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연약한 자를 위하여 (로마서 14:1-18)

새벽지기1 2018. 2. 5. 14:41


제가 머리가 복잡해지면 마지막으로 찾는 곳이 있습니다.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에 있는 팔렬고등학교입니다.
엊그제 다녀왔습니다.
그곳에는 신학봉 교장선생님이 있습니다.
신학대학원 동기인 신 교장은 제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맑은 사람입니다.
그를 만나 특별히 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저 함께 밥 먹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시골 길을 걷고 때가 되면 자는 일입니다.
그러면서 그의 말을 듣고 대화를 나누다 옵니다.
1년에 잘해야 한두 번 만나는 게 고작이지만, 30년 동안 이어진 그와의 교우(交友)에서
“저거는 좀 고쳐야 해”, “저 점이 부족하구나.”하고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때때로 지쳐 있긴 했지만, 매번 더 넓어져 있었고 더 깊어져 있었습니다.

신 교장이 화를 내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어도 잠깐 얼굴에 스치고 단정적인 말투로 바뀔 뿐입니다.

오지 마을의 작은 중학교 평교사로 출발한 그는 교장이 된 후, 200억 가까이 되는 돈을
유치하여 기숙학교를 세우고 전국의 말썽꾸러기들을 모아 가르치고 있습니다.
입학 기준은 그 학생이 얼마나 절망적인가 하는 것입니다.
학생 대부분이 흡연자인 그 학교에 흡연 장소가 따로 설치되어 있고,

그곳으로 가려면 교장실 앞을 지나가야 합니다.
신 교장은 담배를 피우러 가는 학생들에게 유리창 너머로 손을 흔듭니다.
그리고 웃으며 말합니다.
“아이고 저 놈들......”
학생들을 바라보는 신 교장의 눈에는 사랑이 가득합니다.

시골 아주머니같이 생긴 신 교장은 수줍음이 많은 사람입니다.
남에게 손 벌리는 일과 아쉬운 소리 하는 것을 제일 못 합니다.
매번 누가 밥값을 내느냐로 다투는 데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습니다.
그런 신 교장이 그 오지에 재단과 지자체로부터 그 엄청난 돈을 끌어들일 수 있었던
유일한 힘은 ‘학생 사랑’입니다.

이화재단이 설립한 그 학교의 선생님들은 모두 독실한 기독교인입니다.
음주와 흡연을 죄악시하는 선생님들과
말썽쟁이 학생들이 매번 부딪히는 것은 흡연문제였습니다.
선생님들은 흡연하는 학생들을,
시작부터 신앙적으로는 죄인, 교육적으로는 문제아 취급을 하였습니다.
이 부동의 고정관념은 선생님들을 감시자로 학생들은 반항아로 만들었고,
신뢰 대신 들어앉은 반감으로 인해 교육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습니다.

신 교장은, 학생들을 받아들인 목적은 금연이 아니라 변화라고,

완고한 재단과 선생님들을 설득하며 흡연을 자율화하였습니다.
3년 동안 같은 담임선생님과 함께 웃고 울며,
말썽꾸러기 아이들은 변화되고 성장하여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납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신 교장의 최강점은,

“사랑을 통한 변화”라는 대원칙을 철저히 지키며
그 원칙 아래 모든 일을 결정한다는 점입니다.
거기서 벗어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어떤 반대와 어려움이 있어도, 지치고 힘들어도 그 원칙에 충실합니다.
그런 신 교장을 보노라면 가슴 밑바닥에서 새 힘이 솟아오르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제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그래 나도 저렇게 가자.”

그 바쁜 와중에도 동네 부녀들에게 장구를 가르치고, 해금, 색소폰 등을 열심히 연습합니다.
그는 조기 은퇴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정태기 교수님이 더 늙기 전에
그 밑에서 상담을 배워 남은 인생을 문제 청소년 상담을 위해서 사용하기 위함입니다.
그런 친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롬14:18)

그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존경을 받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로망입니다.
우리 모두 그런 사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로마서 14장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흡연 문제와 본질상 같습니다.

각 종교마다 금기 사항이 있습니다.
불교도는 육식문제, 유대교와 회교도는 돼지고기 문제,
기독교인들은 음주 흡연문제 등등입니다.
어디서는 가한데, 다른 데서는 불가합니다.
또한 교단마다 차이가 납니다.
제가 근무했던 미국 교회는 대단히 보수적인 교회인데

흡연실이 따로 있고 복도에 재떨이가 놓여 있습니다.
그 교회에서는 흡연은 자유로운데 음주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했습니다.
음주에 대해서는 엄격한데,
예수님께서도 마셨다면서 포도주는 허용하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이렇듯 다릅니다.
그런데 포인트는 무엇을 먹고 마시는가 하는 문제가 기독교 교파에 따라 신앙의 근간을
흔드는 중요한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수많은 논쟁을 야기합니다.

먼저 로마 교회에서의 문제는 무엇이었는지 알아봅시다.

당시 시중에서 파는 육류들은 거의 모두 이방신들에게 바쳤던 것입니다.
신전에서 빼돌린 것은 아닙니다.
경제 시스템 자체가 그랬습니다.
바친 제물 중 제사장 몫은 시장에 내다 팔아 생활비로 썼습니다.
그런데 이 고기가 문제를 일으킨 것입니다.
이방신에게 바쳤던 고기를 먹을 때 신앙에 거리낌을 느낀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제사 때 사용한 과일은 아래 위가 조금씩 잘려 있는데, 어린 시절 옆집에서 제사를 드리고 난
그런 과일을 우리 집에 보내오면 어머니는 먹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어릴 적 교육이 무서운지라, 요즈음도 그런 과일을 먹을라치면 다소 꺼림칙합니다.
그와 똑같은 것입니다.

