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부활의 주님을 믿는 자는 (로마서 10:2~12)

새벽지기1 2018. 1. 17. 07:22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서서히 몰락해가던 제너럴 일렉트릭을 회생시키고 최고 기업으로 성장시킨
잭 웰치는 CEO들의 멘토로 많은 강연을 하였습니다.

한 강연회에서 젊은 임원으로부터, 어떻게 하면 훌륭한 리더가 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잭 웰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장은 모든 것을 알고 프로젝트를 맡깁니다. 사장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아무리
열심히 해도 탈락입니다. 사장의 의도를 알고 열심히 하면 중간입니다. 가장 잘하는 사람은 사장의
의도보다 한 발자국이라도 더 가보려는 사람입니다. 사장은 그 사람에게 질문을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나중에 리더의 자리에 앉게 됩니다.”

그저 열심히 하면 다 되는 줄 압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방향이 잘못되었으면 열심히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왜곡될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롬10:2-3)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를 모른 채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430년간 이집트의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열 가지 재앙으로 구원하시는 과정 중에 하나님께서 반복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너로 온 천하에 나와 같은 자가 없음을 알게 하리라.”(출9:14)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출10:2)

그렇게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시고 시내산 계약을 맺으십니다.
시내산 계약은,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출19:5-6)

그리고는 성막을 짓게 하시고 법궤의 중앙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겠다고 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중략)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25:22)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존재를 온 세상에 알리고,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고,
그 일을 수행할 때 필요한 모든 것을 알려주시는 가장 궁극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온 세상을 다스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늘 말씀드리지만
다스리다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라다’로 ‘돌보다’ ‘살게 하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피조물들을 돌보고 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 일을 수행하지 않고 엉뚱한 일을 했습니다.
리더의 의도를 모른 채 열심히 하면 ‘탈락’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열심히 행한 일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10:3)

자기 의를 세우는 일에 열중하였다는 뜻은 무엇일까요?
율법을 지키는 일에 몰두하였다는 것입니다.
10개의 계명을 2,134개의 율법으로 만들어놓고는 그것을 지키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의 눈에 들고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를 세운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율법을 잘 지키는 나는 이렇게 복을 받았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너희들은 그래서 고생하는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어떤 일이 생길까요?
6,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로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롬10:6-7)
번역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런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숨을 거두시기 직전에 부르짖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원치 않는 일이 생기면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다고 오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완전히 일치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정말로 예수님을 버리셨습니다.
음부로 내려가신 것입니다.
음부에서 신음하는 모든 영혼들마저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율법 준수에 골몰하는 종교 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은,
“흥, 인간이 어떻게 음부에 내려갈 수 있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그런데 자기 의를 세우는데 골몰하는 종교 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은,
“흥, 인간이 어떻게 부활하고, 또 승천할 수 있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그들은 예수님의 신성과 구원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 헤셀의 말을 기억하십시오.
“교리와 규칙과 율법과 제도로 묶인 기독교는, 인간의 영혼을 고양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살한다. 기독교는 인간의 영혼이 활활 타오르게 하는 제단이 되어야 한다.”

율법적 인간의 최대 난점은 하나님 형상의 말살과 창의력 부재입니다.
단답형 인간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율법의 줄에 매달린 꼭두각시로 만들어버립니다.

제가 어릴 때는 주일날 과자를 사면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는다고 배웠습니다.
당시 처음으로 풍선껌이 나왔습니다.
너무나 사고 싶어 헌금을 아껴서, 집에서 멀리 떨어진 가게에서 풍선껌을 샀습니다.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것은 부모님의 말씀을 거역하였다는 죄책감과 언제 벌을 받을까 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오물오물 껌을 씹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걸 버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전혀 중요하지 않은 율법을 어기게 한 풍선껌 하나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습니다.

율법은, 잘하면 교만이 하늘을 찌르고, 못하면 죄책감이 지옥까지 내려가게 합니다.
기독교의 타락은, 다름 아닌, 기독교를 의례적인 종교로 만드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가장 낮은 음부까지 내려가시고 왜 부활하시고 가장 높은 하늘로 올라가셨을까요?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 내려갔어도 가장 높은 하늘까지 올라갈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흑인 제프 핸더슨은 도둑질을 일삼아 ‘손버릇 나쁜 제프리’로 불렸습니다.
급기야 학교를 그만두고 마약 판매에 손을 댄 그는 스물네 살에 19년 7개월 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습니다.
교도소에서 그가 맡은 일은 재소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설거지, 그는 끼니마다 1,500명의 그릇을 닦았습니다.
그런데 그 설거지 일이 이상하게 싫지 않았습니다.
적성에 맞은 것일까요.
주방에서 일하면서 요리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어깨 너머로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신문에 소개된 요리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잠 못 이루기를 여러 해, 그는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말합니다.
“뜨거운 증기에 살갗이 갈라질 때, 방탕했던 예전과 지금이 비교되면서 내가 저지른 잘못들이
고통스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주방은 내 과거를 정면으로 바라보게 했습니다.”

