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말씀묵상 1604

세바의 반란이 주는 의미(삼하20:1-3) / 리민수 목사

세바의 반란이 주는 의미(삼하20:1-3) 본문은 베냐민 사람 세바가 반란을 일으키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합류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유다 지파 사람들만은 다윗을 지지, 예루살렘까지 호위하는 장면이다(2절하). 이번 세바의 반란은 압살롬이 반란이 진압된 후 다윗이 예루살렘 궁에 돌아오는 와중에 발생했다는 점에서 ‘칼이 다윗의 집에서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한 나단의 예언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준다(삼하12:10). 세바의 반란의 보다 직접적인 원인은 혈통적 우월주의에 사로잡힌 세바의 무모한 행동 탓이었다. 하지만 세바의 무모한 반란은 다윗군에 의해 결국 진압되고 만다. 하지만 이후 분열의 길을 가게 될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 내부적 틈을 벌려놨다는 매우 심각한 의미를 가진다. 다윗의 죄과에 대한 징벌..

다윗이 놓친 것(삼하19:9-15) / 리민수 목사

다윗이 놓친 것(삼하19:9-15) 본문은 먼저 이스라엘 각 지파들은 압살롬의 반역이 진압되자 다윗을 예루살렘으로 환궁시키려 논의하는 장면이다. 본문에는 다윗이 과오가 드러난다.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 사건 이후 분열되었던 민심을 잘 수습했다는 것은 매우 잘한 일이다. 하지만 압살롬군의 군장이었던 아마사를 요압 대신에 군장으로 삼으려 했던 점은 큰 과오가 아닐 수 없다. 아마도 왕권에 위협을 줄 만큼 막강한 권력을 가진 요압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결국 이러한 그의 실수는 장차 요압이 아마사를 죽이는 비극을 불러오게 된다(삼하20:9). 무릇 리더는 개인의 감정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한다.

들으면 충고! 듣지 않으면 잔소리!(삼하19:1-8) / 리민수 목사

들으면 충고! 듣지 않으면 잔소리!(삼하19:1-8)  본문은 요압이 압살롬의 죽음으로 인해 비탄에 잠겨 있는 다윗에게 국정에 소홀함이 없도록 충고하는 장면이다.  사실 압살롬의 죽음은 이스라엘 전체의 입장에서 볼 때는 반역자의 종말이었지만, 다윗 개인의 입장에서는 자기 아들을 잃은 것이었다. 더욱이 그 아들의 죽음이 자기 죄에서 기인된 것임을 깨달았기에 다윗은 더욱 슬픔을 가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윗은 지난날과 같이 압살롬의 죽음에 대해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공의를 인정하고 순복해야 함이 옳았다. 그러한 점에서 요압의 충고는 매우 시기 적절했다. 들으면 충고! 듣지 않으면 잔소리라는 말이 생각난다.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교훈(삼하18:19-33) / 리민수 목사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교훈(삼하18:19-33) 본문은 다윗이 전쟁이 승리의 보고로 인해 큰 기쁨을 얻지만, 압살롬의 죽음에 대한 보고를 받고 깊은 비탄에 빠지는 장면이다. 비록 압살롬이 자신에 대해 반인륜적인 반역 행위를 했다 할지라도 어쩔 수 없는 아들이었기에 아버지로서 아들이 죽음을 놓고 슬픔을 억제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보다 더 근본적으로 다윗이 슬픔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압살롬의 반역과 죽음이라는 비극이 자신의 범죄로 인한 대가라는 사실과, 그로 인해 운명 공동체인 이스라엘 내에 피비린내 나는 분열과 싸움이 있었다는 것에 대한 자책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윗의 자책은 곧 우리가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큰 교훈이다.

왕위를 찬탈하려는 자와 왕을 세우시는 분!(삼하18:9-18) / 리민수 목사

왕위를 찬탈하려는 자와 왕을 세우시는 분!(삼하18:9-18) 본문은 다윗에게 반역했던 압살롬의 최후다. 즉 압살롬은 전투에서 패배하여 노새를 타고 도망가다가 그가 자랑하던 머리털이 상수리 나무에 걸려 결국 요압의 손에 죽임 당한다. 신정 왕국 이스라엘의 왕 될 자에 대한 결정권은 오직 하나님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극히 인본주의적이며 탐욕적인 방법으로 왕이 되려 했던 압살롬의 반역은 하나님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반면 하나님께서는 비록 범죄하여 징계를 당하였으나 그로 인해 더욱 겸손해지고 진정한 신앙을 회복한 다윗을 다시 이스라엘의 왕으로 다시 회복해 주셨다.

