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카이퍼

제5장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 주실 때

새벽지기1 2021. 8. 8. 06:14

친밀한 생활은 오로지 한 지붕 아래에서 함께 거주하는 데서 우러나온다. 식구들이 모인 가정은 사랑의 온상이다. 그것은 아주 밀접한 교제의 줄로 둘러싸인 것이다. 성경에서 집 또는 거주는 신자와 하나님과의 교제가 일정한 형식을 취하는 수단으로 나타난다. 하나님 또한 집을 가지고 계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집에 거주한다는 개념은 하나님과의 가장 밀접하고 부드러운 교제를 나타내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풍성한 생각일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성막이 의도적으로 광야에 세워지며, 곧 시온산 위에 있는 성전에서 영구적인 것이 된다. 게다가 성경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친히 호렙 산에서 모세에게 성막의 모형을 보여 주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성막과 성전은 하늘에 있는 것의 실제적인 모형이었던 것이다.

 

이에 관련하여, 시편에는 하나님의 집에 거하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이 표현되어 있다. 시편 기자는 악인의 궁정에 거함보다 하나님 집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다고 했다(시 84:10).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 27:4). 

 

그러나 이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었다. 성막과 성전은 단지 일시적인 봉사를 나타낸 것이다. 그것들은 헌신적인 삶을 풍성하게 나타내는 임시적인 형식이었다. 예수께서 이 땅 위에 계셨을 때에 말씀하시기를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요 4:21, 23)라고 하셨다. 이것은 예배가 표상들, 상징들 또는 외적인 형상들 없이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것처럼, 영적인 것이 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 거하고자 하는 다윗의 열렬한 소원에 거룩한 공감을 느낀다면, 이 세상적인 집 심지어는 보이는 교회에 조차도 적용시켜서는 안될 것이다. 그가 말하는 여호와의 집은 신의 보호의 섭리로 되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그 성전은 더 이상 나무와 돌로 만들어진 상징적인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있는 하나님의 장엄한궁정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늘나라에 계신다. 거기에는 그분의 웅장한 성막이 있다. 거기에 그의 영광스러운 성전이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실 때 그분께서는 영혼을 세상적인 모든 것들로부터 떼어 내어 우리 심령을 높은 곳으로 끌어 올리신다. 우리가 더 이상 우리 하나님의 위엄에 관해서 세상적인 견지에서 생각하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말이다. 

 

우리의 인생 모든 날 동안 여호와의 집에서 산다는 것은 매일 아침 오후, 밤에 살아계신 하나님과 아주 밀접한 교제를 나눔으로, 우리의 생각이 그분을 향하고 우리 영혼 속에 그분께서 말씀 하시는 소리를 들으며 우리 주위에 그분의 거룩한 임재하심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 심령과 양심 위에서 역사하시는 것을 체험하며, 우리가 하나님의 면전에서 감히 할 수 없는 모든 것을 피하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는데 그것은 이미 구약 시대에 모든 진리가 잘 알려지지 않은 중에도 신자들은 더 고상한 실재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시 61:4)라고 덧붙이기 때문이다.

 
위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에 관해서 생각하는 것, 그분의 거룩한 성전에서의 삶을 그려 보는 것, 백보좌 앞에서 천사들과 성도들 사이를 활보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여호와의 집은 우리와 그분과의 교제로 둘러쌀 것이다. 더욱이 그 집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 자신을 뵙게 될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집에서 사람과 더불어 살아야하는데 그의 동반자와 사귐을 즐기는데 있어 그가 없는 집이란 무의미하며 집 안에 있는 사람이야 말로 제일 첫째로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추구하는 경우에도 그렇다. "네 마음을 높이 들라” 나는 주님과의 거룩한 밀회 장소로 내 마음을 들어 올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니다. 하나님을 발견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집안에 거해야만 한다. 하나님 집에 계신 그분께 가까이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경건한 소원과 노력의 유일한 결과이며 목적인 것이다. 이것을 열정적이고 대담한 언어로 표현하기 위해서, 다윗은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라고 부르짖었다. 여기에서 영혼은 영혼을 만난다. 여기에는 거룩한 접촉이 있으며 여기에서 사람은 우리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는 아무 것도 가로막힌 것이 없다는 것과 그분이 두 팔로 우리를 안아 주신다는 것과 그분과 연합한다는 것을 알고 체험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말을 너무나 문자적으로 다루어 하나님께서 불경건하게 묻질적인 차원에서 해석되지 않을까하는 위험이 뒤따른다. 이 말을 오해한 나머지 잘못된 신비주의가 일어났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이러한 의미를 깨닫고 조심하면 이 상상은 극도로 풍부하며 굉장히 영광스럽다. 그 말은 여러분이 하나님 자신을 소유하는 것이며 여러분이 그분과의 실질적인 교제를 나눈다는 것이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공급받으면 여러분이 순결치 못하고 거룩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과 더불어 부드러운 사검에 들어가는 것이다.

 

제5장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 주실 때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나님께서는 오랫동안 지체하시다가 우리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가? 주님께서 안 계신 곳이 없다는 말은 사실이 아닌가? 큰 소리를 내어 또박또박 기도하지 않고 조그만 소리로 속삭이고 분명치 않게 더듬더듬 드려진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는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냐님께서 처음에는 전혀 무관심하시다가 차차 우리가 그분께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어 그전에는 무시해 버렸던 기도에 응답해 주신다는 것이 과연 합당한가? 

 

의심의 여지없이 이것은 중대한 것이다. 시편 기자는 앞이 캄캄한 상태에 놓여 있다. 영혼이 슬픔에 잠겨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 교활한 적은 기도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지만 그러한 상황에서 여호와로 말미암아 용기를 얻는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계속해서 참패를 당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얼굴을 감추신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울부짖는다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하게 하소서.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시 102: 1, 2).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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