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내가 만든 영혼들
우리는 자신이 손수 만든 것들에 대해서 미묘한 애착심을 갖는다. 이것은 늘 그것이 뛰어난 가치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스스로 만들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런 것이다. 초상화법을 연구하고 예술작품에서 자신을 완성하고자 정평 있는 그림들을 모방해서 그림을 그린 화가는 자신의 모방화를 높이 평가한다. 자신의 그림에는 원화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있다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손수 가꾼 화단에서 뽑은 꽃들이 원예사가 기술적으로 만든 꽃다발보다 더 홍미진진하다. 시골사람들은 자기 채소가 외국에서 수입해온 채소들과 비교해 볼 때에 좋은 품질이 되지 못한다 할지라도 자신의 정원이나 온상에서 캐낸 채소들을 더 좋아한다. 월간지나 계간지에 투고한 사람은 그 책이 발간될 때에 자신의 투고문이 그 책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인생 부분에 적용되는 사실이다. 우리 자신의 손길을 통해 생성된 것에 대한 관심도는 끝이 없다. 자기 소유의 우리에서 사육된 소가 다른 어떠한 소보다도 사랑스럽다. 우리가 직접 지은 집안에서 보다 더 행복한 것이다.
이것은 특별히 인생의 과도기에 흔히 자만을 일으키는, 자기 도취에 좀 심하게 빠져 들게 할 수도 있다. 만일 완전한 이기주의에 빠져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낸 더 훌륭한 산물들에 무관심하게 된다면 들림없이 너무나 지나친 편벽이라 간주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너무 큰 자기도취 현상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이것이 자신의 생산품에 주어지는 편애를 좌우하는 주요특성은 아닌 것이다. 이것은 다른 부모의 자녀들에게는 결코 그럴 수 없는 방식으로 자기 자녀와 놀이를 즐기고 있는 어머니의 즐거움을 고려할 때에 곧 느껴진다.
사실상, 자아 망상과 이기심은 자기 자녀에 대해 느끼는 어머니의 즐거운 심정의 극히 부수적인 일부에 불과한 것이다. 인류의 역사와 세계의 민간 전승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증거한다. 이기심의 줄과 전혀 다른 줄이 풍성한 모성애에서 음을 낸다는 것과 다른 줄에서 나는 특별한 음이 있다는 것은 그 아이를 낳은 사람은 바로 그 어머니 자신이라는 존엄한 사실을 명심할 때에 비로소 이해가 된다.
어머니는 그녀가 낳은 자녀에게서 자신의 삶의 일부를 보며, 그것을 인식한다. 자식과 어머니는 각각 별개의 사람이 아니고 어머니의 삶이 자녀에게 연장되어지는 동일한 한 몸인 것이다. 우리 자신의 모든 산물, 즉 자신의 생각, 지식, 노력, 의지, 인내심 또는 자신이 출판사에 투고한 논문, 손수 지은 집, 자신이 완성한 그림이나 수예품, 스스로 가꾼 꽃, 사육한 사냥개 또는 경주마등의 모든 것들에 이와 똑같은 특성이 나타난다. 거기에는 우리 자신이 만들지 않은 다른 어떤 것들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는, 뚜렷한 어떤 표적이 아로새겨진다.
그리고 인간의 이러한 특성에 의해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위로하신다. 그러한 특성이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에 그 형상을 닮은 우리 인간에게도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특성이 우리 인간의 유익을 위해서 거룩하신 아버지의 심정 속에서 작용한다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한 영혼이 위험에 처해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그 영혼을 스스로 만드셨다는 것을 결코 잊어버릴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내가 영원히는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장구하는 노하지 아니할 것은
나의 지은 그 영과 혼이 내 앞에서 곤비할까 함이니라'(사 5 7: 16).
어머니가 품에 안고 있는 자녀에게 정당한 이유로 잠깐 동안 심하게 꾸중할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잠시 선한 목적으로 노여움을 나타내실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혼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시 103:13).
