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라 (로마서 11:17-22)

새벽지기1 2018. 1. 22. 07:25


작가 어마 본 벤트라는 사람이 쓴 글입니다.
얼마 전 주일날
교회에서 한 꼬마가 고개를 돌려 사람들 얼굴을 하나씩 쳐다보며 웃고 있었습니다.
그 꼬마는 꼴깍거리는 소리를 내거나 콧노래를 부르거나 발로 차거나 엄마 가방을
뒤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웃고만 있었습니다.
잠시 후 꼬마 엄마가 아이를 확 잡아채더니 낮지만 엄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만 좀 웃어, 여긴 교회야.” 그러면서 꼬마를 한 대 쥐어박았습니다.
꼬마의 볼에 눈물이 흐르자
“차라리 그게 나아.”하고 덧붙인 뒤 엄마는 다시 기도하는 자세로 돌아갔습니다.

나는 화가 났습니다.
온 세상이 울고 있으니 너도 울어 라는 말로 들렸습니다.
나는 얼굴에 눈물 자국이 난 그 꼬마를 내 옆에 앉혀놓고 하나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기뻐하시는 하나님, 웃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

우리는 조문객처럼
엄숙하고 비장한 표정으로 소중한 것을 전부 갖다 바쳐야만 믿음이 좋은 줄 압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지금 이 엄마는 우리 문명에 남아있는
유일한 빛, 유일한 소망, 유일한 기적, 유일한 무한 약속 앞에 앉아있음에도

그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이 꼬마가 교회에서조차 웃을 수 없다면 도대체 어디로 가란 말입니까.

정말 너무나 각박한 세상입니다.
그래서 개그콘서트나 보면서 웃을까 정말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그 뜻밖의
기쁨을 느껴본 지 오래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치열한 경쟁사회에 던져집니다.
경쟁에서 탈락하면 곧 죽음이라고 배우며 자신이 죽는 줄도 모르고 달리게 합니다.
그래서 1등이 아니면 크고 작은 좌절과 수치심과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플러신학교 교수 루이스 스미디스파괴적인 수치심의 세 가지 원인을

용납 없는 부모, 세속문화 그리고 은혜 잃은 종교로 꼽았습니다.
용납 없는 엄마는 언제나 자식들을 닦달하면서 그 자식들에게 아무리 노력해도
합격점에 이를 수 없음을 끊임없이 확인시켜 줍니다.
오늘날의 세속문화, 그 기준은 사람이란 외모도 기분도 능력도 언제나 좋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뚱뚱한 사람, 못생긴 사람, 우울한 사람, 무능한 사람, 재주 없는 사람들의
설 곳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고매한 인격이라도 이 외모로 인하여서 그 안에 담긴 그것은 가치를 잃고 맙니다.
그것은 자타가 공히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압권은 무엇이냐 하면 은혜를 상실한 종교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면 수없는 율법조항을 열심히 지켜야 하고

만약 실패한 경우 영영 파멸이라고 설파합니다.
은혜를 상실한 기독교는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하나님의 복을 받겠다는 겁니까?”라면서
교인들로 하여금 그 수치심과 죄책감을 계속해서 상기토록 합니다.

헬무트 틸리케라고 하는 독일 목사가 있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합니다.
사탄은 뻐꾸기처럼, 이 뻐꾸기는 자기 알을 남의 둥지에다가 몰래 낳습니다,

그러면 둥지 안의 새는 그 알이 자기 알인 줄 알고 열심히 키웁니다.
그것처럼 사탄은 자신의 알을 신앙의 둥지에 떨어뜨려 놓는 재주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부패한 은혜가 풍기는 악취와 비교하면 지옥의 유황불 냄새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 말을 했습니다.
부패한 은혜.

이 부패한 은혜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필립 얀시가 아는 사람 중에
이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여자가 딸과 함께 교회 본당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 여자에게 평소에는 말조차 건네 본 적이 없는 사모가 다가오더니
“이혼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해가 안 가는군요. 자매님이나 남편이나 모두
예수님을 사랑한다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가버렸습니다.
매몰찬 면박에 기가 질린 그녀는 후에 필립 얀시에게 말했습니다.
“저나 남편이나 진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부부관계는
우리들이 도저히 어쩌지 못할 파국으로 치달렸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아팠고 망연자실 했습니다. 현재 제가 필요한 것은 조언과 위로입니다.”
상대방의 아픔과 고뇌를 들어줄 생각조차 하지 아니하고 시원치 않은 믿음이라고
비난하거나 그저 깊은 얘기도 들어보기 전에 단답형 답만을 던져줍니다.

