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모든 권위에 굴복하라고요? (로마서 13:1-7)

새벽지기1 2018. 2. 1. 07:10


2차 세계대전 당시
디트리히 본 회퍼 목사는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가 사형을 당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독재정권에 저항하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요즈음도 

회사의 부당한 해고에 저항하다가 죽거나 다치거나 감옥에 가기도 합니다.

불의한 정권, 하나님의 종이라며 전횡을 일삼는 목회자, 비인격적인 선생,
불의를 저지르는 사장이나 직장상사 등등, 권세를 가진 사람들에 의한 참기
어려운 폭거가 도처에서 자행됩니다.
이에 대해 과연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는, 먹고 사는 문제를 넘어, 생사와도
관계된 심각한 질문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해 놀랍게도 사도 바울은 이렇게 답합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롬13:1)

참으로 어안이 벙벙해지는 답입니다.

일단 마음을 가라앉히고,
사도 바울은 왜 이렇게 말했는지 그 이유를 알아보기 전에
‘20세기 경영학 멘토’로 칭송받는 피터 드러커의 말을 먼저 들어 봅시다.

“미래를 읽는 힘”이라는 책에서, 그는 “상사를 과소평가하지 말라.”면서
상사를 다루는 방법 네 가지를 제시합니다.

첫째, 상사도 당신처럼 평범한 인간임을 늘 명심하라.

둘째, 상사를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사람으로 생각하지 말라.
오히려 상사는 부하의 생각과 의도와 상태를 파악하기를 원하며, 먼저 자신의
생각과 의도에 대해 상사에게 말하지 않으면 오해를 사거나 오류를 범하거나
심지어는 치명상을 입을 수 있음을 명심하라.

셋째, 모든 사람들의 머릿속이 스스로의 일로 가득하듯이, 상사는 자신의 맡은
일로 더 여유가 없다.

넷째, 상사를 과소평가해서는 절대 안 된다.
과대평가의 결과는 실망으로 그치지만, 과소평가의 결과는 참담할 수 있다.

여기에 피터는 “상사를 변화시키려 해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상사를 변화시키는 데 성공한 비서는 하나도 없다.”는 말을 덧붙입니다.

이 네 가지를 전제로, 언제 그 상사를 떠날 것인가에 대해서도 세 가지를
조언합니다.

첫째, 상사가 부패한 경우 거기에 나도 익숙해져서는 절대로 안 된다.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될 것이라는 판단이 서면 떠나야 한다.

둘째, 상사가 무능한 경우에도 버려야 한다.
그러나 상사를 과소평가하여 무능한 것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셋째, 유능한 상사도 때를 봐서 떠나야 하는데, 이때 신중을 기해야 한다.
상사가 너무 유능하여 자신의 입지가 없다는 사실을 상사에게 반드시 알리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정말 유능한 상사라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그 사람에게 여러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도 그는 한 마디를 덧붙입니다.
“그러나 중년이 넘으면 함부로 떠나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도 없이 상사에게 아부하거나 부하에게 인기전술을 써서도 안 됩니다.
상사나 부하나 모두 상호 ‘신뢰’를 쌓아야 하며, 신뢰의 최종 병기는 ‘진실’입니다.

피터 드러커의 상사 대처 요령은 불의한 권위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나름의 지혜롭고 구체적인 답이 될 수 있습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롬 13:1)고 사도 바울이 말하는지
그 의미를 알아봅시다.

먼저 ‘굴복하라’는 말의 뜻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굴복하라’에 해당되는 ‘휫포탓세스도’는 군사 용어로,
지휘관의 명령에 병사들이 복종하는 자세나, 전쟁에서 패한 군사들이 승리자에게
취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이 말에는 긍정적인 의미는 별로 없습니다.
자진해서 따른다는 ‘순종’과는 달리, 달리 방법이 없으니까 인정한다는 뜻이 강합니다.

