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우리는 넉넉히 이기느니라 (로마서 8:33-39)

새벽지기1 2018. 1. 12. 10:19


작년 여름 양성윤 씨는 초등학생 아들과 함께 영국을 여행하던 중,
우연히 프리미어리그 풀햄에서 하는
어린이 축구 학교의 단기 축구 프로그램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평소 축구라면 껌뻑 넘어가는 아들은 흥분해서 방방 뛰었습니다.
학부모를 초대해서 경기를 하고 수료증을 준다기에 양성윤 씨는 부랴부랴 축구장에 갔습니다.
아들은 열심히 뛰어다니며 영국 아이들에게 말을 걸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영국 아이들은 상대를 해주지 않았고, 그런 아들의 모습이 안쓰러웠습니다.

골키퍼를 맡은 아들은 경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네 골이나 먹었고, 그러나 아들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르긴 했어도 전혀 기죽지 않고 소리를 질러가며 경기에 임했습니다.
아들은 경기 내내, 또 경기가 끝나고도 영국 아이들에게 서툰 영어로 열심히 말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심드렁한 영국 아이들은 들은 척 만 척하였습니다.
아들이 얼마나 무안하고 좌절감을 느낄까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요한아, 왜 애들에게 계속 말을 걸었어? 자기네끼리만 친하고 너한테는 별로 말을 안 하던데?”
그러자 아들이 대답했습니다.
“엄마, 애들은 원래 그런 거야. 좀 있으면 다 친해져.”

한국에 돌아온 후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들이 전교 부회장 선거에 출마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낙선의 쓴맛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학교 음악제에 나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너 왜 자꾸 엄마 아빠에게 얘기도 안 하고 혼자 일을 벌이는 거야?”
그러자 아들이 대답했습니다.
“엄마, 그냥 해보는 거예요. 그러면 안 돼요?”
나중에 전해들은 이야기인데 아들이 부회장 후보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시도도 해보지 않고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나쁜 실패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을 듣고 양성윤 씨는 웃음이 나왔고, 또 눈물도 나왔습니다. 그것도 많이.

참고로 양성윤 씨는 “세계로 가는 아이들”이라는 단체의 대표입니다.
아들 요한이야말로 세계로 가는 아이들의 대표 주자입니다.
요한이가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뭐가 될 것 같지 않습니까?
반드시 그럴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인생을 살면서 우리들이 당해야 하는 것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어떻게든 피해야 할 것들이며, 피하지 못해 당하게 되면 내 인생이 망가진다고
생각하는 것들입니다.

사람들이 사는 모습들을 살펴보십시오.
인생을 권투경기로 치자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사코 도망 다니거나 어쩔 수 없는 의무 방어전만 치르다 끝납니다.
당당히 맞서서 싸우는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런데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인생의 풍파에 당당히 맞서는 사람치고 제대로 살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다 압니다.
아는데도 하지 않는 우리들을 보시면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는 얼마나 답답해하실까요?

로마서 8장처럼 하나님의 자녀에 대해서 자세히 명확하게 설명한 곳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 곧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고,
“너는 하나님의 자녀로 창조되었다.”고 하시면 “아멘”으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이 자체가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그 엄청난 여호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며
가장 친밀한 관계를 맺습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전지전능하면서도 누구보다 사랑이 넘치는 예수님과 우리를 공동상속인으로 묶어주셨습니다.
그 어떤 아픔과 실패도 예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또한 모든 사람들 중에 맏아들로 삼아 두 배의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만으로도 족한데, 장차 반드시 영화롭게 만들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장은 멈출 줄 모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 하시겠느뇨?”(롬 8:32)
은사란 거저 주시는 능력과 재능입니다.
그런 능력과 재능을 모든 이들에게 아끼지 않고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더 있습니다.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

이것이 하나님 약속과 축복의 마지막 보증입니다.
우리들이 살다가 죄를 짓습니다.
잘못합니다.
계속 잘못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징계하시려는데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이 간청합니다.
“아버님,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해보겠습니다.”
바로 그런 뜻입니다.

참으로 물샐 틈 하나 없는 완벽한 복을 보장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묻습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정말 우리를 대적할 존재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또 묻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또 묻습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또 묻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없습니다.

하나님 다음으로 강력한 존재가 사탄입니다.
사탄도 하나님의 자녀를 송사하지도, 정죄하지도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는 더더군다나 끊을 수 없습니다.

이보다 더 완벽한 보장은 인간의 머리에서는 절대로 나올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생각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더할 수 없이 완벽한 하나님의 보장도 한순간에 무력해질 수가 있습니다.
바로 내가 받아들이지 않을 때입니다.
내가 거부하면 하나님께서도 강제로 밀어붙일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둘도 없는 사랑을 받는 우리 모두 제발 어리석지 않기로 합시다.
그리고 어떤 처지에 있든지 다시 시작해 보기로 합시다.

