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 (로마서 12:1~8)

새벽지기1 2018. 1. 27. 07:07


집안 형편이 어려운 양선화 양은 지방 고교를 졸업한 후에 홀로 서울로 올라와 한 변호사
사무실에 취직했습니다.
그녀의 하는 일은 복사, 커피 타기, 심부름 등의 잡일이었습니다.
어느 날 감기몸살로 도저히 출근을 할 수가 없어 사무실에 전화를 했는데,
변호사가 “월급을 받는데 네 마음대로 아프면 안 된다.”며 사무실에 나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서러웠습니다.
자신은 아파서도 안 되는 허드렛일을 하는 기계처럼 느껴졌습니다.
더욱 자신을 더 초라하게 만드는 것은 매일 만나는 법조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당당했고, 안 되는 일이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자신도 사법시험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언감생심, 60만원의 월급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고

일하지 않으면 이나마 돈도 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양선화 양은 결심을 하고 방송통신대학 법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주경야독.
드디어 4년 만에 졸업을 하였습니다.
회사에 사표를 낸 후,
사법시험 출사표를 던지고 무작정 신림동 고시촌에 들어갔습니다.
그동안 저축한 약간의 돈.
그리고 40만원의 학원비는 칠판 닦기, 교실 청소로 대신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하는 것을 본 학원 선생님들이 그녀에게 교재를 공짜로 주었습니다.
아침에 깁밥 두 줄을 사서,
점심 때 한 줄, 저녁에 한 줄을 먹으며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공부한 양선화 양은 5년 만에 사법고시를 통과하였고

마침내 법조인이 되어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의 기를 죽입니다.
그런데 그 부모님들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뒷받침도 해주지 못한 그 딸에게 한없이 고마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땠을까요?
하나님께서도 대견해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라시는 것은,

양선화 양이 그 지위로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데 사용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오늘 본문은 ‘그러므로’로 시작합니다.
접속사 ‘그러므로’는 앞의 내용을 이유로 들면서 결론을 내릴 때 사용합니다.
“너는 집안도 좋고 머리도 좋고 얼굴도 예쁘다.”
“그러므로 부잣집에 시집가서 멍청하게 살아라.”는 것은 말이 되질 않습니다.
“그러므로 남보다 선하고 좋은 일을 더욱 많이 해야 한다.”가 맞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라 하는지,
먼저 앞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지금까지 사도 바울이 설명한 모든 것이 이에 해당됩니다.

너희는 본래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란다.
태어날 때부터 많은 것을 주셨다.
또한 믿음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이 너희들의 아빠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죄와 실수는 언제나 용납된단다.
그래서 죄가 너를 주관치 못하고 정죄도 받지 않고 영생을 보장받았다.
게다가 예수님과 공동상속인이 되어 하나님의 모든 능력과 지혜와 복을 누릴 수 있다.
하나님의 너를 향한 사랑은 세상 그 어떤 것도 절대로 끊을 수 없다.
아무리 나쁜 일이 있어도 잘 참고 견디면

그 모든 슬픔과 아픔과 고난까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다.
그리하여 너는 하나님의 영적 맏아들이 되고,
남들보다 두 배의 복을 누리며 마침내 하나님께서 너를 영화롭게 하신단다.
이 밖에도 많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사람이나 제도나 돈도 할 수 없는 사랑과 보장과 인도를 하나님께서 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라는 것이며,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에는 두 가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당연히’입니다.
둘째는 ‘걱정하지 말고 마음 놓고’입니다.
그런 엄청난 보장과 인도를 받은 우리들은 ‘어떤 처지에 있어도 당연히’,
또한 ‘망할까 실패할까 걱정하지 말고’,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이 곧 영적 예배라 하셨으니까,

예배에 목숨을 걸라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더 깊고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먼저 ‘산 제사’는 구약에서의 ‘번제’입니다.
번제는 ‘헌신의 제사’로서 그 의미는 내 몸을 완전히 불살라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겠다는 뜻입니다.