먼저 우리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는지 살펴봅시다.
당시 온 세상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많은 유대교 지도자들은 특권을
누리며 불의와 횡포를 저질렀습니다.
이에 맞서
가롯 유다와 같은 열혈당원은 무력으로 로마를 전복시키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칼로 대적하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시면서, 그 모든 불의한
폭력들을 묵묵히 몸으로 받아내셨고, 끝내는 십자가에 처형되셨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마22:21)
하시면서 로마의 존재와 세금 징수를 인정하셨습니다.
또한 헤롯왕을 ‘여우’라 하였고,
당시 종교 지도자들을 ‘독사의 자식’, ‘회칠한 무덤’, ‘위선자’라고 신랄하게 비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당시 예수님은 일개 목수로 가난한 하층민이셨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다음 말을 들으면 예수님의 행동도 의문이 생깁니다.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이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롬 13:1-2)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명을 거스른 것이네요.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네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로마나 종교 지도자들의 지위와 권세를 인정하셨고,
그래서 묵묵히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심판은,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그들의 심판입니다.
권세를 비판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요즈음 말로 “쫄지 않아도” 됩니다.
권위를 인정하는 것과 권위를 비판하는 것은 별개의 사안입니다.

가장 깊은 본질로 들어갑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의 운행을 경영하십니다.
악한 나라는 역사 이래로 언제나 존재해 왔습니다.
악한 사람이나 악한 나라를 왜 내버려 두시는가 하시겠지만
악할 때마다 징벌하셨다면 인간은 이미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집트, 아람, 블레셋,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로마 등의
이방 나라들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훈련시키시고, 징계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사용하신 후 해체시킵니다.
그래서 영원한 제국은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개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니엘과 그 친구들을 바벨론 정부에서 고위직을 수행하게 하시고,

또 예레미야를 통해서 포로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적국 바벨론이
흥하도록 힘쓰라고도 하셨습니다.
이어서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페르시아 고레스 황제를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바벨론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고레스에게 “여호와의 종”이라는 칭호를 붙여줍니다.

그렇다고 언제나 반드시 지배자들을 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일제 앞잡이 노릇을 한 이완용 일당과 같은 행위들이 정당화되는 것도 아닙니다.
상황마다 다릅니다.
이방 나라에서 활동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챙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어떤 불이익도 감수한 진정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가 전 세계를 정복하고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는
PAX ROMANA를 이룩하였습니다.
이들은 정복한 나라의 종교를 인정해 주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로마가 열어놓은 길을 따라 세상 어디나
자유로이 여행하며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는, 비록 이스라엘이 로마 식민지였지만, 기독교가 전 세계로 전파될 수
있었던 최적의 시기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스라엘을 최고 강대국으로 만들어서
하나님을 전 세계에 알리도록 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왜곡된 선민의식과 과도한 기복신앙으로 변질된 이스라엘은
식민 통치 아래서도 오만했는데, 강대국이었다면 하나님을 제대로 알릴 수가 없었습니다.
요즈음을 생각해보면 쉽게 납득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끊임없이 낮추시며 바로 잡으시며 하나님을
올바로 전하게 하심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도 바울의 당시 멘탈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음의 질문에 답을 해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권세자라고 생각하고 있을까요?
아닙니다.
추호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물론, 바울이나 다른 제자들도 자신이 권세를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권세 아래, 특히 로마 권력의 한가운데 살고 있는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는 당부입니다.
당시는 로마 황제의 절대 권력 아래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그런 권세 밑에서 믿음을 잘 지키며 살아가는 길을 제시한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읽은 구절을 권세자들의 자기 옹호나 합리화를 위해서 악용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이것이 가장 바탕이 되는 바울의 정서입니다.

또한 바울은 정치적이지도 않았습니다.

톰 라이트는 그의 책 “바울”에서 귀담아 들어야 할 말을 합니다.
“현대인들은 정치적 선택이라는 고정된 틀 안에서 자라났다.
좌로 갈수록 정부와 권력 구조에 반대하고 우로 갈수록 안정된 정부와 권력
구조를 지지하는 좌-우 스펙트럼에 갇혀 있다.
그러나 바울은 좌-우 스펙트럼에 갇혀 있지 않고 초월해 있었다.”

