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딸아 평안히 가라 (사무엘상 1:1~1:18)

새벽지기1 2018. 2. 14. 13:08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은 언어입니다.
사람은 언어를 만들고 그 언어는 사람을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인간 이전에 ‘말씀’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샐리 크로첵은 현재 미국 증권가에서 가장 잘나가는 여성 중의 한 명입니다.
갓 마흔에 접어든 젊은 나이에,
깔끔한 외모와 빈틈없는 일 처리, 자신에 찬 표정이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진정한 트레이드 마크는 “정직”입니다.
그녀가 유명한 씨티그룹 전체를 책임지는 CFO가 된 것도
그녀의 정직함 때문입니다.
여성으로서 씨티은행장만 되어도 큰 성공인데
씨티그룹의 최고 경영자가 된 것입니다.
젊은 나이에 이렇게 대단한 성공을 이룬 그녀의 뒤엔 바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만 해도 그녀의 최대 관심사는 멋진 남학생과 데이트를 하는 것과
치어리더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주근깨투성이 얼굴에, 치아 교정기, 도수 높은 두꺼운 안경까지
끼고 있었고, 스스로도 ‘정말 축복 받지 못한 외모’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그녀에게는 지금까지도 마음이 아픈 어린 시절 기억이 몇 가지 있습니다.
어린 시절 그녀가 친구들과 발야구를 하던 어느 날,
공을 차고 1루로 달려가다가 그만 넘어져서 안경이 땅바닥에 떨어져 버렸습니다.
그녀는 땅바닥에 떨어진 안경을 찾아 더듬거리느라 게임에서 지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그 이후로
친구들로부터 가혹하리만큼 놀림을 당하고 왕따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성적도 바닥으로 곤두박질쳤습니다.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그녀에게 어머니가 다가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샐리야, 세상에는 항상 부정적인 말만 해대는 사람들이 있단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거라.”

어머니의 이 말은 그녀의 인생을 바꿔 놓았습니다.
다시 열심히 공부하여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과 콜롬비아 대학원을 졸업하고
증권업계에서 일을 시작한 샐리 크로첵은 어머니의 말을 잊지 않았습니다.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의 말을 멀리하였습니다.
그리고 절대로 부정적인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많은 이익이 생긴다고 하여도 부정직한 편법은 절대로 쓰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어려웠지만 곧 인정을 받고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였습니다.

당시 미국 금융계의 최대 그룹이었던 씨티그룹은
부정한 경영으로 그룹 전체가 나쁜 이미지로 큰 타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새 인물을 찾고 있던 씨티그룹 웨일 회장의 눈에 샐리 크로첵이 들어왔습니다.
샐리의 정직한 이미지가 실추된 그룹에 꼭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씨티그룹에 부임한 그녀는 강력한 구조조정과 그룹 안에 숨어 있던 모든 부정직한
요소들을 척결해나갔고 씨티그룹을 정상화 시켰습니다.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말라”는 어머니의 말 한마디가
평범하기 그지없던 샐리 크로첵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 놓은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바꾼 한마디의 말은 무엇입니까?

경청해야 할 수많은 말들이 오가고 수많은 경구들이 제시 됩니다.
그야말로 말의 홍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 수많은 말 가운데 단 한마디라도 심령을 꿰뚫고 마음에 새겨지면
그 사람의 인생은 달라집니다.

‘성경적’이라는 말을, 실제 삶과는 무관한 ‘신비하고 종교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오늘도 운행하고 계십니다.
그 창조와 운행은 ‘성경적’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적이라는 말은 ‘실재적’, 가장 ‘실질적’인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복음적’입니다.
‘복음, good news’이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좋은 소식’으로서, 성경적으로 실제
삶을 산 사람은 반드시 좋은 소식을 듣게 되어 있습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눅8:8)
누구보다도 말의 힘을 잘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 어떤 말씀이라도 내 심령에 떨어져 뿌리를 내린다면
그가 누구이든 풍성한 결실을 맺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백이란 숫자는 ‘풍성하고 온전하다’는 뜻입니다.

성경을 공부할 때 이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선 사무엘이 누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
다른 나라와는 전혀 다른 국가 형태를 취했습니다.
당시 모든 국가들은 왕정체제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사사(士師), judge라는 독특한 형태의 통치 체제를 시행하였습니다.

