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오직 주님을 위하여(2) (로마서 16:12-20)

새벽지기1 2018. 2. 9. 07:56


“50세부터인가 끔찍한 상실감과 외로움, 깜깜한 어두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영적 어둠이 너무 심하다 보니 마음으로나 생각으로나 아무 것도 볼 수 없습니다.
제 속에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바라고 또 바라지만 그분은 나를 원치 않으신다는 강한 느낌이 듭니다.
천국이니 영혼이니 하는 단어들이 제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제 삶은 모순투성이인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돕고 있지만 도대체 저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이 글을 누가 썼을까요?
놀랍게도 20세기의 성녀로 일컫는 마더 테레사의 편지 내용 중 일부입니다.

과연 하나님은 존재하실까?
때로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의심과 고민이 찾아옵니다.
존재하신다 하여도 나와는 상관없는 분처럼 너무나 멀게 느껴집니다.
신학자 로버트 웬버그는 이런 시기를 ‘영혼의 밤’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영혼의 밤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고 하나님께서 각별하게 사용하시는 사람들도 길고 어두운
영혼의 밤을 보냅니다.

마더 테레사는 영혼의 밤을 어떻게 극복하였을까요?
기도?
묵상?
금식?
그녀는 누구보다도 그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나 어두움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녀가 한 일은 예전처럼 인도 고아들을 먹이고 입히는 일이었습니다.
기쁨과 보람이 없으므로 그 일은 더 많은 노력과 인내를 요구했지만

참으며 견디며 묵묵히 해냈습니다.
아픈 채로, 슬픈 채로.

마더 테레사가 영혼의 밤을 벗어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을까요?
일주일?
한 달?
일 년?

마더 테레사는 자신의 멘토인 노이너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에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이제 저는 어둠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실로 11년 만입니다.
지금은 그 어둠이 제 일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겪으셨던 어둠과 고통의 작은 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오늘 저는 진정한 기쁨을 느꼈습니다.
이제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더 예수님께 복종하고 그분의 뜻을 따를 것입니다.”

마더 테레사는 자신의 영적 어둠을
자신이 섬기는 인도 어린이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과 동일시하게 되었습니다.
거절당하고 버림을 받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 없이 살아가는 그들의 고통을
영적 어둠을 통해 신비롭게 체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언제나 생생하게 느끼며 사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라고 해서 늘 기쁨과 행복만을 느끼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또한 그런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일종의 자기 최면인 경우도 종종 있고,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도 영혼의 밤은 찾아옵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장 위대한 때는, 절망 가운데서도 어디에서도 하나님의 흔적을 찾을 수
없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왜 자신을 외면하시는 지 자문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입니다.

사도 바울이 천거한 사람들 역시 신앙의 숱한 고비들을 넘긴 사람들입니다.
어떤 핍박과 고난이 와도 때로는 하나님의 외면과 침묵조차도 감수하며, 어떤 보상도
대가도 바라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묵묵히 수행한
사람들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그런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버시에게는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이라는 최상의 형용구를
붙여주었습니다.

‘버시’는 ‘페르시아 여인’이라는 뜻입니다.
요즈음도 그렇지만 출신 지역을 따서 이름을 짓곤 하였습니다.
‘마산댁’ ‘광주댁’하는 것처럼.
그녀에게는 그냥 ‘나의 사랑하는’이라고 말 대신 ‘사랑하는’이라고 하였는데,
아마도 그녀는 독신녀로서 전 교우들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드루배나와 드루보사는 현재 시제를 사용한 반면, 버시는 과거 시제를 사용하였는데,
외국 출신의 독신녀로서 버시는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열심히 봉사하였고, 이제는
나이가 들어 활동을 멈췄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사도 바울과 성도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버시와 같은 모습이 모든 성도들이 추구해야 하는 로망입니다.
그저 옆에만 있어도 마음이 든든하고 흐뭇해지는 아름다운 노인들이 되기로 합시다.