한 라디오 방송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김칠성(가명)씨는 아기 때 고아가 되었습니다.
닥치는 대로 살면서 40대 중반에 전과도 많아졌고, 조폭의 소두목이 되었습니다.
수시로 드나드는 감옥에서도 계속 난동을 부리다가 종종 독방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독방에서 철 지난 신문을 읽게 됩니다.
거기에는 60대 할머니가 대학에 들어간 기사가 있었습니다.
늦은 공부에 대한 질문에 대해, 그 할머니의 대답은, “언제 기회가 올지 모릅니다.
기회가 오면 잡으려고 대학에 들어왔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칠성 씨는 정신이 멍해졌습니다.
얼마 후 심한 악취에 정신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몸에서 나는 것이었습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것인데, 자신의 몸과 마음과 영혼까지 썩어 들어간다는 것을 절감했고,
칠성 씨는 인생을 다시 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감옥에서 공부에 매진하였고 중학교,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거쳐 대입자격까지 얻었습니다.
출소하는 날 부하들이 마중 나왔지만 단호히 뿌리쳤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채소장사, 과일장사, 고구마장사, 붕어빵장사 등등 안 해본 게 없습니다.
대학까지 졸업하고 한 병원의 사무장까지 되었습니다.
그런데 병원의 비리를 도저히 묵과할 수가 없었고, 사표를 냈습니다.

제가 들은 것은 거기까지입니다.
칠성 씨가 그 후 어떻게 사는지 알지 못하지만 절대로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이런 보장을 해주셨을까요?
예수님을 믿으니 기특해서?
놀고먹으라고요?
절대로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하나님의 장자로서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 피조물들의 탄식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주목해야 할 구절이 있습니다.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롬 8:20)

허무에 굴복하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참 자녀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자연이나 사람들이나 허무에 굴복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자꾸 주저앉습니다.
부모인 내가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탐욕과 부패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치가들의 책임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환난과 곤고와 핍박과 기근과 적신과 위험을 한사코 피하려고만 하며, 그저 자기 한 목숨만을
위한 의무 방어전만 치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일간지 전면 광고에서
“새로운 창조 공간에 대한 모색과 성찰”이라는 큰 글씨가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책 제목은 “변방을 찾아서”였습니다.
저자는 신영복 교수입니다.
책 내용은 그저 그랬습니다.
하지만 그 책을 통해 하고자 하는 말은 남다른 것입니다.

“변방과 중심은 결코 공간적 의미가 아닙니다. 낡은 것에 대한 냉철한 각성과 그것으로부터의
과감한 결별이 변방성의 핵심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중심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도로 보내라고 합니다.
그래서 중심으로 모여들어 서로 죽고 죽이는 경쟁을 합니다.
그런데 중심은 이미 낡은 것입니다.
진짜 소망은 변방에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출발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땅으로” 가는 것입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은 안전한 곳으로,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땅은 미지의 세계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저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생각입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의 중심은 ‘나’입니다.
내가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그러면서도 욕심은 얼마나 많은지는 내가 제일 잘 압니다.

낡은 것에 대한 냉철한 각성과
그것으로부터의 과감한 결별이 변방성의 핵심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어서 말합니다.
“그러므로
변방이 창조공간이 되기 위한 결정적인 전제는 중심부에 대한 콤플렉스를 없애는 것입니다.”

미국 아이다호는 감자가 주생산품입니다.
대량 구매 소비처는 맥도날드와 같은 패스트 푸드점과 레스토랑이 전부였습니다.
감자 생산업자들은 몇 안 되는 소비처를 놓고 박 터지게 싸웠습니다.
한 농부가 생각했습니다.
“과연 소비처가 거기 외에는 없는 것일까?”
그리고 만든 것이 감자칩입니다.
얼마나 많은 종류의 감자칩이 있는지 셀 수 없습니다.

기존 농부들은 거기밖에는 없다는 ‘빈곤의 심리’에 묻혀 있었고,
그 농부는 얼마든지 소비처가 있을 수 있다는 ‘풍요의 심리’로 살았습니다.
그 농부는 다른 사람들까지도 살려낸 생명의 리더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소원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면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가?”
세상의 부조리와 불의에 대한 책임은, 하나님이 아닌,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진작에 세상 문을 닫으셔야 했는데 오래 참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될 것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불평하지 말고 한탄하지 말고 끓탕하지 말고 내가 그 곳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을 무서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와 보호를 굳게
믿고 맞서라는 것입니다.

존 우드가 말합니다.
“세상을 바꾸는 데는 그렇게 큰 힘이 필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결론을 내립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사망, 생명, 천사, 권세자, 현재 일, 장래 일, 능력, 높음, 깊음 등 우리들이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은 낡은 것들입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에 이미 있었던 것들입니다.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요?”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은 에스더가 말합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그리고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러자 불쌍한 바벨론의 노예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났습니다.

탄식소리가 들려오는 모든 곳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가 반드시 가야 할 곳들입니다.
거기에는 새로운 사명, 새로운 직업, 새로운 하나님의 광활한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상을 향해, 인생이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들이 보여주기로 합시다.

잊지 마십시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미 이기었노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 뒤에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가,

내 옆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는 하나님의 영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