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이 세상 어떻게 살아야 하나? (로마서 12:14~21)

새벽지기1 2018. 1. 29. 14:30


일류 검객이 되기 위해 피나는 수련을 하던 한 제자가 스승님께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스승님, 훌륭한 검객이 되기 위해선 얼마나 수련을 쌓아야 합니까?”
“최소한 10년은 필요하다.”
“평소보다 갑절로 노력하면 시간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을까요?”
“아니다. 그러면 20년은 걸릴 것이다.”
“잠도 자지 않고 수련에만 전념한다면 일류 검객이 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너는 절대 일류 검객이 될 수 없다.”

의아해 하는 제자에게 스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류 검객이 되기 위해서는 한 쪽 눈은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도록 남겨야 한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반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너의 두 눈은 모두 일류 검객에 고정되어 있는데
어찌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있겠느냐?”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독일 카를스루대 한병철 교수가 쓴 ‘피로사회’는
문명사회에 만연한 번아웃 신드롬과 우울증의 원인을 성과주의에서 찾고 있습니다.
더 많이 일하면 더 높은 성과와 보상을 얻는다는 명제 아래, “너는 할 수 있어.”라는
메시지가 천지사방에서 들려옵니다.
그 메시지에 세뇌된 사람들은 스스로를 닦달하면서 정신없이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이 아름다운 세상은 ‘피로사회’로 바뀌고,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은 성공이
아니라 과다한 노동에 의한 탈진과 우울증입니다.
여기에 하나를 첨가할 것이 있습니다.
인간 자체의 몰락입니다.
사람다운 사람을 찾기 어렵습니다.
두 눈은 오로지 성공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어 고매한 인격이나 따뜻하고 넉넉한 성품 등은
미처 돌볼 시간이 없습니다.
온 세상이 맘몬이라는 사탄에 모두 다 놀아나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많은 교회도 피로사회에 속합니다.

교회에서 외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지친 사람들은 그래서 교회로 갔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습니다.

예배, 전도, 봉사, 헌금, 기도, 구제 역시 모두 보상과 성공에 초점을 맞춰져 있어,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들은 게으른 열등생 취급을 당하고,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세상 일과 병행
하느라 심신이 더욱 피곤해집니다.
뭔가 잘못 돼도 크게 잘못되었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예수님의 깊은 뜻을 반드시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11:29-30)

그러니까 예수님도 우리들에게 멍에는 씌우고 뭔가 짐을 지우십니다.
그런데 과거 유대교가 백성들에게 부과했던 것이나, 오늘날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부과하는
종교적인 멍에와 짐을 비교하면, 예수님의 것은 쉽고 가벼울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지고 가면 안식과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것도 땅에서의 것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안식과 평안입니다.
예수님의 멍에와 짐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오늘 본문은 성도들이 해야 하는 많은 일들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라.”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교인들 중 가난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고
나그네, 오늘날로 말하면 외국인 노동자나 탈북자들을 도우라는 것입니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어라.”
남이 잘된 경우 샘을 내고 배 아파하지 말고,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들에게 무관심하지
말고 그 일을 해결해 줄 수는 없지만 함께 슬퍼하고 아파하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처음 나온 어떤 사람이, “식구들조차도 모른 척하는데, 그 집사님은 함께 울며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런 것을 처음 보았습니다. 그래서 함께 교회로 나왔습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성공과 보상에 대한 강박감을 버리고,
언제나 자신보다 낮은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힘쓰라는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라.”
종교나 이념이나 생각이 다르다고 적대시하지 말고

그가 누구이든 사이좋게 지내라는 것입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예를 들자면, 김일성 일가가 말도 안 되는 일을 하지만,

굶주리는 북한 동포들을 먹이고 입히라는 것입니다.

할 일 참 많습니다.
이 중에는 정말 하기 어려운 일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일들을 숙제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 않으면 징벌을 내리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모든 일들의 가장 근본이 되는 원칙이 있습니다.

9절 말씀입니다.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입니다.

이 말씀에서 주의할 것은, “악을 미워하라”는 말인데, 여기에 초점을 맞춰서는 안 됩니다.
잘못된 것을 비판하고 나무라는 데만 집중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사사건건 좌충우돌입니다.
그러다가 궁극적인 목표인 ‘선에 속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21절 말씀이 중요합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입니다.

먼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구조를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 구조는 대단히 간결합니다.

하나님은 끝없이 창조하십니다.
창조의 원동력은 사랑과 진리입니다.
반면 사탄은 오직 파괴에 몰두합니다.
파괴의 수단은 증오와 거짓입니다.
그럴 듯하게 들려도 모두 거짓이며 증오심을 조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을 ‘거짓의 아비’(요8:44), ‘밤낮으로 참소하는’(계12:10) 파괴의 영이라고 규정 합니다.

이사야는 사탄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내가 하늘에 올라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사14:13)
뭇별 위에 군림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그 마음이 바로 증오심의 원천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날의 화두인, 성공지향과 무한 경쟁은 다름 아닌 사탄의 생각과 같습니다.
성공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뭇별 위에 좌정하겠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카피라이터인 정철 씨가 이런 글을 썼습니다.
“비누가 지배하던 욕실에 샴푸가 한자리 차지할 수 있었던 건, 자신만의 전문 분야를
확실히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샴푸가 지배하던 욕실에서 린스가 한자리 차지할 수 있었던
건, 샴푸의 일을 빼앗지 않고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쓰러뜨려야 내 자리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을 찾으라는 것이 예수님의 당부입니다.