왕과 제사장과의 구별은 엄격합니다.
왕이 땅의 일을 관장한다면 제사장은 신의 영역을 다룹니다.
그런데 사사는 경우에 따라서는 정치와 종교 모두 주관하였습니다.
달리 보면, 왕보다도 더 큰 절대권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사는 왕과는 달리 그 지위를 세습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국가에 중대한 문제가 발생하면
하나님께서 사사를 선발하여 그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사사가 없는 기간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사제도는 하나님의 의도를 잘 드러냅니다.
곧 이스라엘의 진정한 통치자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종교와 정치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며, 인간은 그 누구도 절대 권력을 소유할 수도
세습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로서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을 굳건하게 세운
하나님의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사무엘은 의외로 친숙한 인물입니다.
물론 후대의 화가가 그린 그림이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이 보았습니다.
예전에는 버스 운전석에 이 그림이 많이 붙여져 있었는데,
그림 하단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오늘도 무사히’.
생각날 것입니다.
여자처럼 생겼지만 어린 사무엘의 모습으로서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찾으셨을 때
무릎을 꿇고 "제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하는 모습의 그림입니다.

사무엘은 가장 위대한 사사였습니다.
그를 위대하게 만든 것은 그의 어머니 한나였습니다.
한나가 없었다면 사무엘도 없었을 것입니다.

한나의 인생을 바꾼 한마디가 있었습니다.
“딸아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삼상1:17)
엘리 제사장이 한나에게 한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은 한나의 반응은 이랬습니다.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를 입기를 원하나이다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
수색(愁色).
근심스런 기색입니다.
얼굴이 환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나는 원래 그런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한나는 ‘울고 먹지 아니하는’ 여자였습니다.
얼굴에는 슬픈 기운이 가득하고,
우울하며 종종 굶으며 밤낮으로 징징거리는 여자였습니다.
여기에는 그만한 연유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엘가나입니다.
그에게는 아내가 둘이 있었습니다.
한나와 브닌나였습니다.
한나의 이름이 먼저 나온 것을 보면, 한나는 첫 번째 아내입니다.
엘가나가 왜 두 번째 아내를 들였는지 이유를 알 수 없으나, 한나가 아이를 낳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추정합니다.

당시 아들은 너무나 중요한 존재였습니다.
가문을 잇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낳지 못한 여인은 집안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런데 엘가나는 한나를 사랑하였습니다.
그래서 한나를 그대로 두고 다른 여자를 두 번째 아내로 들였습니다.
그 당시는 이런 일은 흔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브닌나는 아들을 낳았고, 아들을 낳은 브닌나의 기세가 등등하였습니다.

‘그를 심히 격동하더라.’
브닌나는 아들을 낳지 못하는 한나를 무시하고 약을 올렸다는 말입니다.
남편은 한나를 더 사랑하여 브닌나보다 한나에게 잘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브닌나로 하여금 한나를 더욱 격동시켰습니다.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
남편이 없을 때는 한나의 약을 더욱 올렸다는 말입니다.
한나는 브닌나를 대적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시앗을 보면 부처도 돌아앉는다고 하는데, 그 도가 한계를 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
한나에게는 엘가나의 위로도 귀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한나가 왜 울고 먹지도 않고 수심이 가득한지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니”

한나의 불임의 원인은, 다름이 아닌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왕 주실 거, 뭐 그렇게 어렵게 주시나?”
그러나 한번 깊게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가장 귀중한 생명과 시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생명과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를 되돌아보십시오.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왜 난 이 모양으로 생겼냐고 불만을 가집니다.
그래서 하찮게 여기며 내 마음대로 낭비하였고, 한 발 더 나가서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데, 하나님을 대적하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돈도 마찬가지고 권력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내 것으로 생각합니다.
쉽게 얻었기 때문입니다.
쉽게 얻으면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심지어는 내가 잘나서 얻은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애를 태우며 얻은 것은 소중하게 다룹니다.
애가 타면 탈수록 비례하여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애가 타는 상황에서 한나가 한 일은 ‘기도’였습니다.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한나 당시는 이스라엘이 존폐위기에 처해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세워진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하나님을 우상 숭배하듯 하였고, 바알과 같은 이방신들도 서슴없이 섬기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돈독이 올라있었고, 오직 부귀영화만을 위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마당에
제사장들은 복이나 빌어주는 무당으로 전락하였습니다.