로버트 웬버그 교수는 아주 희한한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기도해 보라는 뻔한 대답 말고”
사람들은 신앙의 뻔한 대답에 지쳐 있습니다.
그냥 대충 얘기 들어보고는 기도해 주고 끝나버립니다.
이 세상 사람 모두가 다 은혜에 굶주려 있습니다.
그래서
해결 방안이 없다면 그저 함께 그 얘기를 들어주면서 아파하는 것으로도 족합니다.

헤밍웨이는 부패한 은혜가 무엇인지 잘 알았습니다.
그의 가정은 대대로 기독교를 믿는 가정이었습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휘튼대학을 나왔습니다.
휘튼대학은 가장 보수적인 신앙심 깊은 대학입니다.
믿음생활에 누구보다도 열심이었던
그의 어머니에게 그 아들의 자유로운 삶은 방종으로 비쳤습니다.
아들이 그의 눈에 띄는 것조차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생일날 케이크와 함께 아버지가 자살할 때 쓴 권총을 보낸 일도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의사였는데 심한 우울증으로 인해서 헤밍웨이가 25살 때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 어머니의 편지에 이런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자식은 세상에 태어날 때 부모라고 하는 통장을 갖고 나온다.

자라는 동안 자식들은 인출만 해간다.

그러나 그 통장을 다시 채워 넣는 것이 자식 된 도리이다.
이어서 그 통장을 채워넣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적어놓았습니다.
거기에는 어머니께 수시로 선물하기, 어머니의 청구서를 대신 내주기 등등.
특히 강조한 것은 무엇이었냐 하면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철저한 의무
이행이라고 적어놓았습니다.
헤밍웨이는 아버지의 그 불행이 어머니 때문이라고 끝까지 믿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와 어머니의 구세주에 대한 미움을 끝내 버리지 못했습니다.
이렇듯 부패한 은혜의 악취는 소위 잘 믿는다는 사람들에게서 난다는 점입니다.
왜 하나님의 은혜가 이렇게 특심한 종교인들에 의해서 부패하는 것일까?
거기에는 타락한 인간의 종교성에 연유한 아주 뿌리 깊은 원인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이런 얘기를 합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구하라."
하나님의 그 깊은 사랑 또한 하나님의 공의를 보라는 그런 말입니다.

인간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면서부터 불가항력적인 상황, 엄청난 자연재해 또 신비한
광경 이러한 상황에서 그 배후에 큰 힘이 있음을 감지합니다.
사람들은 그 힘에 여러 가지 명칭들을 붙여서 신으로 섬겼습니다.
무엇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의 기원입니다.
그런데 이 종교의 공통점은 그 신들을 한결같이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그 신들을 잘 달래고 잘 섬겨서 그 신들로부터 복을 받고 또한 액운과 불행을
면하려고 노력합니다.
그것이 종교의 공통점입니다.

노력한다.
노력에는 차이가 나게 마련입니다.
열심히 잘하는 사람이 있고 또 게으르거나 또는 못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렇게 정도의 차이가 있으므로 그 결과 종교에는 계급이 생깁니다.
그리고 높을수록 신의 인정을 받은 것으로 자타가 인정합니다.
신들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 신들의 엄위에 반응했다는 뜻입니다.
신들의 엄위에 반응하는 이러한 종교들은 엄청난 폐해를 낳습니다.
종교 엘리트들은 절대 권력으로 신도들 위에 군림하고 또한 신도들로 하여금 뜻도 잘
모르는 각종 종교행위에 몰두하게 만듭니다.
여러분 각종 종교행위들을 이성적으로 한번 들여다보고 판단해보십시오.

