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전국적으로
어버이 주일로 지키는 날이라 교회마다 부모님께 효도하여 복 받은 이야기로 가득할 것입니다.
조선시대의 통치이념은 충(忠)과 효(孝)였습니다.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백성들이 이를 열심히 행할 때에 나라가 튼튼해져서 만세(萬歲)를 누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선은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백성들이 충과 효를 열심히 시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라가 망한 것입니다.
나라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를 등한히 했기 때문에 조선이 멸망한 것일까요?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십계명 중 다섯 번째 계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오 계명은 세상의 효도를 명령하신 것일까요?
오 계명과 효사상과 같은 것이라면 오늘 각 교회에서 행해지는 효도하여 복 받은 이야기들은,
효를 강조하는 유교 강의가 될 것입니다.
효도 강조와 충돌하는 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을 당연히 공경해야 하겠지만,
예수님께서는 부모 형제를 버리지 아니하고는 예수님을 좇을 수 없다고 하셨고,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따르겠다는 사람들에게는,
죽은 자들로 죽은 자들의 장례를 치르게 하고 예수님을 따르라고(마 8:22) 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유교의 효사상과는 크게 충돌하는 것이고, 그래서 유교 국가였던 조선에
기독교가 전파되는데 큰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불효해도 된다는 뜻은 절대로 아닙니다.
분명 부모에 대한 공경을 십계명에 포함시키신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을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깊은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오히려 하나님의 계명에 의해서 낭패를 볼 수도 있습니다.
마치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사람들은
그 눈을 빼버리라는 말씀을 오해하여 자신의 눈을 상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효도를 해야 내가 잘 되고 오래 오래 잘 산다는 것입니다.
많이 무너지긴 하였지만 어떤 면에서는 가족들에 대한 집착은 더 강해졌고,
자기 식구 챙기기는 이기적인 것이라 오히려 사회와 국가에 해로울 정도가 되었고,
기독교의 제 식구 챙기기는 급기야 사회로부터 따돌림을 받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요즈음 큰 문제가 되는 ‘피터팬 증후군’이나 ‘신데렐라 콤플렉스’는, 정신병리 현상으로
그 원인은 부모들의 자녀에 대한 과도한 집착입니다.
오 계명으로 자식들에게 효도를 강요하여 자식들의 집착을 정당화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또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6)
이 말씀을 잘못 적용하여 크게 망한 예가 있습니다.
유난히 자식에게 집착하는 장로 부부가 있었습니다.
자녀가 넷이었는데, 특히 장남을 과잉보호하며 싸고 돌았습니다.
그런데 그 애지중지하던 장남에 의해서 그 많던 재산이 탕진되고,
그나마 남아있던 작은 아파트도 둘째 아들에 의해서 날아가 버렸습니다.
노부부는 시골 임대 아파트에서, 미국에서 사는 딸이 보내주는 돈으로 연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권사님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그래도 우리 장로님은 자녀들에게 큰 소리 한 번 내지 않으셨어요.”
자녀들을 큰 소리로 노엽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깊은 뜻이 무엇인지 모른 채, 그저 그 계명을 따르면 복을 주신다는 착각 때문입니다.
덕(德, virtue)에 해당되는 헬라어가 두 가지입니다.
‘아레테(arete)’와 ‘디카이오수네(dikaiosune)’입니다.
이 두 단어는 본질상 큰 차이가 있습니다.
아레테는 인간 자체의 능력과 성취를 강조한 반면,
디카이오수네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시합니다.
즉 “내가 열심히 효도해서 나는 옳고 의로워서 하나님으로부터 복 많이 받았다.”는 것은
아레테이고,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깨닫고, 기쁨으로 따르는 것이 디카이오수네입니다.
아레테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계명을 들먹이며 요구합니다.
한편으로는 벌 받을까 전전긍긍합니다.
그러나 디카이오수네를 추구하는 사람, 즉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그 분의 뜻을 깨달은 사람들은
계명에 ‘맹종’이 아니라 ‘자발적 참여’로 반응합니다.
신앙생활에서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 마음 깨닫기’입니다.
십계명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위 네 계명은 하나님에 관한 것이요, 아래 다섯 계명은 사람들에 관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라.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
하나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안식을 거룩하게 지키라.