그는 출소하자마자, 로스앤젤레스 한 식당의 접시닦이를 시작했고, 요리사 경력을 쌓기 위해
여러 곳에 입사 원서를 냈습니다.
그렇게 세계적인 요리사가 되겠다는 꿈을 간절히 매달린 결과,
라스베이거스 벨라지오 호텔 최초의 흑인 총주방장이 되었습니다.

제프 핸더슨이 예수님을 믿었을까요?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선물, 하나님 형상, 곧 개성을 찾았고 발전시켰고 꽃을 피웠습니다.
그는 어떤 그리스도인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이룬 사람입니다.
리더의 의도를 알고 보다 더 잘하려고 하는 사람이 훗날 새로운 리더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9-10)

구원을 받는 방법이 굉장히 쉬워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낳은 아들과 딸이 자동적으로 자녀가 되는 것처럼 쉽습니다.
그런데 오랜 동안 목회를 하면서 느낀 것은 영이신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받아들이는 것을
어떤 사람들에게는 거의 불가능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청년들을 교회로 초대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마당에 발을 들여놓는 것조차 거부하는 청년들도 있었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구세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도식처럼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왜 이렇게 설명하는지 거기에는 굉장히 심원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히브리적 사고는 통전적입니다.
‘믿는다’라고 할 때 몸과 마음과 행동으로 알고 바라고 신뢰하고 사랑하는 총체적인 행위를 의미합니다.
반면 헬라인들의 사고는 분석적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헬라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단계적으로 분석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믿음이 종결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행동하시는 분입니다.
성경은 단 한 번도
하나님을 철학적 개념이나 추상적 본질이나 표현되지 않는 가능성으로 제시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일해 오셨고, 오늘도 일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

행동하시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도 당연히 행동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눈여겨봐야 할 구절은 11절 말씀입니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믿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야다”입니다.
“야다”의 가장 중요한 뜻은 “사랑하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의지합니다.
그분의 뜻과 처사에 기꺼이 순복합니다.
고난도 기꺼이 함께 갑니다.
그런 사람은 절대로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합니다.

운동을 좋아하는 게리 헤빈은 젊은 나이에 헬스 클럽을 열었습니다.
번창하였습니다.
체인점을 늘려나갔습니다.
돈도 엄청나게 벌었습니다.
그러다가 과욕으로 인해 서른 살에 폭삭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실의에 빠진 게리 헤빈에게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귀에 쏙 들어왔습니다.
성경을 열심히 읽고 또 읽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잘못과 실수와 함께 소망도 보았습니다.

어느 날 팻 로버트슨이 쓴 “제3의 선택”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 책에서 성경의 열 가지 원칙을 배웠고 사업에 그대로 적용했습니다.
현재 게리 헤빈은 전 세계 40개국에 1만 개의 체인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가 적용한 성경의 원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정직과 통합성의 원칙.
절반의 진실, 교묘한 속임수,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키는 것 등은 절대로 안 됩니다.
통합성의 원칙은 속과 겉이 같은 것을 말합니다.

2. 위대함의 원칙.
이는 역설적으로 종의 도리, 섬김의 원칙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된 자를 말합니다.
“우리가 섬기면 그들이 올 것이다.”입니다.

3. 사용의 원칙.
이 원칙은 달란트의 비유에서 배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를 주셨습니다.
그것을 땅에 묻어두지 아니하고 모두 열심히 사용한다는 원칙입니다.

4. 책임감의 원칙.
많이 가진 사람은 비례하여 많은 책임을 져야 합니다.

5. 변화의 원칙.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환영하며, 능동적으로 기꺼이 변화를 시도합니다.

6. 인내의 원칙.
성공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참고 견디라는 것입니다.

7. 영적 기적의 원칙.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열심히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 기꺼이 기적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8. 상호성의 원칙.
남을 대접한대로 나도 대접을 받게 됩니다.

9. 되갚기의 원칙 등이 있습니다.
벌었으면 베풀어야 합니다.
그는 자선 사업에도 앞장을 서서 로열티의 20%를 기부하고 있습니다.

10. 마지막으로 주권의 원칙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시며, 하나님이 나를 이 땅에 보내신 이유는 하나님 나라 건설,
즉 보다 나은 세상의 건설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결론을 내립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롬10;12)

예수님을 닮아 가십시오,

내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반드시 하나님의 부요를 체험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