요즈음 우리나라에도 수많은 외국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차별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식당에서 일하는 중국 동포 아주머니들이나 탈북 동포들, 필리핀 댁, 태국 댁,
베트남 댁, 외국인 노동자 등등 그들을 차별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차별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들을 잘 대하는 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이 일을 가장 잘 수행한 사람들이 통일교도들입니다.
인간 문선명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이들은 인종 차별을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문선명이 정해준대로 결혼을 합니다.
홍천 물걸리에 가면 그곳 농부와 결혼한 일본 여인이 있습니다.
일본 인텔리 여성이 문선명이 정해준대로 그 오지로 시집을 왔습니다.
무식한 남편과 시댁 식구들을 지성껏 모시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 마을 누구보다 잘 삽니다.
그 남편은 치아가 다 삭았는데, 자신을 존대하고 열심히 살아주는 일본 아내가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해서 콜라를 대신 마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우리들은 그들보다 더 잘해야 합니다.

이제 가장 중요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
사도 바울은 놀랍게도 루포의 어머니를 ‘자기 어머니’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들이 누구이기에 사도 바울이 자기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일까요?

이들이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저 멀리 ‘비아돌로로사’로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슬픔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채찍을 서른아홉 대를 맞으시고 살갗이 뜯기고 뼈가 드러난 몸으로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 언덕을 향해 가셨습니다.
얼마나 가셨을까요.
기진하신 예수님은 그만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무거운 십자가가 예수님의 몸을 짓눌렀습니다.
더는 가실 수가 없었습니다.
채찍질 해대던 로마 병사가 수많은 구경꾼들 중에 한 사람을 끌고 와 십자가를 지게
하였습니다.

마가복음은 당시를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막 15:21)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졌던 사람이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이 짧은 구절에는 길고도 아름다운 영혼의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구레네는 아프리카 북쪽에 위치한 오늘날의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를 말합니다.
예루살렘까지
육로로는 2,000킬로 이상, 바닷길로도 1,000킬로 이상 떨어진 머나먼 곳입니다.
그 먼 곳에서 예루살렘까지 오게 된 이유는
시몬이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 평생에 한 번은 유월절에 하나님의 성전에 와야 한다는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옛날 그 머나먼 길을 가기 위해서는 평생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서 천신만고 끝에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그런데 꿈에 그리던 하나님의 도성에 왔다가 봉변을 당한 것입니다.

십자가는 저주 자체입니다.
로마 병사가 그것을 지라고 했을 때 시몬의 마음은 얼어붙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참배하러 그 먼 길을 왔는데, 이 무슨 변고인가!
하나님! 제게 왜 이러십니까?’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서슬 퍼런 로마 군인들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는 법.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십자가를 졌습니다.
마음은 이미 무너졌습니다.
내게 저주의 십자가를 지게 하시다니, 하나님은 정말 살아 계신 걸까?
신앙마저 흔들렸을 것입니다.
그렇게 정신을 놓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데 이상한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슬퍼하고, 또 수많은 사람들이 야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죄인이 행하는 일거수일투족을 보았습니다.
다른 죄인들과는 달랐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이러는 것일까?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었고,
또 후에 예수님을 알아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 이런 분이셨구나.”
그런데 며칠 후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분이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그 소문의 진위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믿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꺼이 초대교회 일원이 되었습니다.
만약 그가 재수 없어 하며 집으로 돌아갔다면 그의 이름은 성경에 남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고향으로 돌아간 시몬은 온 가족에게 예수님이 그리스도이며 구원자임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온 가족은 가장 충성스러운 교회 일꾼이 되어 사도 바울까지 힘써 도왔습니다.
사도 바울을 도왔다는 것은 트리폴리를 떠나 아예 이스라엘로 이주하였고, 사도 바울과
동행하며 그의 선교 사역을 도왔습니다.
바로 시몬의 아들이 루포이며, 시몬의 아내가 사도 바울이 어머니라 부르는 그 여인입니다.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훗날 구레네까지 기독교 도시, 축복 받은 도시로 변했습니다.
지금은 회교도들의 도시, 한때 독재자 카다피의 도시였지만,
당시 구레네는 북아프리카의 기독교 중심지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 유명한 어거스틴이 바로 북아프리카 출신입니다.