이것은 하나님에 관한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이것은 사람들에 관한 것입니다.
그 한가운데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다섯 번째 계명은 부모의 존재와 사명이 무엇인지 가르쳐 줍니다.
니코스 카잔차스키의 말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교사는 자신을 하나의 다리로 사용하는 사람들이다. 그는 그 다리 위로 학생들을 초대하여
건너게 한다. 그렇게 해서 아이들이 건너간 다음 즐거운 마음으로 무너진다. 제자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다리를 만들게 하고서.”
부모는 ‘다리’입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연결시켜 주고 자녀들로 건너게 하는 다리입니다.
부모님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에 대하여 잘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신앙을 유산으로 남겨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녀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우상을 섬기지 않도록,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도록,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수 있도록 가르치셔야 합니다.
그래야 살인하지 않고, 살인은 남을 증오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간음하지 않고, 도적질하지 않고, 남을 모함하거나 남의 것을 탐내지 않으면서, 이 땅에서 천대
만대까지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연결시키는 다리가 되기 위해서는
부모가 먼저 하나님을 올바로 체험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결정적인, 오 계명과 세상의 효와의 차이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됩니다.
그 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가인’이라고 짓습니다.
‘가인’은 히브리어 ‘카나’에서 따온 것인데, 그 뜻은 ‘소유와 획득’입니다.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올바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첫 아들에게 ‘소유와 획득’을 통해 잘 먹고 잘 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는 동생 살해와 하나님 앞을 떠난, 유리하는 삶이었습니다.
시편 127편에 자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그들이 성문에서 그들이 원수와 담판
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시 127:3-5)
여기서 눈 여겨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식을 화살에 비유하고 있는 점입니다.
왜 자식을 화살에 비유할까?
화살은 남을 향한 공격의 수단입니다.
그 수가 많으면 이긴다는 것으로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다릅니다.
좋은 화살이란 멀리 또 정확히 과녁을 향하여 날아가는 화살입니다.
화살을 멀리 정확히 날려 보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활이 좋아야 합니다.
활은 부모이고 화살은 자녀입니다.
화살인 자녀가 아무리 멀리 정확히 날아가려고 해도 활이 좋지 않으면 그럴 수 없습니다.
성경이 규정하는 ‘죄’의 원래 뜻은 ‘과녁에서 빗나가다’입니다.
여기서 과녁이란 바로 하나님입니다.
자식은 하나님을 향하여 멀리 날려 보낼 때 좋은 화살이 되며, 그 자녀들은 올바로, 제대로
살아서 부모를 자랑스럽게 하는 하나님의 상급이 된다는 뜻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평양 산정현 교회 목사님이셨습니다.
목사님은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다섯 차례에 걸쳐 5년 4개월간 감옥 생활을 하였고,
쇠못을 밟고 지나기 등, 수많은 고문을 당하고 결국 1944년 4월 21일 금요일 오후 9시 49세의
나이로 옥중에서 순교하셨습니다.
그때 주기철 목사님은
“내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를 붙잡으소서.” 라는 말을 남기고 웃으며 운명하였습니다.
아내마저 암으로 죽게 되는데,
어머니는 열일곱 살 된 막내아들에게 유언으로 시편 37편 25-26절을 남겼습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열일곱의 어린 나이로 막내 아들 주강조는 홀로 남한에 내려옵니다.
해방 직후부터의 그 험난한 세월을 오직 이 한 말씀 붙잡고 버텨냅니다.
고학으로 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기업 부회장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음으로 양으로 계속 공급하셨습니다.
장로가 된 그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목회자가 되지 못한 것을 송구스럽게 생각하여 오늘도
신학교에 많은 장학금을 내어 목회자를 후원하고 있습니다.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노라.”는 말씀이 주기철 목사의 아들
주강조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입니다.
은총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일반 은총과 특별 은총입니다.
일반 은총은 모든 사람과 만물에 차별 없이 임하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태양이 비칩니다.
비가 내립니다.
믿는 사람 밭에만 내리는 것이 아니라, 놀부의 밭에도 내리고, 들풀 위에도 내립니다.
이것이 일반 은총입니다.
그런데 특별 은총은 구하는 자에게 임하는, 문자 그대로, 특별 은총입니다.