‘영적 예배’의 ‘영적’에 해당되는 형용사 ‘로기켄(logiken)’은 ‘로기코스(logikos)’에서 파생된
것으로 그 뜻은 ‘합당한(resonable)’, ‘합리적인(rational)’입니다.
‘영적(spiritual)’인 것을 표현하는 ‘프뉴마티켄(pnumatiken)’을 사용하지 않고 ‘합리적인
(rational)’을 사용한 것은 이방인들의 미신적인 행동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또한 예배에 해당되는 헬라어 ‘라트레이아(latreia)’는
단순히 제사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서의 예배를 의미합니다.
즉, 삶의 모든 가치와 의미를 삼위일체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사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은 ‘영적 예배’를 the spiritual worship 대신 the reasonable service,
즉, 그에 ‘합당한 섬김’이라고 변역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당부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것은, 그저 이 땅에서 무병장수 부귀영화에 목을 매며

돈이면 다 된다고 믿는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헌금은 복채로 기도는 주문으로 예배는 복 받는 수단으로 전락한 요즈음의 예배,
한번이라도 빠지면 벌 받을까 두려워하는 예배가 과연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에 합당한 것인가 점검해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생명을 살리고 그 생명을 더욱 풍성케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일을 성취하기 위해 택하신 길은 바로 ‘섬김’, service 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예수님의 삶 자체가 바로 자신의 목숨을 하나님께 드린 산 제사였으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섬김, 즉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예배였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는 구체적인 방법의 강론을,

사도 바울이 설명합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12:3)

흔히 이 구절을 교회의 계급에 따른 위계질서로 설명합니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들은 그 계급에 믿음의 분량이 각각 다르니 월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소가 웃을 일입니다.
교회는 사회와 달라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 초신자들이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곳이며,

책임이 큰 사람일수록 더 많은 섬김의 일을 하는 곳입니다.

유명한 신학자 머레이(Murry)와 해리슨(Harrison)은, 이 구절을 정확히 해석하였는데,
“믿음의 분량대로에서의 믿음은 구원의 수단인 진리를 믿는다는 말이 아닌, 자신이 받은 영적
은사의 성격을 알고 그 은사를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하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지혜롭게’에 해당되는 ‘소프로네인(sopronein)’은 ‘건전하고 겸손하게’라는 뜻이며,
‘지혜(soprosune)’란 자신을 바르게 본다는 뜻입니다.

애리조나 주의 인디안 보호구역 안의 작은 마을 피논에서 사는 13살 가레트는
허름한 트레일러에서 엄마와 두 누이, 그리고 사촌 동생 둘과 사는데,

비좁을 뿐만 아니라 겨울이면 굉장히 추웠습니다.
석탄은 비쌌고 여동생의 천식은 악화되었습니다.

가레트는 석탄 없이 난방을 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문득 눈에 들어온 것은 태양.
수업시간에 배운 태양광 발전이 생각났습니다.
고장 난 자동차의 라디에이터와 쓰레기통에서 모은 음료수 캔 69개,
자전거의 튜브를 조립해서 태양광으로 물을 데우는 난방장치를 만들었습니다.
가레트의 난방기로 따뜻한 겨울을 날 수 있었고, 이 난방기는 미국 과학기술박람회에서
우승하였습니다.

캐나다의 14살 소녀 케일라에게는 자폐아인 사촌 동생 로레나가 있는데,

아는 알파벳은 오직 L자였습니다.
로레나는 피아노를 뚱땅거리는 것을 제일 좋아했습니다.
케일라의 머릿속에 문득 스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건반에 알파벳을 써놓고 건반을 누르며 로레나를 가르쳤습니다.
결과는 대성공.
로레나가 단어들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케일라의 교육 프로그램은 캐나다와 20개국이 넘은 특수 교육 학급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케일라는 2007년 CNN방송에서 선정한 올해의 영웅으로 뽑혔습니다.
그날 로레나는 “사랑해 케일라 언니!”라고 소리쳤고,

