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은혜를 은혜 되게하라 (로마서 11:1-12)

새벽지기1 2018. 1. 19. 12:12


예수님은 서른 살에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3년을 제자들과 사람들을 가르치시다가 하늘로 떠나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사시는 분인데,
그냥 계속해서 가르치시지 뭣 하러 하나님 곁으로 가버리셨을까요?

예수님께서 떠나신 데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도마에게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
또한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그런 믿음을 갖기를 예수님께서 간절히 원하십니다.

최근 모 목사와 그 가족들은 자신들의 횡령 조사에 곤혹을 치르자 다른 곳에 개척을
하겠다고 엄포를 놓았고, 들고 일어났던 사람들이 쏙 들어가 버렸습니다.
횡령 또는 유용 액수가 최대 2000억 원이나 된다고 합니다.
자신들이 낸 헌금을 그렇게 하였는데도 그를 따라 나간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를 혼란과 실족과 비판으로 바꿔버렸습니다.

얼마 전, 제가 없어지면 우리 교회도 없어질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이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저는 빨리 없어져야 합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십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저는, 저를 따르라고 가르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따르도록 만드는 것이 저의 임무입니다.
예수님이 아닌 자신을 따르라고 가르쳤다면 그 목사는 가장 크게 실패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그 말썽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끈 모세를,
먼발치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게 하신 후 데려가셨습니다.
가나안이 하나님 나라가 아닌, 모세 왕국이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겸허히 감사하며 받아들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왕국을 세우려고 애를 씁니다.
세우지 못하면 좌절하고 끓탕하고 합리화하고 변명하는 데 생명을 탕진하고,

세웠으면 한사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화하려고 듭니다.
또 한편으로는 누군가를 맹목적으로 추종합니다.
이처럼 심각한 정신분열증은 없습니다.
우리들은 그 대열에서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초대 교회 때로 돌아가 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승천하신 후,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시면서

기독교는 폭발적인 부흥이 일어났고,

이어서 유대인들의 박해가 시작되고 스데반 집사가 최초의 순교자가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박해를 피해 다른 도시로, 외국으로 피난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예수님의 복음이 예루살렘을 넘어 세상으로 전파되는 계기가 됩니다.

사람들은 두려움으로 집과 재산과 터전을 버리고 예루살렘을 떠났지만,
하나님께서는 초대교인들을 그렇게 세상으로 흩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만사를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셔야 합니다.
고난 가운데 있습니까?
그 고난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내려다보십시오.
살 길이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더 좋은 길로 인도하시려는 것입니다.

이들은 다른 나라, 다른 도시에 가서도 예수님의 복음을 열심히 전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 믿는 내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라며 예수님과 복음을 의심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여전히, 아니 더욱 더 예수님과 복음을 굳게 붙잡았다는 뜻입니다.

그 결과를 성경은 이렇게 전합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행 11:21)

그렇게 해서 안디옥 교회가 세워집니다.
안디옥 교회는 대단히 중요한 교회입니다.
첫째는 특정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생적인 교회입니다.
둘째는 이방 지역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입니다.

안디옥은 예루살렘 동북쪽 400여 킬로 떨어진 도시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그 소식을 듣고 바나바를 보냅니다.
바나바는 지중해 한가운데 있는 섬 구브로, 오늘날의 키프로스 출신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순례를 왔다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고향 땅을 팔아 교회에 바치고
열심히 주의 일에 전념하는, 가장 존경받는 교회지도자 중 한 사람입니다.
바나바는 사도들의 결정에 기꺼이 순복했습니다.