한나는 하나님께 간구하였고, 하나님께서 특별 은총으로 사무엘을 허락하셨습니다.
자기 아이만큼은 특별한 아이로 키우려고 합니다.
한 자녀를 키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돈과 노력과 정성이 들어갑니까?
수백만 원짜리 유모차에, 수십만 원짜리 명품 옷과 장난감에, 수백만 원짜리 고액과외에,
수억 원을 들여 결혼을 시키고, 생활비까지 대줍니다.
그렇게 키운 자녀들이 모두 훌륭한 사람이 됩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사무엘을 보십시오.
한나가 사무엘을 키운 것은 불과 몇 년입니다.
사무엘이 아장아장 걸을 때에 바로 제사장 엘리에게 보냈습니다.
그런데도 훗날 사무엘은 이스라엘 전체를 행복하게 만든 위대한 사람이 됩니다.
그 비결은 무엇입니까?
사무엘이 남다른 능력을 가졌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는 평범한 아이입니다.
무엇을 가르치기에는 사무엘이 너무 어립니다.
영아교육, 조기교육.
모두 다 장삿속에서 나온 말입니다.
제발 속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지 마십시오.
한나는 사무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생각하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키웠을 뿐입니다.
그 기도하는 마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특별 은총이 사무엘에게 임한 것입니다.
특별하게 태어나서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하게 키웠기 때문에 특별해지는 것입니다.
해야 할 일은
내가 먼저 모든 것의 근원이신 하나님만을 진실로 의지하고 올바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앙을 자녀들에게 물려주는 것입니다.
또한 부모는 ‘사다리’입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높이 오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열심히 돈을 벌고 교육을 시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녀를 높이 올리는 길이 아닙니다.
사다리에 올라 보셨을 것입니다.
그 사다리가 안정되게 서 있고, 아래에서 굳게 잡고 있으면, 고소공포증이 없는 한 높이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다리를 누가 흔들고 있다면, 오금이 저려 내려올 것입니다.
자녀들은 부모라는 사다리를 오르내리며 사는 존재들입니다.
부모가 안정된 모습, 행복하게 사는 모습, 위기에서도 서로 격려로 이겨나가는 모습을 보일 때에,
자녀들은 두려움 없이 그 사다리를 타고 높이 올라갑니다.
행복과 책임과 생명의 세계로 올라가게 됩니다.
미국의 한 사회학자가 19세기의 두 남자의 가계를 조사하였습니다.
맥스 주크스(Max Jukes)라는 사람은
인생을 막 사는 사람이었는데, 같은 부류의 여자와 결혼하였습니다.
두 사람의 사이는 대단히 나빴습니다.
그의 후손 560명의 추적하여 조사해 보았더니
310명이 거지로 죽었고, 150명이 범죄자가 되었으며, 그 가운데 7명이 살인자였고, 100명이
알콜중독자, 그 가계에 속한 여자들의 절반 이상이 창녀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반면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는
경건한 여자와 결혼하였고, 두 사람 사이는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 부부는 1,394명의 자손들을 두었는데
그 중 295명이 대학을 졸업했고, 그들 가운데 13명이 대학 총장, 65명이 교수가 되었고, 3명은
대도시의 시장, 3명은 미국의회의 상원의원, 3명은 주지사로, 1명은 부통령, 30명은 판사로,
100명은 변호사로, 75명은 군대의 장교가 되었으며, 100명은 선교사와 목사와 작가가 되었으며,
조나단 에드워드의 자손 가운데는 미국 사회에 해를 끼치거나 짐이 된 사람은 없었으며 이들이
사회에 끼친 공헌을 너무나 커서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습니다. ?
자녀로부터 효도를 좀 받아볼까 했다가 책임만 커졌습니다.
부모들은 하나님의 복이 임하는 ‘통로’입니다.
먼저 부모 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자녀들에게 전수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양육된 자녀들은 하나님을 섬기듯 부모들을 섬기며, 하나님께 감사하듯 신앙을 물려주신
부모님께 감사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에 하나님 나라는 저절로 확장되고 그 주역인 우리 가정과 가문은 곧 교회가 되고,
천대 만대까지, 세상 끝 날까지 영원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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