자해를 했다고 합시다.
이 자해는 정신 이상자들이,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 병든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에서는 높이 평가받습니다.
뜨거운 불 위를 가거나 죽은 고승의 시신에 덧칠을 해서 등신불로 만들어 놓고 참배를 합니다.
그리고 감탄합니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보았습니다.
죽을 때 입었던 옷 바깥으로 뼈가 드러나 보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면 그 사람은 보통 정신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른 종교뿐만 아니라 기독교에서도 그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소중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버지를 잊어버리고 엉터리
신들을 두려움으로 섬기며 몽매한 길을 가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보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와 경륜과 생각과 마음과 성품을 이 성경책을 통해서 온 세상에 알리셨습니다.
그 핵심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은 곧 사랑이시다.”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엄위’도 있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 심판하시는 하나님 그런 무서운 면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엄위는 다른 신들의 엄위와는 그 차원이 다릅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프로메테우스.
물론 신화이지만 프로메테우스는 신들만 쓰고 있는 그 불을 훔쳐다가 인간에게 나눠준
죄로 무지무지한 형벌을 받습니다.
낮에는 독수리에 의해서 온몸이 뜯기고 밤에는 도로 회복되는 영원한 형벌을 받습니다.
다른 신들의 엄위는 심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엄위는,
우리가 때로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또 비판을 듣고 훈련을 받기도 하지만 그 하나님의
엄위는 "그래서는 제대로 살 수 없어."라고 하는 사랑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사랑의 또 다른 표현.

여러분,
제발 내가 좀 잘못했다고 해서 벌 받을까 전전긍긍하지 마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는 이것을 우리가 지금까지 교회에서 배워온 어떤 기도나 전도나 봉사 이런 것들을
폄하하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것의 올바른 뜻,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그 뜻을 바로 회복하자라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엄위에만 반응할 때 기도는 주문이 되고 헌금은 그 신을 달래는 복채가 됩니다.
뇌물이 됩니다.
그리고 예배는 굿이 됩니다.


하나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됩니다.
뉘우치며 돌아오는 우리들을 하나님께서는 버선발로 뛰어나와서 반겨주십니다.
인간 부모들도 그렇습니다.
자녀가 아무리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진심으로 뉘우친다면 그동안 받았던
그 아픔과 피해는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함께 기뻐하는,
오히려 자식보다도 더 기뻐하는 것이 인간 부모입니다.
하나님은 그 이상의 이상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그 사랑과 자비에 반응하지 아니하고

다른 종교들처럼 ‘엄위’에만 반응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엄격하고 무서운 분으로 여겨서 싫어하신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스스로 생각해 갖고 무려 2,134개 조항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들이 왜 그러는지 독재국가를 생각하면 아주 쉽게 이해가 됩니다.
독재자는 국민들을 사사건건 통제하고 또한 비례해서 수많은 법들을 제정합니다.
통제국가에서는 법들이 굉장히 많아집니다.
그리고 독재자 자신은 가장 옳다고 착각하면서 살아갑니다.
또한 그 부하들은 자신이 가진 그 권한을 사정없이 휘둘러버립니다.
원래대로라고 하면 권세와 힘은 왜 주셨습니까?
국민들을 살리고 돌보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걸 휘둘러버립니다.
또한 그 지도자들에게 잘 보이려고 그 아랫사람들은 아부, 복종 뭐 그런 것만 합니다.
그러나
살아야 되기 때문에 그러지 속으로는 아무도 그 사람을 진짜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유대교의 제사장과 바리새인들 그리고는 일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 대신에 종교의
무거운 짐들을 지웠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도 목사는 절대 권력자로 군림하면서 거저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여러 가지 조건을 달아서 팔고 있습니다.
이것은 온 천지에 불이 꺼지는 참사보다도 더 심각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은혜에 굶주려 있습니다.
만약에 교회에서 은혜를 찾을 수 없다면 세상 어디에서도 그 은혜를 찾을 수 없습니다.

한 집사님이 우리 교회의 좋은 점이 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차별이 없어요. 마음이 너무 편해요.”
그분은 싱글맘으로 어렵게 사시는 분입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다시금 제 마음을 가다듬었습니다.
어려울수록 낮을수록 힘이 없을수록 교회에서는 대접을 받아야 됩니다.
왜요?
교회만이 은혜가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영국에서 세계 석학들, 신학자들이 모여서 모든 종교 중에 기독교만이 기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열띤 토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기독교가 낫다는 것이 무엇이냐?
그 열띤 토론장에 뒤늦게 C. S. 루이스가 합류하였습니다.
토론하고 있는데 옆에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주제가 도대체 뭐죠?
모든 종교 중에 기독교만이 기여할 수 있는 것, 그것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C. S. 루이스가 말했습니다.
“그거야 쉽죠. 은혜죠, 은혜.”

