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막 1:5)
요단강 (2)
오늘 본문은 많은 사람들이 요한에게 와서 세례를 받았다고 설명하지만, 원래 유대인들에게는 세례가 필요 없습니다. 그들은 아이가 태어날 때 남자 아이의 경우에 할례와 정결의식만 행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에게 부분적으로 이런 세례를 행했습니다. 요한은 개종한 이방인들에게 행하던 세례를 유대인 전체를 대상으로 시행한 최초의 인물인 것 같습니다. 세례의 의미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왜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푼 것일까요? 요즘 우리가 교회에서 세례를 베풀듯이 한 접시의 물만 있어도 세례를 베풀 수 있는데 굳이 번거롭게 요단강까지 간다는 게 좀 비효율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세례는 지금과 같은 약식으로 베풀어지지 않았습니다. 설령 요단강까지 나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온몸을 적실 수 있을 정도의 물이 필요했습니다. 온몸을 물로 씻어야만 완전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된다고 믿었기 때문이겠지요. 지금도 침례교회를 비롯한 몇몇 교파에서는 머리에 약간의 물을 붓는 약식이 아니라 온몸을 물속에 담구는 방식으로 세례를 시행합니다. 어쨌든지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푼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이 활동하던 광야에서 가장 쉽게 물을 구할 수 있는 곳이 요단강이었다는 사실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집단적으로 몰려드는 군중들에게 세례를 베풀기에 요단강처럼 편리한 곳을 없었을 겁니다.
강(江)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의 원초적 영성이 발현되는 곳입니다. 헬라 신화에도 강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헤르만 헷세의 <싯다르타>를 보면 부처도 역시 강에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고대 인간 문명은 거의 강 유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황하, 갠지스,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나일이 그런 강들입니다. 지금도 모든 도시는 강을 끼고 있습니다. 한강의 서울, 낙동강의 대구, 라인강의 쾰른, 세느강의 파리, 테임즈강의 런던, 블타바강의 프라하 등등, 크고 작은 도시들은 거의 강을 젖줄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제가 유럽 여행 중에 느낀 점의 하나는 그들이 강과 아주 가깝게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늘 강둑을 따라 산책하고, 조깅하고, 배를 타면서 강과 더불어 호흡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강을 그만큼 친숙하게 느낀다는 말이겠지요. 인도 사람들은 아예 죽음을 강에서 맞이한다고 하지요. 이에 반해 우리의 생활은 강과 단절되어 있습니다. 요즘은 강의 둔치에 운동 시설을 마련하기도 하고, 산책로를 마련하기도 하는 것 같은데, 그래도 일반 사람들에게 강은 저 멀리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홍수를 통한 두려움이 너무 많거나, 아니면 강이라는 자연을 다스릴 수 없다는 경외심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푼 요단강은 영적인 차원에서 차안과 피안을 구분하는 경계입니다.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려면 요단강을 건너야 하듯이 우리는 현재의 삶에서 미래의 삶으로 건너기 위해서 영적인 요단강을 건너야 합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세례가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산다는 의미이듯이 영적인 요단강은 옛 삶은 죽고 전혀 새로운 삶이 살아나야 할 바로 그 공간과 시간이겠지요. 애벌레에서 나비가 되려면 허물을 벗듯이 영적인 허물벗기가 일어나야 할 바로 그곳이겠지요. 우리에게는 이런 영적인 요단강이 있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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