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남은 자는 누구일까? (로마서 9:27-33)

새벽지기1 2018. 1. 15. 11:22


최선이었어요.
...
그랬구나...
몰랐어.
미안해!

판화가 이철수 씨의 “가난한 머루송이에게”라는 시입니다.

산속을 가다가 머루를 발견했습니다.
가느다란 가지 끝에 열일곱 개의 작은 머루 알이 달려 있습니다.
겨우 요거 달았냐고 묻습니다.
머루송이가 대답합니다.
“최선이었어요.”
그 말에 말을 잃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머뭇거리며 말합니다.
“그랬구나. 몰랐어. 미안해.” (박웅현의 “책은 도끼다.”에서 인용)

산문(散文)은 여러 단어들을 나열하며 열심히 설명하지만,
몇 자의 시(詩)는 정곡을 조용히 찌르며 산문을 침묵시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은 당연히 그 깊이와 넓이에서 시는 비교조차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를 뿐만 아니라,
아무리 우리들이 열심히 느끼고 생각하고 깨닫고 설명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또 다시 저만큼 멀리 떨어져 우리에게 손짓하고 있습니다.
약을 올리시는 걸까요?
그럴리가요.
우리더러 열심히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은혜입니다.

얼마 전 한 천재가 죽었습니다.
무명의 천재입니다.
저는 그 사람을 딱 한 번 만나 이야기를 나눴었습니다.
나이는 58세.
전국의 수재들만 모이는 경기중·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17세 때 소설을 써서 신춘문예에 당선될 정도로 재능이 뛰어났습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광고회사에 들어갔습니다.
일찍이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그런데 모든 일이 제 뜻대로 되지는 않습니다.
자신만이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오해나 억울한 일도 생기고 좌절도 맛 봐야 합니다.
그럴 때마다 상처를 입었고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갔습니다.
급기야 회사를 그만두고 폐인처럼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 사람의 죽음을 보면서 올바른 인생의 지침의 중요성을 절감하였습니다.
그래도 제가 아직도 뭔가를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눈곱만한 덕이나마 끼치며 살고 있다면,
그 유일한 이유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흉내라도 내보려 했기 때문입니다.

죽으면 육체를 벗은 내 영은 무엇을 할까요?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린다고 합니다.
극락도, 무릉도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영생복락은 어떤 것일까 하는 의문과 함께, 좋다는 생각보다는 얼마나
지루할까 하는 걱정이 듭니다.
지루하다면 이미 그 어떤 곳이든 천국이나 극락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모든 상념들을 침묵시키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다른 천사가 공중을 날아가는데(중략)
모든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계 14:6)
영원한 복음, 죽어서도 모든 영들에게 여전히 힘을 발휘하는 복음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계 14:7)

영원한 복음, 그것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경배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곳에서는 하나님을 영과 영으로,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보며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숙제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벌 받을까 두려워하며 억지로 벌벌 떨며 행하지 마십시오.
바로 그것이 지옥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천국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계 21:3)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나와 함께 계신 것이 천국의 본질이며 핵심입니다.
하나님을 무섭고 두려운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천국은 더 이상 천국이 아닙니다.
그래서 천국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눈으로 보는 이 땅에서부터 영이신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며 그분과 동행하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지고한 은혜이며 최고의 행복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몇 마디 말로 하나님을 규정하려 들고,
그래놓고는 그 안에 앉아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 정도는 그래도 참아줄 만합니다.
자신이 만든 규정들을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잣대로 들이댈 때는 말문이 막혀버립니다.

T.S. 엘리어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얻기를 바랄 수 있는 유일한 지혜는 겸손의 지혜다. 겸손은 끝이 없다.”

겸손을 인간이 가져야 하는 최고의 덕목으로 꼽는 이유는, 착해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많고, 멈춰서는 순간 자신은 언어의 감옥에 갇혀 버리기 때문이며,
하나님을 향한 길을 감사하며 가게 하는 것은 겸손 외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9장은 많은 논쟁을 야기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돌이키기 거의 불가능한 잘못된 태도를 낳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최초의 선민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사실을 너무나 마음 아파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3)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이 버림을 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구원자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할까요?
절대로 아닙니다.
여전히 자신들은 하나님의 유일한 선민으로 굳게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을 여전히 잘한 일로 믿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라”(롬 9:6)는 말을 필두로 풀어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이스마엘을 버리고 이삭을 택하시고, 에서를 버리고 야곱을 택하신 사실을 들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도 얼마든지 버림을 받을 수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이어서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의미심장한 말을 합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

내가 구원을 받기 간절히 원한다고 해서, 또 구원을 받기 위해 열심을 낸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달린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더 이상한 말을 합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는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롬 9:18)

이 말씀은 굉장히 심각한 것입니다.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하나님의 존재가 믿어지지 않는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책임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강퍅하게 만드신 하나님께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게 하시고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나를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십니다.
이처럼 억울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사도 바울의 이런 설명을 들으며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아 버림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
또한 하나님의 긍휼함을 입어 이삭과 야곱처럼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구원을 받았다.
전적으로 옳은 말입니다.
그런데 심각하게 성찰해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 구원은 과연 영원불변한 것인가?
혹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후에 버림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이에 대한 정확한 답은 무엇일까요?