도움을 주고 절대로 생색내지 않는 거예요.
전도를 아무리 열심히 하고 헌금을 아무리 많이 해도 저는 절대로 칭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부터 버리셔야 됩니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어떻게 모를 수가 있냐고? 바보라고요?
모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내가 그 사람을 도울 때 내가 돕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주신
은혜로 돕는다고 철저히 믿을 때 오른 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릅니다.
생색내려거든 하지 마십시오.
또한 높을수록 많을수록 더 많은 일을 조용히 따뜻하게 행하는 교회.
그리하여서
진짜 은혜가 넘치는 교회가 되기를, 우리가 그렇게 해서 만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방법을

나무를 접붙임하는 것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내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느니라.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노예였습니다.
나무로 치자면 자력으로는 아무 열매도 맺을 수 없는 형편없는 나뭇가지로

용도라고는 그저 불쏘시개 정도였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의 탄식소리를 하나님께서 들으신 것입니다.
그 비천한 소리를 하나님께서 들으십니다.

출애굽기 2장 23절에서 25절
“이스라엘 자손이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하나님께서 그 고통소리를 들으시고 이스라엘 자손들을 권면하셨더라.”
그리하여서 역사상 유래 없는 그 장엄한 구원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절대 절명의 위기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쩌지 못하는 수많은 위기 가운데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출해주셨고
자기 힘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광야에서 2백만을 40년 동안이나 먹이고 입히셨습니다.
그리고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공짜였습니다.
한 번 노예는 영원한 노예인 그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가장 밑바닥 인생을 들어서

가장 지고한 제사장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쓸모없던 가지들을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께 접붙여서 살려주시고
생명의 진액을 공급하셔서 아름다운 꽃과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이 열매와 꽃은 세상에서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꽃과 열매들입니다.
여러분, 노예가 제사장이 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가장 유명한 노예반란은 스파르타쿠스입니다.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성공시키셔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그러한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오늘 본문에서는 원가지라고 하였습니다, 원가지.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원가지가 은혜를 상실하고 꺾이고 말았습니다.
다윗에 이어 솔로몬의 영광 영화를 누리자 그다음부터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달란트 비유나 므나 비유는 하나님의 사랑과 엄위에 각각 반응한 사람들의 결말이
어떻게 다른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달란트, 1달란트의 양은 6,000일 동안의 일당입니다.
6,000일이면 20년 동안의 일당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았다 그러면 100년 동안의 일당 그다음에 므나라고 하는 것은 달란트의
60분의 1입니다.
그러니까 100일 동안의 일당입니다.
이 달란트 비유와 므나 비유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엄위에 각각 반응한 사람들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순서를 바꿔서 먼저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종의 말을 한번 들어봅시다.
이 종은 어떻게 했습니까?
마태복음에서는 땅에 묻어두었다고 그러고 누가 복음에서는 이렇게 손수건에 싸두었다
그렇게 말합니다.
주인이 주신 달란트를 잃을까 땅에 묻어두었나이다.
그리고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왜 그렇게 했느냐 하면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하나님을 무서운 주인으로 생각했던 종은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고 그나마 가진 것도 잃어버리고 게다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책망을 들으면서 어두운 데로 쫓겨나버립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쫓아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 부모도 만날 축만 낸다고 해서 쫓아내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을 오로지 무서운 분으로 생각하여서 노심초사하며 섬기는 사람들.
어려운 일이 생겼습니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습니다.
'지난주 십일조를 떼어먹었더니.'
'지난주 예배를 참석하지 않았더니.'
여러분 어느 것 하나 걸리지 않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주신 재능을 찾고 개발하는 대신 목사가 시키는 대로 종교행위에 몰두하다가 그 인생은
점점 어두워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꼭 같은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랬더니
바리새인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또 이것은 오늘날의 기독교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지도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주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병자를 낫게 하고 귀신을 내어 쫓았는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어두운 데서, 같은 운명이 처해진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얘기를 들으면서 엊그저께 심방 가서 아주 정말 도저히 어쩌지 못하는 얘기를
듣다가 저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떻게 살까?
그것은 예기치 못한 사고 또는 가족들 친정 시댁식구들이 끝도 없이 저지르는 일들,
그 모든 식구들 중에 이 젊은 엄마만이 맨 정신으로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로 나가야 되겠다 생각했다고 합니다.
인근 교회로 갔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본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날, 물론 모든 교회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모든 교회가 그런 것이 아니지만 어떤 교회에서 목사가 부임해서 첫 설교를 하였는데
하루 일곱 시간씩 기도하여서 복 받은 사람을 예로 들면서 모든 교인들도 이제부터는
그렇게 하라 교회에 나와서 하루에 일곱 시간씩 기도하라.
이것은 뭐냐 그러면 기독교방송 홈페이지를 통해서 제게 질문한 내용입니다.
여러분 하루 일곱 시간 기도하면 어떻게 될까요?
일주일에 열네 번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려야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예배에 목숨을 걸라.