안디옥에 파견된 바나바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다소로 가서 바울을 만나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바울은 회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바울은 최고의 열심으로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던 사람이었기에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그를
의심하며 멀리하던 때에, 바나바는 바울의 재능과 열성을 알고 그를 찾아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안디옥까지는 400킬로,
거기서 북서쪽으로 다소까지는 150여 킬로미터입니다.
모두 걸어서 가야하는 길입니다.
보수를 받고 하는 일도 아닙니다.
바나바가 바울을 찾아간 것은, 오늘날로 치자면, 큰 교회 목사가 수백 킬로를 걸어서
시골 전도사를 찾아간 것과 같습니다.
왜요?
오로지 예수님의 복음 전파를 위해서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전합니다.
“바나바가 바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 11:25-26)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공식 명칭이 생겼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스스로 붙인 명칭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그들의 삶은 특별했고,

기독교인들의 자기 정체성은 분명해졌다는  뜻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만드는 데 총력을 기울였고,
그들은 가르침대로 변화하여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에는 다섯 사람의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바울이라.”(행 13:1)

바나바와 바울 외에, 세 사람은 누구일까요?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 ‘니게르’라는 단어는 ‘니그로’, 즉 흑인을 뜻합니다.
시므온은 북아프리카 출신입니다.
안디옥에서 2,000킬로미터쯤 떨어진 구레네 사람입니다.
루기오도 구레네 사람.
바나바는 오늘날의 키프로스 섬인 구브로 출신.
바울은 다소 출신.
마나엔은 헤롯 왕과 아기 때부터 같은 젖을 먹고 커온 예루살렘 귀족출신입니다.

이들은 인종, 출신, 성분, 배경 모두 다른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오늘날의 목회자들이나 장로가 아닙니다.
우리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와 같은 사람들, 평신도 지도자들입니다.
그런데 한 마음으로 안디옥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특정인이 아니라, 전심전력으로 오직 예수님을 닮고 따르는데,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아닌, 예수님을 따르게 하는 데만 집중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 다섯 명이 함께 모여 금식하며 기도할 때 이들에게 성령께서 임하십니다.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바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행 13:2)

그래서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세웠습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바나바와 바울을 가장 높은 자리에 앉히시려는가 봅니다.
그런데 예상을 완전히 뒤집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행 13:3)

바나바와 바울을 어디론가 보냈다는 것입니다.
어디로 보낸 것일까요?
실루기아, 구브로를 거쳐 살라미 등지로 보냈습니다.
목적은 복음 전파.
이것이 사도 바울의 1차 선교 여행입니다.
선교 여행의 거리는 2,000킬로도 넘습니다.

이때 일을 오늘에 비유하면 이런 것입니다.
담임목사가 몇몇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고 있는데 성령의 감동이 왔습니다.
담임목사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이 담임목사에게 말합니다.
“우리 교회에서 목회를 그만두시고 선교하러 떠나십시오.”
그러자 담임목사가 “예, 알았습니다.”하고 떠났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그럴 목사가 과연 있을까요?
난리가 날 것입니다.

당시 성령께서 다섯 지도자가 모두 들을 수 있게 말씀하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명확한 증거도 없습니다.
그런데 바나바와 바울은
그들의 결정을 하나님의 결정으로 알고 기꺼이 그 멀고도 위험한 길을 떠났습니다.

저는 안디옥 교회 이야기를 읽으며 정말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설교를 하지 않는 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사라집니다.
평신도 교사 분들이 가르치는 성경공부반 참여율이 저조하다는 소리와 함께,

목회자가 가르쳐야 한다는 소리도 가끔 들려옵니다.

요즈음
다른 사람에게 교회를 맡기고 저는 청주에 집중하면서 그곳 교회를 살리고 싶습니다.
목자 없는 양의 마음이 무엇인지 요즈음 알겠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랬다가는 우리 교회가 어떻게 될까요?
또한 청주 교인들의 엄청난 의존도에도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새 신자도, 청년들도 돌봐야 하는데.
우리 교회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사회적 기업도 해야 하는데...... 이 일을 어쩌나.
그런데 믿고 맡길만한 사람 찾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기도가 절로 나옵니다.

“이제는 다른 목사의 설교를 들을 수가 없어요.”라는 말을 간혹 듣습니다.
칭찬이 아닙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듭니다.
절망감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즐겁게 하려거나 여러분들의 평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지 여러분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닮으라고,
그래서 변화되어 신나고 보람 있고 풍성한 삶을 살라고 설교하는 것입니다.