다시 돌아갑니다.
창조의 하나님과 파괴의 사탄의 한가운데 내가 서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에 속하면 내 생명은 살고 더욱 풍성해지고, 사탄에 속하면 내 삶은 황폐지고
마침내 파멸에 이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에게 가장 먼저 물어야 할 것은 내 마음 자리입니다.
성공 여부가 아닙니다.
누차 말씀드립니다.
성공과 보상에 대한 강박감을 버리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관심사는 현세적인 성공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슨 일을 행할 때 가장 먼저 물어야 하는 것은, 이 일을 사랑으로 행하는 것이냐,
아니면 증오로 하는 것이냐를 물어야 합니다.

내 손해와 억울함과 복수심에 정당한 사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증오에 의한 것이면 반드시 멈춰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파괴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필요도, 십자가에 달리실 필요도, 또한 그런 기도를 하실 필요가
없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기에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오직 우리들에게 그렇게 기도해서 어떤 일을 당하든지,

선으로 악을 이겨 하나님께 속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살고 내 생명이 더욱 풍성해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일이 내게 손해가 나는 일이라도 사랑,
즉 내가 살고 남을 살리는 일이면 그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걱정하지 말고 행해야 합니다.

마음에 새기고 새겨야 하는 것은,

복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선한 일에 담아놓으셨다는 점입니다.
그 일을 행할 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복이 내 삶에 가득하게 됩니다.
이것이 삶의 가장 기본이 되는 원리이자 유일한 성공의 원리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창조의 하나님이십니다.
동시에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창조와 언약, 이 둘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온 우주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언약을 하십니다.
그 언약을 믿고, 하나님을 향해 나갑니다.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이루시며 나를 성장시키며 점점 더 새로운 존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창조해나가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롬12:19)

이 말씀은 바로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약속입니다.
이 언약을 믿고 정말 너무나 힘들지만 내 손의 칼을 내려놓습니다.
분노가 불쑥불쑥 치밀어 오를 때마다 이를 악물고 기도합니다.
그렇게 기도가 더해지노라면 어느새 내 마음에 하나님의 평강과 안식이 자리를 잡았음을
알게 됩니다.
창조의 하나님께서 나를 재창조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가르쳐준 내용들은 분명 행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모두 우리들이 가야 할 방향들입니다.
올바른 방향을 가르쳐주신 것 자체가 은혜 중에 은혜입니다.
감사함으로 힘들더라도 가야 합니다.
갈수록 내 그릇은 더욱 커지고 깨끗해집니다.
그 그릇 안에 하나님께서 넘치게 복을 허락하십니다.

또한 모두 다 더불어서 함께 행하는 것들입니다.
요즈음처럼 살벌하고 메마른 세상에서 좋은 공동체에 내가 속해있는 것처럼 중요한 것도
없습니다.

영국 시인 W.H. 오든은 인간에게만 허락된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일, 웃음, 기도입니다.
그가 말합니다.
“개인이든 공동체이든 간에,
일과 웃음과 기도 이 세 가지에 적절한 관심을 가져야 만족스러운 삶이 가능하다.
기도와 일이 없으면 사육제의 웃음은 추잡한 것이 되며, 코미디의 유머는 지루하고
외설스러워지며, 조롱은 순식간에 미움과 잔인함으로 돌변한다.
웃음과 일이 없으면 기도는 지식 중심적이고 변덕스럽고 형식적인 행위로 전락한다.
반면 웃음과 기도 없이 일만 하면 권력에 미친 사람이 되고, 자연을 욕망의 포로로 삼는
폭군이 되고 만다.
그러다 결국 허상의 섬에서 파선하는 배처럼 파멸을 맞는다.”

이기적인 욕망과 살벌한 경쟁과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유혹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행복한 삶을 사는 현명한 길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이렌이란 요괴들이 바다에서 삽니다.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 선원들을 유혹합니다.
그들의 노래는 너무나 고혹적이어서 들으면 도저히 저항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다가온 배들을 파선시켜 버립니다.
오디세우스는 그들의 노래가 너무나 듣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노 젓는 선원들의 귀를 막고, 자신을 돛대에 꽁꽁 묶었습니다.
드디어 사이렌의 노래가 들려왔고, 오디세우스는 몸부림을 치며 소리를 쳤습니다.
“방향을 틀어라!”
그러나 귀를 막은 선원들은 그 명령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무사히 지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르페우스는 오디세우스와는 달랐습니다.
그는 하프의 달인.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였고,
선원들은 그 소리에 빠져 사이렌의 노래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지워주시는 멍에와 짐은 생명의 소리요, 세상의 어떤 가르침도
따를 수 없는 천국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에는 최고의 사랑과 배려와 화평과 소망과 위로가 있습니다.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그 말씀 따라서 살아가십시오.

오늘의 가르침을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는 숙제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때로는 놀며 쉬며 지킬 힘을 주시는 하나님께 간구하며 또한 감사하며 서로 격려하며
가노라면 세상 유혹은 어느새 다 지나쳐 버리고, 나는 하나님의 복이 흘러넘치는 복의
근원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화목제물로 바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며 신앙생활을 지옥으로 만든 사람들, 하나님을 모른 채 삶을
저급한 욕망의 탐욕스런 충족으로 전락시킨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키고 천국의
즐거움을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