사도 바울도 당연히 예수님과 같은 태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정치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또한 로마는 당시 그 어느 나라보다도 합리적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도 바울이 친로마적이지 않았습니다.
그저 로마의 정치와 제도와 시설과 시민권을 이용하여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데 집중하였습니다.

흔히 기독교를 우파, 보수파로 분류합니다.
진보진영에서 반미데모를 하면, 많은 기독교 단체들이 모여 친미데모를 합니다.
기독교를 전해준 미국을 지지해야 정통 기독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생각입니다.
올바른 신앙인은 좌도 우도 아닙니다.
친미도 반미도 아닙니다.
목사 무조건 지지파도 목사 반대파도 아닙니다.
자신이 지지하는 이념이나 사람을 추종하지도 않습니다.
더군다나 맹종이나 목숨을 거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오직 세상의 창조자이자 통치자이자 심판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믿고, 그분의 뜻을 헤아리며 어떤 어려움도 감수하며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분의 뜻에 어긋나면 목숨 걸고 반대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했던 디트리히 본 회퍼 목사는 정당한 일을 한 것입니다.
본 회퍼 목사는 증오심으로 그 일을 수행한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승승장구하는 히틀러에 열광하며 맹종하는 독일 국민과 교회에 경종을 울린
“나를 따르라”는 책은, 20세기 판 “그리스도를 본받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책에서 증오와 분노는 찾을 수 없습니다.
감옥에서도
본 회퍼 목사는 따뜻한 섬김의 자세로 살다가 39세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증오심과 분노는 자신을 가장 먼저 파멸시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엊그제 기독교 방송 PD들과 저녁 식사를 하며 들은 이야기입니다.
요즈음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목사들에 대한 전화를 많이 받는데,
“목사는 하나님이 세우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지, 사람들이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비판을 방송에서 하지 말라.”는 옹호의 내용이 굉장히 많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 목사 추종자들입니다.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그 존재와 권위를 인정하라는 것은 맹종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이 있으면 얼마든지 지적하거나 비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세운 사람에게 저항했다고 보복하는 조폭 두목이 아닙니다.

예언자 이사야가 외칩니다.
“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의 의뢰하며 의지하는 것을 제하여 버리시되,

곧 의뢰하는 양식과 그 의뢰하는 모든 물과 용사와 전사와
재판관과 선지자와 장로와 귀인과 모사와 공교한 장인을 그리 하실 것이라.”
(사 3:1-3)

하나님 외에 내가 의지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제하십니다.
거짓 선지자나 거짓 위정자만 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선지자, 올바른 위정자라도 내가 맹종한다면 그를 제하여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를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고, 바울이나 베드로가 로마
교회를 세우지 못하게 하셨고, 그들을 일찍이 데려가셨습니다.
모두 맹종에 대한 방지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를 믿는다고 해서, 절대로 옳으며 절대 신뢰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어리석은 인간은 종교, 정치, 문화 등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끝없는
맹종의 우를 범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목사는 ‘먹사’가 되고 평신도는 ‘병신도’가 됩니다.
마음에 새기십시오.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맹종하여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그(관원)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롬 13:1)
이 말은 권세를 가진 자의 책임을 의미합니다.
정부 관리조차 하나님의 사자로서 선을 이루는 자라면,
목회자는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로마서 12장에서 15장까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치는 구체적인 사항들입니다.
이 모든 사항들은,
첫째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분별하고 나를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며,
둘째 선으로 악을 이기며,
셋째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지지 말라는 원칙에 포함됩니다.
각론들을 대원칙으로 생각하여 갇히지 마십시오.
즉 하나님께서 세우셨다고 벌벌 떨지 마십시오.

영원한 권세자는 없습니다.
언제나 겸손하십시오.
눈치 보지 말고 맡은 일을 주님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하듯 열심히 하십시오.
두려워할 자를 지혜롭게 다루며 존경할 자로부터 많이 배우십시오.
그리하여 이 험한 세상에서 존경받는 하나님의 리더로 성장하여 신나게 베풀며
풍성히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