바람은 하나님이 주시지만 닻을 올리는 것은 사람이다.(삼하18:1-8) / 리민수 목사

바람은 하나님이 주시지만 닻을 올리는 것은 사람이다.(삼하18:1-8) 본문은 다윗군이 압살롬군과 싸워 대승을 거두는 장면이다. 그런데 본문은 다윗 군대의 승리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즉 다윗 군대의 승리는 다윗의 뛰어난 용병술과 다윗을 중심으로 자기 생명도 아끼지 않고 싸운 군사들이 단결된 힘(3-4절)이 결합되어 얻어진 것이다(6-8절). 물론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다윗이 군대 배후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승리임에 틀림이 없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바람은 하나님이 주시지만 닻을 올리는 것은 사람이다.

뜻하지 않은 때에, 뜻하지 않은 방법으로!(삼하17:24-29) / 리민수 목사

뜻하지 않은 때에, 뜻하지 않은 방법으로!(삼하17:24-29) 본문은 다윗이 압살롬과의 결전을 앞두고 또 다시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입는 장면이다.  다윗은 후새의 지략으로 일단의 위기를 넘기기는 했지만 조만간 압살롬과의 최후의 결전을 피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다윗 일행은 그 동안의 오랜 피난길에 지쳐 있었다. 이러한 때에도 하나님은 다윗과 을 버리지 않으셨다. 즉 암몬사람 소비와 로데발 사람 마길과 길르앗 사람 바실래를 보내 다윗을 돕게 하셨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뜻하지 않은 때에, 뜻하지 않은 방법으로 자기 백성을 도우시고 곤경에서 구원하신다.

아히도벨의 죽음이 주는 의미(삼하17:15-23) / 리민수 목사

아히도벨의 죽음이 주는 의미(삼하17:15-23) 본문은 다윗이 압살롬의 추격을 피하고 위기에서 벗어나는 장면이다. 그리고 자기의 모략이 실패로 끝나게 된 사실을 안 아히도벨은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반역자의 최후를 장식한다. 아히도벨이 자살한 표면적인 이유는 단지 그이 모략이 채택되지 않은 데 대한 불만과 그로 인해 자존심이 크게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히도벨은 사태를 직관하는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하지만 압살롬을 주군으로 선택한 것은 그의 일생에 가장 큰 패착이었다. 사람은 살면서 누구를 만나느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주는 장면이다.

인간의 모략! 하나님의 모략!(삼하17:1-14) / 리민수 목사

인간의 모략! 하나님의 모략!(삼하17:1-14) 본문은 아히도벨의 전략이 후새의 모략에 눌려 실패하는 장면이다. 사실 아히도벨의 전략은 기세를 몰아 기습 공격하여 지휘부를 괴멸시키는 전략이었다.  반면 후새의 전략은 전군을 총동원해서 압살롬의 지휘아래 총공격함으로써 압살롬의 위용을 드러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전략은 다윗에게 전열을 정비하도록 시간을 벌어주는 다윗을 위한 계략이었다. 결국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모략보다, 자신의 영웅심과 명예심을 자극한 후새의 모략을 더 낫게 여기게 되었고 그 의견을 채택하므로써 스스로 몰락을 재촉하고 만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하나님의 섭리였다. 하나님의 모략을 당할 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다.

불행한 예언의 성취(삼하16:15-23) / 리민수 목사

불행한 예언의 성취(삼하16:15-23) 본문은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모략을 좇아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하는 장면이다. 참으로 압살롬의 어리석음과 추악한 모습을 보게 된다. 압살롬의 범죄는 율법이 엄히 금하는 일종의 근친상간을 저지른 것이자, 기본적 인륜에도 어긋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처럼 도덕성을 결여한 압사롬의 정권이 장차 몰락하게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이러한 압살롬의 범죄는 하나님의 예언(삼하12:11)의 성취라는 의의를 지닌다. 즉 다윗이 범죄에 대하여 이미 예고했던 징계를 내리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