어떻게 세운 이스라엘입니까?
노예로 살던 사람들을 구원하여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훈련시키고 세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불과 몇 십 년도 지나지 않아 그 모양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무너지면 하나님은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어 버립니다.
그 이스라엘을 바로 세우기 위해 하나님께서 택한 사람은 한나였습니다.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한 지도자를 낳을 책임을 한나가 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나로 하여금 그 갖은 모욕과 수치를 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울며불며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한나를 잘 선택하셨습니다.
한나는 기도하였기 때문입니다.
남편 엘가나의 지극한 사랑을 받고 있었으나 남편을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브닌나를 제거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붙잡고 늘어졌습니다.
그런 한나의 모습이 성경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며 통곡하며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 하겠나이다.”(삼상1:11-12)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않겠다는 것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나실인들이 지키는 규율 중 하나입니다.

한나의 결사적인 기도를 보고,
제사장 엘리는 그녀가 술에 취한 줄로 알 정도였습니다.

드디어 한나의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이 있습니다.
“아들을 주시면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한나와 같은 서원 기도를 많이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다가 지친다는 것이고, 받은 줄로 알고 감사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이루어지면 그 서원을 잊는다는 것입니다.

‘서원’은 히브리어로 ‘네데르’인데 그 뜻은 ‘맹세’와 ‘헌신’입니다.
즉 헌신의 맹세입니다.
이것이 서원의 가장 기본적인 뜻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이렇게 해주시면 저는 저렇게 하겠습니다.’는 식으로 ‘하나님과의
흥정’처럼 그 뜻이 변질되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대화를 통해 서로 소통합니다.
그 소통을 통해 서로 변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변하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내가 변해야 합니다.
변하되 하나님에 대한 헌신의 방향으로 변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봅니다.
서원기도를 하였으나 응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실망하고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들도 생깁니다.
그러나 서원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먼저 나를 받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하나님께 드리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내가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그 성장을 통하여 전혀 예상치 못한 일들이 생깁니다.
그리고 되돌아봅니다.
내가 원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열매를 맺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위기입니다.
그 위기를 타파할 인물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한나를 택하여 그 인물을 잉태케 할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보통 엄마로는 안 됩니다.
그 인물을 키울 엄마가 먼저 철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마음에 새기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무엘만이 하나님의 점지를 받아 특별히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특별히 태어났습니다.
다만 키우는 부모의 대부분이 ‘자신만 아는’ 보통 아이로 키운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는
내 소원의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내 삶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리라는 다짐은 내 삶을 변화시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리라는 것과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분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나의 소원을 미루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물러나심’입니다.

한나로부터 배울 것이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역대 제사장 중 가장 무능합니다.
그러나 그의 입을 통하여 임한 하나님의 약속을 한나는 굳게 믿었고, 다시는 그녀의
얼굴에 수색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징징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물러나심을 통해, 한나는 하나님의 부재가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임재를
확신하였습니다.

잊지 마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제힘으로 서기를 기다리십니다.
내 의지와 힘으로 견뎌내게 하시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붙들고 있던 우리의 손을 놓아야 합니다.
우리가 넘어졌을 때
어떻게 해서라도 걸어보겠다고 일어설 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조지 맥도날드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쁨을 누리고 선한 일을 생각하며 순전한 사랑으로
그분의 뜻을 따르기를 원하시지만,
이를 위하여 자판기처럼 성령의 은사를 제공하지는 않으신다.”

자발적으로 진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리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하리라
다짐할 때부터 하나님 자녀로서의 참 삶이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마13:8)

오늘도 설교를 통해 매스컴을 통해 수없는 말씀이 떨어집니다.
당신의 마음을 움직이는 한 마디 말씀이 무엇입니까?
왜 그 말씀이 내게 특별히 들리는 것일까요?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의 모든 부족함과 나의 나갈 길과 나를 통하여 이루시길 원하는 하나님의
뜻이며 사명입니다.

누구나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누구나 간절한 것이 있습니다.
부족한 것, 간절한 것이 많을수록 나는 갈급합니다.
이러한 영적 건조기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 기도를 통해 어떤 건조한 땅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는
생명의 씨앗을 주십니다.
이 씨앗은 내 영혼이 갈급할수록 잘 자라납니다.

그 말씀에 목숨을 거십시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반드시 백 배의 결실을 맺게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