다시 말씀드립니다.
종교행위를 폄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그 귀한 선물들에 진정한
참 의미를 알고 행하자는 것입니다.
가더라도 알고 가자는 얘기입니다.
예배가 뭐라고 그랬습니까?
“친밀해지다, 가까워지다.”입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접속입니다.
헌금이 무엇입니까?
당신은 나의 영원한 주인입니다.라는 신앙고백입니다.

받은 달란트로 열심히 장사하여 배나 남긴 종들은 주인이 오자 한 걸음에 달려갑니다.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 빨리 보고 싶었어요.
그런 마음일 것입니다.
이렇게 아룁니다.
"주여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더 남겼나이다."
얼마나 신났겠습니까?
그러자 주인도 함께 기뻐하면서 답합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마25:21)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달란트를 남기기를 원하는 것은

바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여러분들이 바치는 거 거절합니다.
하나님은 자족하시는 분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제 밥벌이를 하고 제대로 살아갈 때 부모는 죽어도 좋다고 말합니다.
그 뜻입니다.
주인은 그 달란트를 주면서, 탤런트라고 그러죠. 재능.
의미가 큽니다.
그 달란트를 주면서 업종을 정해주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해 저렇게 해 사사건건 간섭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받은바 능력대로 재능대로 업종을 각각 자유롭게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했습니다.
왜요?
주인, 곧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충성된 종아 그러거든요.
아부하고 충성은 다릅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그 충성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
기도와 노동은 동의어라고 그랬습니다.
이 종이 어떻게 했겠습니까?
열심히 하나님께서 주신 그 달란트와 자원을 가지고 영광을 위해서 하면서 언제나
기도로 하나님께 지혜와 능력을 구하며 살아갔습니다.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너희가 만약에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면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있으리라는 말입니다.
C. S. 루이스는 세상의 모든 죄와 악을 합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는
그 넓은 바다에 떨어뜨리는 잉크 한 방울보다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어렵습니까?
아니요.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
자녀가 그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참으로 뉘우치고 새 삶을 살겠다 마음을
먹는 순간 그 모든 허물, 과거의 허물을 부모는 기억하지 않습니다.
인간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허다한 죄와 허물과 악을 덮고도 남습니다.

피터 그리브는 영국 사람입니다.
인도에서 살던 중에 한센병에 걸립니다.
몸이 마비가 되고 한쪽 눈까지 실명하여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수녀들이 운영하는 공동체에 수용되었습니다.
절망밖에는 없어서 언제나 죽을 생각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른 새벽에 일찍 눈을 떠 밖으로 나갔습니다.
어디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소리를 따라가 보니까 교회 안에서 수녀들이 그 이른 새벽에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기도의 내용은 환자들의 이름을 놓고 기도하는 중이었습니다.
그 중에는 자기 이름도 있었습니다.
이 피터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잊은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들은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 그 생각이 그의 삶을 완전히 바꿔 놓았습니다.
자신도 이 세상에 필요한 존재임을 깨닫고 그 이후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 몸으로 받은바 은혜를 베풀면서 살았습니다.
그의 아름다운 삶은 “두 번째 기적”이라는 책으로 남기고 조용히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두 번째 기적, 거기에 자기 자랑을 써 놨을까요?
아니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천국에 대한 성경의 약속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베푸신 영원한 잔치에 참석하여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면서 그 엄청난 하나님의 영광을 받을 것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 하리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높은 자리에 앉아도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감히 꿈도 못 꿀 일들이 우리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누구이든 어떤 일을 했건 어떤 어려운 처지에 있어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리고 열심히 이기고 견디고 나아간다 라고 하면 또한 내가 하나님께 둘도 없이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고 열심히 산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렇게 이루어주시는 것을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무한한 은혜를 여러분 감사함으로 누리십시오.

잘난 척하지 마십시오.
높은 생각하지 말라 그러잖아요, 자긍하지 말라.
감사함으로 누리시고 겸손함으로 베푸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