놀랍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내 구원은 영원불변한 것이 아닐 수 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버림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24:9-13)

환난을 견디지 못하고 시험에 빠진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나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며

하나님의 존재와 사랑과 보호를 의심하는 것을 말합니다.

서로 미워합니다.
거짓 선지자의 잘못된 가르침에 빠지기도 합니다.
불법으로 돈을 벌고 출세하자 나도 그 대열에 참여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시간이 지나면서 사그러집니다.
이런 일들을 행하면 내가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었다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내 구원도 무효가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초두에 기록된 일곱 교회에 대한 책망도
내가 예수님을 믿었더라도 얼마든지 내 구원을 잃을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마음에 새기십시오.
예수님을 믿는 것이 구원의 절대조건이긴 하지만, 절대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서 구원이 종결된 것이 아닙니다.
선물로 주신 믿음을 올바로 가꾸고 잘 견지해야 합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넘어질까 늘 경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라.”(롬 9:27)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숫자가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믿음을 올바로 가꾸고 잘 견지하는 것일까요?
다른 말로 하면, 어떻게 해야 남은 자가 될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왜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는가
그 이유를 31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히는 돌에 부딪혔느니라.”(롬 9:31-31)

‘부딪히는 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왜곡된 선민의식과 과도한 기복주의로 본질을 상실한 유대교 지도자들과
그 추종자들을 무섭게 질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며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들에게 부딪히는 돌이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보지 않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버렸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또 기독교가 존재하는 한 계속 생깁니다.

예수님을 믿고 누구보다도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
구원의 확신이 누구보다도 확고한 사람들 중에,
“저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라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게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유대교 바리새인들을 향해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고 소리치신 것처럼,
차마 입 밖으로는 그렇게 하지 못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들은 가장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 중에 혹시
신앙생활에 있어서 “나는 괜찮아. 나는 잘 하고 있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습니까?
얼른 그런 마음을 버리셔야 합니다.
일상생활에서도 문제지만, 신앙생활에서는 가장 경계해야 하는 나쁜 태도입니다.
바로 그런 태도가 부딪히는 돌에 부딪혀 넘어지게 합니다.

제 스스로에게 늘 다짐하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잘했다고 생각하지 말자.
더욱 잘 하려고 노력하자.
절대로 생색내지 말자.
그럼에도 자만과 생색은 시도때도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옵니다.

내가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면 생색을 내게 마련이고, 그 사람의 표정이 달라집니다.
먼저 웃음이 사라집니다.
언제나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라기 때문에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하는 양 태도가 비장해집니다.

서울 지하철 7호선에는 짜증과 피로를 단번에 날려버리는 목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저출산 시대에 임산부는 국가 유공자입니다. 옆에 임산부가 있으면 자리를 양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냥 배가 나온 분도 귀엽게 여겨 자리를 양보하셔도 괜찮습니다.”

“두고 내리신 물건은 무임승차 죄목으로 유실물 센터에 갇히오니 면회 가는 일 없도록 물건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붕어빵을 들고 귀가하시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오늘은 댁에 통닭을 사가시는 건 어떨까요?”

이런 즐거운 방송으로 웃음을 주는 이는 민병준 기관사입니다.
그가 말합니다.
“서울에 처음 왔을 때 표정이 없는 곳이라고 느꼈습니다.

이를 바꿔 보고 싶은 작은 소망에서 시작했습니다.”

민병준 기관사에게 일터는 즐거운 곳입니다.
그는 어떤 멘트로 승객들을 즐겁게 할까 늘 준비할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더 좋은 말씀을 더 설득력 있게 전할까 고심하는 저처럼.)
그에게 기관실 마이크는 저에게 설교단과 똑같습니다.
자신도 승객들도 더욱 즐거워질 것입니다.
다른 많은 기관사들은 격무에 시달리며 힘들어합니다.
그러나 그에게 격무는 이겨내야만 하는 환난이 아닙니다.
민병준 씨는 많은 기관사 중에 몇 안 되는 “남은 자”입니다.

겸손하십시다.
무엇을 하든 조금 더 잘 하려고 합시다.
그리고 세상 그 수많은 길 중에 마땅히 가야 할 길, 유일한 생명 길을 열어주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늘 감사합시다.
그 길을 여시고 어떻게 가야 하는지 가르쳐 주신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느니라.”(롬 9:23)

인간의 마음은 늘 억울하고 강퍅하게 마련입니다.
그런 나를 그냥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긍휼히 여겨주셨습니다.
너무나 감사한 일입니다.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푯대를 향해서, 천성을 향해서 열심히 가노라면,
환난은 언제 왔다 간 줄도 모르고, 내 그릇에는 어느새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담겨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