'여인은 혹시 그 젖먹이는 자식을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완전히 부성애적인 풍성한 위로의 사상을 냐타내 준다. 그것은 단순히 아비가 사랑하고 또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것분만 아니라, 여러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란 자녀들에 대한 아버지나 어머니의 사랑의 출처와 똑같다는 사실, 즉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창조하시고 조성하셨으며 여러분속에 있는 영혼을 만드신 데 기인하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함은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인간과 연관되었다고 느끼며, 여러분 속에서 자신의 일부를 발견하시는 것이다. 여러분은 그분 자신의 산물 창조물이며 만드신 바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그분의 거룩한 관심의 대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영혼을 만드신 까닭에 거기에는 하나님 자신의 어떤 것이 있으며 거룩한 신적 표시가 여러분 위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여러분 속에는 다른 것에는 없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상 그리고 창조적인 재능의 일부가 스며들어 있다. 여러분은 여호와 자신의 예술품들 중의 하나이다. 가령 여러분이 죽어서 주님의 풍부한 소장품에 부족함이 있게 된다는 것을 잠시 상상해 보라. 여기에서 하나님과 여러분의 영혼 사이에는 속박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하늘에 있는 별인데, 영적인 아버지께서는 그것 없이는 절대로 지내실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리신 것을 찾는다. 어느 화가가 박물관에 전시하기 위해서 자신이 그린 그림들을 수집했다. 그런데 어느날 그것들 중의 한 장을 분실했다면 그는 그것을 찾아 다시 벽 제자리에 걸어놓을 때까지는 절대 안심할 수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께서는 그에게서 멀리 떠난 모든 영혼을 못잊으신다. 왜냐하면 그것은 손수 만드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잃어버린 동전, 한 마리 양, 그리고 탕자의 비유에서 그렇게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언어로 구사해 놓은 데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드신 작품을 잃어버릴 수 없으며, 그리하여 죄인들의 영혼 들을 지옥의 밥으로 내버릴 수 없다는 사상이 배어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손으로 지으신 바이며 그분께서 손수 그것들을 만드셨기 때문인 것이다.
그 안에 또한 죄의 심각성이 존재한다. 만일 조금 전에 언급된 화가가 어느 날 아침에, 밤중에 어떤 악당이 그곳에 들어와 그의 모든 작품들을 칼로 훼손시켜 놓은 것을 본다면 그 심정의 괴로움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것이다. 단지 예술적 보배들이 파괴된 것뿐만 아니라 훼손된 것들은 자신이 손수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한 영혼이 하나님을 떠나 방황할 때에도 이와 똑같은 슬픔이 그분을 괴롭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영혼이 내적으로 산산조각 나버리고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다치고 상함을 받았다.
이보다 더, 죄에 굴복함에 의해서 우리는 빈번히 자신의 영혼올 훨씬 더 파괴하고 또한 동시에 그것을 지으신 하나님께 괴로움을 끼쳐드리게 된다. 여러분의 잘못된 본보기나 의도적 유혹에 의해서 당신 자신이나 자녀들 또는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파괴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작품을 훼손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그분께서 만드신 하나님의 형상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여러분이 한 어린아이를 데리고 와서 그의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그를 때려 눕혀 생명을 앗아버리는 것과 같다. 그것은 창조물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을 무시하며 고의적으로 분노케 만드는 것이며 그분이 가장 마음을 쏟는 것에 대해서 그분으로 하여금 슬퍼하게 하는 것이다.
신앙이 확고한 사람에게 있어서, “내가 지은 영혼들’’이라는 주님의 말씀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 : 복된 위로가 믿는 여러분께 내린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영혼을 향한 분노는 영원히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둘째 : 유익한 자극은 죄로 인해서 끊임없이 영혼을 망치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영혼을 사랑하며 그것을 아껴주려는 것이다. 그것에 대항해서 죄를 짓게 함이 아니요 부패한 영향력들로부터 영혼을 보존하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영혼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그분께서 그것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고백은 그 깊이를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사상인 것이다. 그 깊이를 측정하려는 다림줄은 훨씬 더 깊숙이 내려간다. 이러한 믿음이 지닌 구원 능력과 고취시키는 능력은 오로지, 여러분이 자신 속에 있는 영혼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며,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으로서 그의 명예가 것들어 있으며 그분의 거룩한 질투심이 그 영혼을 지켜보고 계시며, 여러분이 그 영혼을 죄의 도구로 만들어 버릴 수는 없으며,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만드셨기 때문에 폭력을 가함이 없이 그 영혼과 인격적 관계를 유지하고 계선다는 사실을 늘 새로이 깨닫는섀 날로 매일 아침을 맞은 때에만 느껴진다.
참으로, 그 말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한 자녀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 외에 좀 더 주의깊게 말하자면, 죄를 짓고 있는 자녀는 하나님 아버지께 거역하는 것이며 그의 명예를 더럽히며 그분의 심정에 괴로움을 끼치는 것임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제3장
하나님께 대해 부요치 않음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물질 간의 심각한 갈등을 알고 계셨는데, 그것은 계속해서 우리들을 짓누르는 문제이다. 예수께서 사역하셨던 당시의 지역, 평범한 욕구가 쉽게 채워지는 동방 지역 사람들보다 유럽이 이러한 갈등을 훨씬 더 심각하게 느낀다고 해도 무방하다.
우리는 삶 자체가 얼마나 물질에 의해 좌우되는지를 잘 알지 못하고 있다. 부에 대한 모든 욕망을 멀리하고 검소를 사랑하라. 그러면 여러분이 경제적으로 다소 여유를 가지고 있는 경우에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자신과 가족의 단순한 생계를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해야만 할 때보다 삶의 상황이 달라진다.
출처 자기부인 / 글쓴이 /바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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