케일라와 많은 사람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가레트와 케일라가 발명의 길에 들어선 원동력은,
‘가슴 깊은 곳에서 꼼지락거리는 사랑’이었습니다.
이 두 소년, 소녀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권면하는 지혜롭게 생각하는 길을 멋지고 아름답게 보여주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사람으로 태어난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존재하라고 맺어준
가족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가 된 하나님의 가족들입니다.
그 시각과 사랑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십니다.
아이디어와 능력을 주십니다.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웃을 살리는 삶이 바로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예배입니다.
삶 가운데 올바로 드리는 영적 예배는 100배의 결실을 맺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어서 은사에 대해서 길게 설명합니다.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예언’은 앞날을 점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말씀(預言)’을 전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분수’란 위에서 설명한 ‘믿음의 분량’과 동의어입니다.
즉, 자신의 은사를 잘 이해하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전하라는 의미입니다.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섬기는 척, 가르치는 척하며 돈을 벌거나 인기를 얻겠다는 헛된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명예나 부는 목표가 아니라 열심히 한 결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혹 권위 하는 자면 권위 하는 일로.”
여기서 권위는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권면하고 위로하는 일입니다.
그런 일을 특별히 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은사가 무엇인지 잘 찾아 그 일을 열심히 하라는 것입니다.
양선화 양이 사법시험을 친 것은 그에게 법조인으로서의 재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구제, 다스림, 긍휼 등
그 하는 일마다 그 가치와 그에 따르는 풍성한 은혜와 복을 담아놓으셨습니다.
그 은혜와 복을 누리고 베풀기 위해서는 올바른 태도로 All-In을 하셔야 합니다.
눈가림으로는 절대로 통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당부합니다.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8-9)
여기에 덧붙입니다.
“그것도 100배로.”
바로 이것이 복의 근원의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로저 크로포드는
미국 유수한 기업들의 컨설턴트이자 강연가로서 미 전역을 누비며 잘나가는 사람입니다.
많은 책도 썼습니다.
대학시절에는 테니스 대표선수였으며 훗날 국가 공인 프로 테니스 선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태어날 때부터 두 손이 없었습니다.
오른 쪽 팔뚝에 엄지손가락 같은 것이 돌출되어 있었고,

왼쪽 팔에는 손가락 몇 개가 달려 있을 뿐입니다.
다리와 팔은 형편없이 짧았습니다.
로저의 부모는 남달랐습니다.
로저에게 최고의 사랑과 격려와 함께 독립심과 긍정적인 사고력을 키워주었습니다.
아버지가 늘 하시던 말씀, “너는 네가 원하는 만큼만 장애인이다.”입니다.
로저는 열심히 훈련을 받았고 열심히 공부도 했고, 보통아이들과 어울려 잘 자라났습니다.

그에게 결정적인 결단을 하게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만났습니다.
그는 자신과 동일한 기형적인 손을 가졌습니다.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그가 자신의 훌륭한 멘토가 되리라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로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나와는 달랐다. 그는 직장에 오래 붙어있지 못했고,

그 이유를 자신의 신체에 대한 차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니었다. 계속되는 지각과 잦은 결근, 자기 일에 대한 무책임 때문이었다.
자신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나에 대해서도 화를 냈다. 그가 온전한 몸을 갖게 된다고
하여도, 그의 불행과 성공의 결여는 조금도 변함이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도 바울이 당부합니다.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롬 12:9)
악이란 나쁜 짓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가는 길을 좌절시키는 모든 것입니다.
그 사람은 악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로저 크로포드는 선에 속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재능을 주셨습니다.
자신의 재능을 찾으십시오.
그 재능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재능을 찾고 개발하고 발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웃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최선의
삶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며, 우리들이 드릴 산 제사이며, 영적 예배입니다.

나는 덧없는 먼지가 되기보다는
아낌없이 타고 남은 재가 되고 싶습니다.

나는 내 생명의 불꽃을
맥없이 질식시키기보다는
찬란한 화염 속에 완전히 불태우고 싶습니다.

인간의 참된 생명은
그저 존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활기차게 사는 데 있습니다.

나의 삶을 단순히 연장하려는 노력에
나의 소중한 날들을 낭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내게 주어진 시간을 알뜰히 남김없이 사용할 것입니다.

성치 않은 몸으로 하나님께 온전한 번제를 드린 로저 크로포드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