교회 부흥은 한 세대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슬픕니다.
우리 교회가 그저 그런 교회라면 없어져도 아무 상관없습니다.
하나님 복을 팔아 목회자들 밥벌이 하는 교회,
기여 좀 했다는 목소리 큰 사람들이 좌지우지 하는 교회,
목회자가 고용인으로 전락하는 교회,
힘 있는 사람이 대우받는 교회라면 지금 없어지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교회는 헤게모니 싸움판, 정치판이 아닙니다.
주님의 몸입니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맡기신 일을 더불어서
함께 열심히 기쁨으로 행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어떤 길을 갔을까요?

디오클레시안 황제의 박해 때 수많은 순교자를 냈습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는 모든 역경과 환난을 이겨내고 200여 년 지나면서 안디옥 학파를
형성하여 바질, 크리소스톰 등 많은 걸출한 학자들을 배출하였습니다.
공부하는 교회였습니다.
오늘날의 신학이 안디옥 학파 출신 학자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
350년이 지나면서 안디옥 시 전체 기독교화 되었습니다.
국가와 사회에도 좋은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그 후 500년 정도 잘 성장했습니다.
그러다가 네 차례의 지진과 페르시아의 공격에 의해
도시자체가 몰락하면서 안디옥 교회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500년 가까이
예수님께서 맡기신 일을 열심히 수행한 교회는 안디옥 교회 외에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맡은 일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시므온과 루기오와 마나엔과 같은 사람, 바나바와 바울과 같은 지도자들이
많이 나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님 마음으로 가르치고 봉사하고 돌보고 맡은 일을 담당하여, 그 사람들의 의견이라면
예수님의 뜻으로 알고 따를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셔야 합니다.

성경 교사들을 존경하고 함께 열심히 공부하십시오.
자신의 주장을 펴지 마십시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늘 생각하십시오.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도울까 늘 생각하십시오.
그때 은혜에 은혜가 더해집니다.

바나바와 바울을 비롯한 안디옥 교회 사람들이 보여준 것은
“은혜를 은혜 되게” 한 것입니다.

은혜를 은혜 되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은혜를 은혜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면 그 답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과 구원을 받았습니다.
은혜란 거저 주어진 하나님의 복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택함 받은 은혜를 선민의식으로 바꿔버렸습니다.
선민의식은 반드시 우월감을 낳습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신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이것이 모 교회 원로 목사가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입니다.
그 큰일을 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택하신 증거로 내세웁니다.

목사가 된 것 자체를 택함 받은 증거로 내세우는 목사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롬 11:8)는
사도 바울의 말이 금방 이해가 됩니다.

되돌아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던 것이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문제 많고 갈 길 모르는 우리들을 불러주시고 깨닫게 하시고 가게 하셨습니다.
또한 많은 일들을 이루셨습니다.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 마음을 절대로 잃지 않기로 합시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맑은 심령과 하나님의 경륜을 보는 눈과 하나님의 지혜를 듣는 귀를 갖게 합니다.
은혜는 더 큰 은혜를 낳고 더욱 풍성한 인생으로 영광 돌리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엘리야 이야기를 거론합니다.

엘리야는 갈멜 산에서 홀로 왕과 왕비 그리고 바알 제사장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 제사장 사백 인과 싸워 당당히 이긴 사람입니다.
그런데 왕비 이세벨의 반격에 의해 광야로 도망치는 신세로 전락합니다.
광야 로뎀나무 아래서 하나님께 하소연합니다.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자 칠천을 남겨 두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이란 기복신앙을 거부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기복신앙은, 좋은 일은 하나님의 축복 나쁜 일은 하나님의 징계라고 믿게 만듭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생각 없는 단세포 존재로 전락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고난을 통해서 임합니다.
고난을 감사함으로 감내하십시오.
나는 더 크고 깨끗한 그릇이 됩니다.
그 위에 더 큰 은혜가 담길 것입니다.
그 은혜를 누리고 베푸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