자, 그런 고기를 자유로이 먹는 사람과 먹지 않는 사람 중 누구의 신앙이 더 좋은 것일까요?
언뜻 생각하면 먹지 않는 사람의 신앙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반대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롬14:2)
가리지 않고 먹는 사람의 믿음이 더 좋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러셨습니다.
유대교에서 금하였던 음식들을 거리낌 없이 잡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바리새인들은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자”(마11:19)라고 비방하였습니다.
‘포도주를 즐기는 자’란 ‘술주정뱅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말은 음주 흡연하는 교인들에게는 최고의 면죄부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다음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롬14:3)

한 기독교 잡지사에서 목회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교회에서 문제를 잘 일으키는 사람은 누구인가?”였습니다.
1위 40일간 금식기도한 사람.
2위 철야기도 잘하는 사람.
3위 신학 공부한 장로였습니다.
금식기도, 철야기도, 신학공부 모두 신앙 성장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신앙성장을 위해서 쓰지 않고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데 사용함으로 문제를
일으킵니다.

지난주에는 권세자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음식에 관한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목적은 하나입니다.
본질을 정확히 알고 비본질에 휘둘리지 말고 위축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명확히 인식하고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이란,
내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하면서,
연약한 이를 도와 그들도 그렇게 성장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스캇 펙 박사의 “아직도 가야할 길”에서,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은 “사랑”이라고 규정하면서,
사랑을 “타인의 정신적 성장을 도와줄 목적으로 자기 자신의 경계를 확장해 나가는 시도”라고
정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통해 내가 성장하고,

나아가서 성장한 내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상대방을 성장시켜나가는 것,

“생명을 얻게 하고 그 생명을 더욱 풍성케 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입니다.

우리나라 초대교회 때는 음주와 흡연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들이 보기에 너무나 사회적으로 가정적으로 폐해가 컸습니다.
그래서 금지하였고, 그것이 한국 기독교의 전통으로 굳어졌습니다.
권장하자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영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며, 믿음과는 관계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고전10:23-24)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은 각각의 존재 목적과 이유가 있습니다.
그 창조의 목적과 존재 이유를 잘 알고 창조 목적에 따라 잘 사용해야 합니다.
오용하고 남용해서는 안 됩니다.
모르핀이 있습니다.
남용하면 그 무엇보다도 나쁜 마약이 됩니다.
그러나 모르핀이 없다면 수술할 때 생살을 찢어야 합니다.
뭐든 같은 원리입니다.

건강과 안녕을 위하여, 나아가서는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 실족하지 않도록

스스로 금하고 절제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롬14:13)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롬14:21)

사도 바울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연약한 사람을 위한 배려입니다.

‘배려’는 21세기의 화두입니다.
성공을 향한 무한경쟁에 내몰린 현대인들에게 돌아온 것은,

성공이 아니라, 좌절과 극심한 피로감입니다.
한상복 씨가 쓴 “배려”라는 책에서는 ‘진정한 성공은 배려하는 사람의 것임’을 피력합니다.
남을 위한 배려가 곧 내 자신을 위한 배려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들의 삶의 자세를 경쟁에서 배려로 전환할 때 못 보던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배려에 얼마나 목이 말랐는지,
한상복 씨의 “배려”를 2006년 올해의 책으로 선정할 정도였습니다.

성공하고 싶습니까?
경쟁심을 버리고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경쟁심은 비판과 반목만 증대시킵니다.
반면 배려는 평강과 희락을 증대시킵니다.
단순히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수많은 무리들이 좇았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흘간이나 계속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영적 갈급은 배고픔을 능가했습니다.
그러나 장소는 광야, 음식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때 한 꼬마가 물고기 두 마리와 다섯 덩이의 떡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배고픈 사람들을 위한 배려였습니다.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장정만 5,000명, 그들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무엇이든 배려의 마음으로 행하면 성공합니다.
퍼주고 망한 가게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롬14:17-18)

본질이 아니면 관용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비본질적인 것에 집착하다가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식물로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도 이 땅에 함께 임했습니다.
현재 우리가 사는 이 땅은 불의와 부조리가 가득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임한 하나님 나라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 땅에서 불의와 부조리를 이기고 하나님 나라를 사는 길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죽음 너머 하나님 앞에서 완성됩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너무나 많은 문제가 있고, 그 해결 방법이 없어 보입니다.
부족해서 힘들고, 이루지 못해 안타깝고, 없어서 낙담합니다.

제 자신을 들여다봅니다.
별로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그다지 욕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궁금한 것도 별로 없고 안타까운 것도 별로 없습니다.
집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는 것은 이만하면 충분합니다.
차는 굴러가면 되고 집은 비가 새지 않으면 됩니다.
그런데 행복하지 못합니다.
누구의 탓도 아닙니다.
제 기질 탓입니다.
죽어서도 여전히 이 우울 모드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옥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만드시고 나의 체질을 아시는(시103:14)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장차 나를 완성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당하고 있는 일, 경쟁에서의 승리,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며 무엇을 입을까 하는
의식주의 일에 코를 박고 사시지 마십시오.
눈을 들어 하늘을 보고, 예수님의 가르침과 격려를 상기하시며 그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십시오.
연약한 사람들을 위하는 일들이 바로 화평의 일이요, 서로 덕을 세우는 일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소망이 있는 이유는,
나를 누구보다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살아계시며
그분께서 생명의 길을 가르쳐주셨으며,
그 길을 가노라면 언젠가는 주 앞으로 가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완성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전1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