신다고 하는 대전제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이 대전제는 성경이 말하는 근원 진실입니다. 성경은 철저하게 인간을 하나님의 파트너, 인격적인 파트너요 언약의 파트너로 위치지웁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을 자유, 즉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할 자유를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스스로 인간의 의지를 존중하기로, 인간의 자유의지 영역을 하나님 맘대로 침범하지 않기로 굳게 작정하신 것입니다. 이 작정은 영원히 변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인간과 만나실 때 기계적인 방식이 아니라 인격적인 방식으로 만나십니다. 하나님께서 홀로 일방적인 방식으로 행하지 않으시고 인간 안에서, 인간을 통해, 인간과 함께 행하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대등하게 대하십니다. 대상으로 다루지 않으시고 상대로 마주하십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실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실 때 물건을 다루듯이, 물건을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옮기듯이 하실까요? 물건을 집듯이 사람을 집어다가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기실까요? 그렇게 하는 것은 대단히 비인격적인 방식인데 과연 그렇게 하실까요? 저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되 인간 안에서, 인간을 통해, 인간과 함께 구원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을 대상이 아니라 상대로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한 걸음씩 구원으로 이끌어 가신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기계적인 방식으로 인간을 구원하는 게 아니라 인격적이고 유기적인 방식으로 구원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구원이 좋고 필요한 것이라 해도 강제로 구원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먼 옛날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을 수 있는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 자유를 선악과가 없는 오늘의 상황에 대입하면 구원을 거부할 수 있는 자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자유, 즉 하나님의 구원을 거부할 수 있는 자유는 오늘 우리에게도 주어져 있습니다. 먼 옛날 아담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자유를 행사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구원을 거부할 수 있는 자유를 행사할 수 있습니다. 먼 옛날 선악과를 먹을 수 있는 자유를 존중하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똑같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있는 자유, 하나님의 구원을 거부할 수 있는 자유를 존중하실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오늘도 얼마든지 구원을 거부할 수 있는 자유를 행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이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인간은 오직 구원을 받을 뿐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하나가 있습니다. 구원을 끝까지 거부할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구원을 거부하는 한 하나님은 결코 인간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온갖 방법으로 우리를 설득하시고 깨우치시고 무너뜨리시고 격려하시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끝끝내 구원을 거부하면 하나님은 결국 구원이라는 선물을 주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고집스럽게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여러분에게 임하지 않습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망극할 만큼 쉬지 않고 부어지고 있습니다. 단지 내가 끝끝내 받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내 것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구원받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가 없어서도 아니고, 하나님이 그 사람을 포기해서도 아닙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을 자유가 있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구원을 거부할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하나님의 구원을 거부할 수 있는 자유를 인정하게 되면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무너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을 거부할 수 있는 자유를 인정하면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무너진다고 생각한 것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주권을 원인론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주권을 원인론적으로 해석했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선택했으니 구원받은 것이고, 구원하지 않기로 작정했으니 구원받지 못한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원인론적으로 해석해왔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원인이 있었으니까 그에 합당한 결과가 주어진 거라고 해석해왔습니다.
성경에도 원인론적인 해석을 하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물었습니다(요9:1-3).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죽은 것이 그들의 죄 때문이냐고 물었습니다(눅13:1-5). 욥의 친구들이 재난 가운데 있는 욥에게 한 말도 원인론적 해석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대부분 모든 일을 원인론적으로 해석해왔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도 원인론적으로 해석해왔습니다. 루터나 칼뱅이 예정론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대립적으로 본 것도 모든 것을 원인론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원인론적 해석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원인론적 해석을 부정합니다.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의 해석을 비판했고, 예수님은 사람들의 질문이 틀렸다고 말씀했습니다. 사실 원인론적 해석은 하나님이 아담에게 자유를 준 것과 근본적으로 배치됩니다. 원인이 있으니 그에 따른 결과가 있는 것이라는 인과론은 인격적 존재인 인간의 삶을 설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인간은 인과론에 구속되는 시시한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인과론의 틀을 넘어서는 실로 위대한 존재입니다. 자유와 인과론은 절대 공존할 수 없습니다. 에라스무스나 아르미니우스가 루터나 칼뱅에게 문제를 제기한 것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예정론은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원인에 모든 걸 가두어버리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의지와 배치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책임이 증발해버립니다. 인간의 행위에 대해 어떤 책임도 물을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통치 또한 기계적이 됩니다. 인간의 자유가 무력화되고, 인간성이 쪼그라들고, 삶이 억압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전인수로 해석하고, 자기 행위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하게 됩니다. 문창극 장로와 같은 역사 해석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내세워 자기 선택과 행동을 정당화하게 됩니다. 복음은 본래 인간을 해방하는 것인데 복음으로 인간을 해방하기는커녕 인간을 노예화하고 사물화하는 실로 엄청난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실제로 한국교회를 비롯해서 세계의 대다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오류를 범해왔습니다. 복음으로 성도의 삶을 억압하고 성도의 인간성을 억압해왔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교회가 이런 오류를 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원인론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선택했으니 구원받은 것이고, 구원하지 않기로 작정했으니 구원받지 못한 것이라는 예정론을 삶의 전 영역에 확대 적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오류를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우선 하나님의 뜻을 원인론적으로 해석하는 해석의 틀을 버려야 합니다. 원인론적 해석의 틀로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담아낼 수 없기 때문에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버리고 새로운 해석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다음에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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