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3211

신발끈 (막 1:7)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막 1:7)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요한의 고백은 자신을 가장 낮은 곳으로 낮출 때 사용하는 그 당시의 관습적 용어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어떤 사람의 신발끈을 풀려면 본인은 일단 허리를 구푸리고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리고 시선을 신발에 두어야 합니다. 몸의 위치를 가장 낮은 곳에 두고, 시선을 아래로 깐다는 것은 극단의 겸손을 의미합니다. 요한은 자신을 그렇게 낮춘 사람이었으며, 그런 방식으로 그는 아주 특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마 톨스토이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반(半)지하에서 구둣방을 하는 할아버지가 살았습니다. 그는 창문을 통해서 그 앞으로 지나다니는 ..

능력이란 무엇인가? (막 1:7)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막 1:7) 능력이란 무엇인가? 세례 요한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해서 역사에 등장한 인물입니다. 그의 모든 가르침과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향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언급합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무력한지 잘 알고 있었으며, 또한 예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즉 자기 능력과 본질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비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좀 더 냉정하게 생각한다면 세례 요한은 능력이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허리띠 (막 1:6)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막 1:6) 허리띠 세례 요한은 옷을 간소하게 입었습니다. 허리띠를 띠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허리띠를 매는 옷을 입었습니다. 요한은 먹는 것도 생명에 지장을 받지 않을 정도로 대충 해결했습니다. 저는 요한이 광야에서 살아가는 모습에 관한 본문을 읽으면서 구약의 한 장면이 문득 생각났습니다. 그것은 이집트의 고센에 살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출애굽 전날 밤에 행했던 의식(儀式)입니다. 그들은 양을 잡아, 피는 문설주에 바르고 고기는 구워 먹었으며, 무교병과 쓴 나물을 함께 먹었습니다. 그 장면을 출 12:11절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

메뚜기 (막 1:6)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막 1:6) 메뚜기 요한의 먹을거리는 메뚜기와 석청이었습니다. 낙타털 옷을 입은 세례 요한이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십시오. 그 당시에 메뚜기는 서민들이 먹을 수 있는 일반적인 먹을거리였는지 모릅니다. 간혹 아프리카나 중국, 또는 호주 같은 지역에 메뚜기 떼가 출몰해서 피해가 심각하다는 소식을 듣습니다만 고대에서 메뚜기는 서민들이 값싸게 단백질을 얻을 수 있는 먹을거리였을 겁니다. 우리도 먹을거리가 궁했던 어린 시절에는 메뚜기를 많이 잡아먹었지요. 벼가 익을 때쯤이면 메뚜기 떼가 논에 가득합니다. 우리는 논둑을 따라 가면서 닥치는 대로 잡았습니다. 어떻게 잡느냐구요? 벼에 앉아있는 놈들을 그냥 손으로 잡습니다..

낙타털 옷 (막 1:6)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막 1:6) 낙타털 옷 마가의 설명에 따르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는 고급 모피코트를 입은 멋쟁이군요. 동물애호가들이 이 구절을 읽으면 요한이 활동하고 있는 광야로 나가서 데모를 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최초의 패션 디자이너가 누군지 아시죠? 하나님이십니다. 선악과 사건 이후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 아담과 이브에게 야훼 하나님은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창 3:21). 성서에 등장하는 최초의 옷도 역시 가죽제품이군요. 하나님이 직접 동물을 잡아서 각을 뜨셨다는 말인가요? 그리고 그건 무슨 동물의 가죽이었을까요? 성경퀴즈입니다. 세례 요한의 낙타털 옷은 멋과 부의 상징..

요단강 (2)(막 1: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막 1:5) 요단강 (2) 오늘 본문은 많은 사람들이 요한에게 와서 세례를 받았다고 설명하지만, 원래 유대인들에게는 세례가 필요 없습니다. 그들은 아이가 태어날 때 남자 아이의 경우에 할례와 정결의식만 행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에게 부분적으로 이런 세례를 행했습니다. 요한은 개종한 이방인들에게 행하던 세례를 유대인 전체를 대상으로 시행한 최초의 인물인 것 같습니다. 세례의 의미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왜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푼 것일까요? 요즘 우리가 교회에서 세례를 베풀듯이 한 접시의 물만 있어도 세례를 베풀 수 있는데 굳이 번거롭게 요단..

요단강 (1) (막 1: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막 1:5) 요단강 (1) 4절에 따르면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5절에 따르면 세례를 베푼 곳은 요단강입니다. 지리적으로 볼 때 팔레스타인의 북쪽에 위치한 갈릴리 호수에서 시작해서 남쪽의 사해에까지 흘러드는 물줄기를 요단강이라고 합니다. 저는 아직 요단강을 직접 본적은 없지만 사진을 통해서 대충 감을 잡을 수는 있습니다. 한강이나 낙동강같이 큰 강을 끼고 살아온 우리의 눈에 요단강은 약간 큰 개천 정도로 보일 것 같습니다. 그것도 군데군데는 발에 물을 묻히지 않고 그냥 걸어서 건널 수 있을 정도로 좁은 실개천으로 이어지기도 했겠지요. “온 유대 지방과 ..

회개의 세례 (막 1:4)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막 1:4) 회개의 세례 요한의 이름에는 대부분 ‘세례’가 따라다닙니다. 요한은 세례자라는 뜻입니다. 이는 흡사 예수님에게 ‘그리스도’라는 보통명사가 고유명사처럼 사용된 현상과 비슷합니다. 요한에게 세례자라는 이름이 따라붙은 가장 기초적인 이유는 요한의 주요 활동이 세례를 베풀었다는 데에 있겠지요. 예수님도 그에게 세례를 받을 정도니까 그 당시에 요한의 세례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베풀어졌는지, 그리고 그가 베푼 세례의 권위가 얼마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세례 받을 사람을 물속에 넣었다가 다시 끌어내는 이 세례 예식은 일종의 종교적 세리모니입니다. 생일 축하 세리모니도 역시 거기에 등장하는 케이크와 촛..

세례 요한 (막 1:4)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막 1:4) 세례 요한 공관복음서만이 아니라 요한복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복음서가 예수님의 공생애를 설명하기 전에 세례 요한을 다루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심지어 세례 요한의 출생설화를 예수님의 출생설화와 연결시키기까지 합니다. 요한은 이미 가임기가 끝난 엘리사벳의 몸을 통해서, 그리고 예수는 동정녀인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여섯 달 간격으로 태어났으며, 이 과정에서 양쪽 모두에게 똑같이 천사가 등장합니다. 그 뒤로도 요한과 예수의 관계는 끊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예수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지만 요한은 예수의 신발끈을 맬 자격도 없다고 자신을 낮추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제자들을 예수에게 보내서 “당신이 메시아인..

주의 ‘길’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막 1:3) 주의 ‘길’ 이사야가 말하는 주의 ‘길’은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귀환이 일어나야 할 장소입니다. 야훼 하나님은 바벨론 포로와 함께 광야에 뚫린 길을 통해서 오십니다. 이사야의 선포에 따르면 하나님의 사자는 바로 그 길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런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 마가는 이사야의 예언을 통해서 이제 세례 요한의 사명을 설명하는 중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가야할 길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실적으로 생각한다면, 야훼 하나님에게는 아무런 길이 필요 없으며, 예수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야훼 하나님은 사람이 만든 길을 초월하시며, 예수도 역시 그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