시몬과 그의 가족들의 놀라운 변화는 어떻게 이루어진 것입니까?
시몬은 예수님께 반응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십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 중 어떤 이들은 십자가 처형은 늘 봐오던 거라 그러려니 합니다.
어떤 이들은 안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또 마음 아파합니다.
어떤 이들은 기득권에 코를 박고 있는 종교 지도자들이나 압제자들에게 이를 갈며,
이들을 반드시 무너뜨리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은, 아무리 비장해도, 그저 내 생각 내 감정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몬은 그가 누구이며, 왜 그런 고난을 받아야 하는가 알아봅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알게 됩니다.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을 듣습니다.
그 가르침과 자신의 생각이 충돌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그분의 가르침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따라갑니다.
고난과 어려움이 생깁니다.
그러나 그분의 가르침으로 이겨냅니다.
점점 그분께 가까워지고 그분과 하나가 되어 갑니다.

예수님께, 예수님을 향하여 반응한 사람 시몬을
성경은 “주 안에서 택함을 입은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주 안에서 택함을 입은” 이것은 우리들이 구해야 하는 최고의 형용사입니다.

왜 주 안에서 택함을 받아야 하는지 올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궁극적 관심은 무엇입니까?

궁극적 관심이란, 내게 가장 관심이 있는 것으로 내게 삶의 의미를 부여해 주며,
그것을 위해서는 어떤 것도 희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돈이 나의 궁극적 관심이라면, 돈이 내 삶의 의미를 부여해 주며 돈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사랑, 의리, 덕성, 인격이라도 버립니다.

내 궁극적 관심이 곧 내 믿음이며 내 우상입니다.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행복을 얻겠다고 달려든다고 해도 쉽게 얻을 수 없으며,
또한 얻었다고 해도 너무나 많은 다른 것을 잃습니다.
또한 손에 쥔 그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틸리히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앉은 그 모든 것이 우상이다.
우상은 반드시 악마적인 힘으로 그 우상 숭배자를 파괴해 버린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목사들에게 가장 큰 우상은 목회 성공입니다.
목회 성공도 어렵지만, 바로 목회 성공으로 인하여 마침내는 그 목사는 파괴됩니다.
기복신앙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목적이 아니라 현세적인 복입니다.
그래서 기복 신앙자들은 외형적으로는 가장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지만

바로 그 생각으로 인하여 마침내 파괴됩니다.
율법을 열심히 지켜 하나님의 복을 구한 바리새인들이 “너희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른 이들의 길도 막고 있다.”는 예수님의 질타를 들었던 이유입니다.

하나님과 교회를 위하라고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과 충성이 필요 없는 자존자이십니다.
교회를 위하라고요?
영원한 생명의 예수님 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스스로 생겨나고 자라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부패할 때 그 촛대를 옮기시지만, 교회는 세상 끝 날까지 존재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5:44)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요5:41)

주안에서 택함을 받으라는 것은,

나의 궁극적 관심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되라는 것입니다.

11년 동안 그 어두운 영혼의 밤을 보낸 마더 테레사가 얻은 것은 명예가 아닙니다.
사랑의 선교회의 폭발적 성장이 아닙니다.
노벨 평화상이 아닙니다.
그분의 슬픔이 곧 고아들의 고통이라는 사실을 통해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었고,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고, 점점 예수님을 닮아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이면 언제 어디서나 생명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그분의 생명은 곧 사랑입니다.
그 사랑으로 우주만물과 특히 우리 사람들을 창조하시고 그 사랑으로 운행하십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이 떨어지는 곳에서 최고의 생명이 피어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살아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우연이라도 상관없습니다.
그 생명의 피를 받은 사람은 살아납니다.

좀 아프면 어떻습니까?
좀 힘들면 어떻습니까?
설사 죽으면 또 어떻습니까?

그 사랑으로 맡은 일을 행하노라면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의 자리에 생명의 뿌리가 내려지고 싹이 나며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복의 근원이 됩니다.
그 복을 누리시고 베푸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