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하나님의 그 깊은 마음 (로마서 11:25~36)

새벽지기1 2018. 1. 23. 07:41


1550년 8월, ‘동양의 사도’라 불리는 프란치스코 자비에르가 일본 히라도에 처음 발을 들여
놓으면서 일본 열도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었고, 그 후 40여 년이 지난 1597년,
기독교의 급속한 확산에 위협을 느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선교사 추방령이 내려지면서
기독교인에 대한 무시무시한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1597년 1월 1일을 기해 체포된 사람들은
파우치스타 선교사와 파우로 미키 선교사를 포함하여 모두 24명이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14세의 토마스 고자키, 13세 안토니오, 12세의 루도비코 이바라키 등 3명의
소년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백성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이들의 왼쪽 귀를 베고 동네마다 돌아다니도록 하였습니다.
쿄토, 오오사카, 사카이 등의 거리로 끌려 다닌 이들은, 나가사키에서 십자가 처형을 하라는
도요토미의 명령에 따라, 나가사키를 향한 죽음의 행진이 시작되었습니다.
추운 겨울, 맨발로 2,500리, 1,000킬로미터의 길을 한 달 동안 걸어가야 했습니다.

이들을 인계받은 나가사키 관리들은
가장 나이 어린 루도비코 이바라키를 불러 기독교를 버리면 살려주겠다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린 이바라키는
“잠시뿐인 인생과 영원한 생명을 바꾸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라고 답하며, 오히려
“내 십자가는 어떤 거예요?”라고 묻고는 십자가 처형을 달게 받았습니다.

나가사키에는 이들의 순교를 기리는 기념 공원과 기독교 박해 박물관이 있습니다.
그 박물관에는 토마스가 어머니에게 쓴 편지가 있었는데,
한글로 번역된 그 편지의 내용 중에 마음을 찌르는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그 무엇이든 견디고 이겨내십시오. 사랑하는 어머니, 나중에
천국에서 뵙겠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동안 믿을 수 없는 기막힌 일이 일어납니다.
그들을 호송하던 페트로 스케지로와 목수였던 프란치스코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24명과
함께 십자가 처형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24명의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천한 자리에 있었습니다.
어떤 모욕을 해도, 심지어는 죽여도 상관없는 미물 중의 미물들입니다.
반면 이들을 호송하는 사람들은 신과 같은 절대권자입니다.
이것은 죽음의 수용소에 갇힌 유대인과 독일 병사의 관계이며, 바퀴벌레와 인간의 유비입니다.
그런 그들이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기꺼이 십자가 처형을 받는 것은, 독일 병사가 기꺼이
유대인이 되는 것이고 인간이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바퀴벌레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24명의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무엇을 보았기에,
모진 고통을 감내하고 목숨을 버리면서도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있기를 열망하였을까요?

지난 나가사키 순례 여행은, 오늘날 기독교가 가진 설득력이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
제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운 삶을 살았는지 통감하는 여행이었습니다.

왜 그들은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받아들인 것일까요?

일본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것은 평등사상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랬습니다.
당시 평등사상은 그 누구도 생각해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것으로, 차별은 공기만큼이나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은 차별 없이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놀라운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매료되었고, 복음 속으로 점차 빠져들면서 예수님의 행적을 통해
그분이 구원자임을 믿게 되었고, 그분의 약속인 구원과 영생을 믿게 된 것입니다.

간디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읽고 예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되고, 그분의 가르침대로 살게 되어,
그리하여 심약하고 약삭빠른 이기주의자 간디는 조국 인도를 대영제국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마하트마, ‘위대한 영혼’이 됩니다.

성경에서 해, 달, 별이 떨어졌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마24:19)라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천국에 못 들어가는 부자는 어떤 부자입니까?
예수님이 재림 때 타고 오시는 구름은 무엇입니까?
주의 재림 때 천사장의 나팔이 몇 개인지 아십니까?
어린 양의 피에 옷을 씻으면 무슨 색의 옷이 됩니까?
종말 때에 특별히 조심해야 할 짐승은 무엇입니까?
일반 성령과 진리의 성령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위의 질문에서 여러분들은 몇 가지나 대답할 수 있습니까?
별로 없을 것입니다.

엉터리 질문까지 포함된 이 질문들은 요즈음 극성을 부리고 있는 신천지가 기성 교회의
교인들에게 하는 질문들입니다.
구원을 받기 위한 대단히 중요한 질문인 양 들이밀며 당황해 하는 사람들을 자신들의 성경
공부에 끌어들여 옭아매 버립니다.

예수님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가르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성경을 주신 이유는,
가인의 아내가 누구이며 천사장의 나팔이 몇 개인지 알려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끊임없는 질문들이 충족된다고 해서 구원에 이르고, 내 생명이 살고 풍성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내 생명이 비본질에 탕진되는 것을 멈추게 하고 더욱 의미 있고 보람 있고, 더욱
풍성케 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구절을 무슨 굉장한 비밀이라도 되는 양 심각하게 묻고 또 열심히 설명합니다.
그 설명을 들은 무리들이 무릎을 칩니다.
이런 일은 주로 이단이나 이단 비슷한 무리들의 단골 메뉴입니다.

세상 종말이 언제인 줄 아십니까?
저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지면 세상 종말이 옵니다.
그런데 종말의 시기를 알려주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믿음으로 끝까지 견디며, 또한 복음을 모든 민족에게 전하여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제대로 살게 하라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말씀을 종말의 시기를 점치는데 사용합니다.
이는,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는 죄악을 보지 아니하고 가인의 아내가 누구냐는 질문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단들이나 그 비슷한 무리들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를 구원받은 144,000명이라 설명하며, 자기들 무리에 들어와야 구원을
받는다고, 다른 여러 성경 구절들을 이리저리 엮어서 그럴듯하게 설명합니다.
그 설명을 들은 많은 사람들은 “어쩜 저토록 말씀을 잘 쪼개냐?” 감탄하며 그들을 맹종합니다.

이런 행태들 보며 저 같은 사람도 말문이 막혀버리는데, 예수님은 얼마나 답답하셨을까요?

중요하지 않은 것이 중요한 것을 삼키는 것이 최악의 죄입니다.
비본질이 본질을 밀어내도록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논리의 함정에 빠져서도, 언어의 감옥에 갇혀서도 안 됩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은 32절 후반부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우리들만 구원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그 어느 자식도 버릴 수 없듯이, 모든 자녀가 제대로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듯,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구원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모아보면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무병장수, 부귀영화, 내세보장입니다.
그런데 무병장수와 부귀영화를 누렸던 솔로몬은 행복했을까요?
그가 결론적으로 말합니다.
“그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런 결론을 내린 솔로몬은 그래도 행복한 사람입니다.
잘나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교만해지고 이내 패망의 길을 갑니다.
그 증거가 바로 나타납니다.
왕위에 오른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으로부터 이스라엘의 몰락과 불행은 시작됩니다.
내가 고생하더라도 자녀가 잘 되는 것이 구원에 훨씬 가깝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없던 구원의 길, 인간의 머리에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구원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75세의 노인 아브라함을 불러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의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그의 민족을 창대케 하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떠났습니다.
37년의 여정 동안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셨고, 죄와 허물을
덮어주셨고, 친히 하신 약속을 이루어가셨습니다.
마침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지시하는 곳 입구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그곳은 가나안 땅이 아닙니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모리아 산입니다.
이 산은, 100세 때 얻은 외아들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할 때만 오를 수 있는 산입니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기로 결단한 아브라함은 마침내 그 산에 올랐습니다.
그때 그 아들은 자신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그 아버지의 후손들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저희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롬11:28)

그런데 그들의 잘못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오해하였습니다.
자신들은 하나님의 선민(選民)이라는 교만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전해야 할 이방인들을 개로 여겼습니다.
거기에는 사마리아인과 세리와 창녀 등이 포함됩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개로 여긴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은 반발하였습니다.
그 선봉에 바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들이 십자가에서 처형시킨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것도 영으로, 음성으로 만난 것입니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오직 자신들만 하나님의 영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 바울과 그들에게 예수님의 영이 음성으로
강림하였다는 것은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증거였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제자로 돌변한 바울이 말합니다.
“복음으로 하면 저희가 너희를 인하여 원수 된 자라.”(롬11:28)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도 유대인들로서 이방인들을 여전히 개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놀라운 경험을 합니다.
이방인 고넬료가 베드로의 전하는 말씀을 듣고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베드로가 후에 다른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행11:15)
유대인들만 하나님의 성령을 받는 줄 알았던 그들에게는
경천동지(驚天動地)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렇게 바울과 베드로와 제자들은 이방인 사이의 담을 뛰어넘었고,
그러나 안타깝게도 골수 유대인들은 그 담을 넘지 못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형제요 혈육인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 담을 넘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기 위해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마음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묻습니다.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롬11:33-35)

이에 대한 답은 “아무도 그럴 수 없습니다.”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 해도 하나님의 지혜와 경륜과 그분의 마음을 따라갈 수도,
충족시킬 수도 없습니다.

순종의 끝은 어디입니까?
천 번을 순종하다가 단 한 번만 거역하면 순종이 아닙니다.
믿음의 끝은 어디입니까?
단 한 번의 의심으로도 모든 믿음이 허사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데 가두어 두셨다는 의미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인간이 절대로 범접하지 못하도록 하여,
하나님 자신을 영원히 신비한 존재로 남겨두기 위해서?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길 원하셨다면 아예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사랑이란 자신을 상대방에게 전부를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았을까요?
왜 신천지는 기성 교회를 자꾸 들쑤시는 것일까요?
목에 힘을 주고 자기주장을 끝도 없이 펼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것일까요?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이런 사람들은 모두 다 자신이 가장 옳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작디작은 틀 속에 가두고, 그 작은 틀 속에 스스로를 가둡니다.
그래서 그들의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보다 작고 좁고 얕습니다.

세계 최고의 권위인 과학 학술지 ‘네이처’에 “한국이 창조론자들의 요구에 항복했다.”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조광희 변호사는 무신론자임을 밝히며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인류가 형성한 신(하나님)에 대한 개념의 귀중한 부분은 진화론에 의해 훼손될 정도로
연약한 것이 아니어야 한다.
만일 당신이 가진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 진화론에 의해 위협을 받는다면, 성찰되어야 하는
것은 진화론이 아니라, 당신의 하나님관이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절대로 측량할 수 없게 만드신 하나님 앞에서,

솔로몬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가르쳐 줍니다.

“무릇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 할 수도 덜 할 수도 없나니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전3: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7:14)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알았도다.”(전3:11-12)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11:29)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 음성을 듣고 가는 것 자체가 은혜요 복입니다.
그 길을 열심히 가면 갈수록 비례하여 나의 은사는 점점 커지고, 내 삶은 더욱 풍성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