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구주와 함께 나 살았도다 (로마서 7:1-6)

새벽지기1 2017. 12. 22. 07:30


가끔 홈피에 올라온 글이나, 여러분들이 하는 일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지난 주일에는 아브라함에서 수없이 갈라진 종파와 교파들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은 비판이나 비난을 하기 위함이 절대로 아닙니다.
'이 문제는 굉장히 중요하구나. 이에 대한 바른 판단과 방향을 제시해줘야 하겠구나.
그래서 생명을 낭비하거나 삶이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살게 해야 하겠구나.' 하는 마음에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오해하거나 섭섭해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을 살리고 그 생명을 더욱 풍성케 하기 위해서 오셨고, 당연히 교회와 목사는
예수님의 생명 사역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도 내가 현재 하고 있는 생각이나 일이 과연 생명을 살리고 풍성케 하기 위함인지
늘 점검해야 합니다.

한 집사님이 지난주 책을 한 권 주시면서,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하고 물었습니다.
그 책은 ‘마지막 징조’에 관한 책이었습니다.
그 집사님 가족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면서, 또한 교회와 목사를 누구보다 열심히 섬기다가
복음의 본질을 깨닫고 우리 교회로 오셨습니다.

지구 종말이나 마지막 징조에 관한 책과 영화가 굉장히 많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위시하여 성경에 기록된 마지막 징조들에 관한 이야기들은 생소한 언어들과
그로테스크한 장면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큰 두려움을 자아냅니다.
많은 목회자나 이단들이 현재 지구에서 일어나는 재난과 사건들을 성경의 기록과 연결시켜
임박한 종말을 강조합니다.

여러분들은 마지막 징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두렵습니까, 아니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습니까?

종말론은 이단들의 단골메뉴인데, 왜 이들은 특히 종말론을 들먹이는 걸까요?
한 마디로 말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게 하여 자신의 수하로 끌어들이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종말론으로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조장한다면 일단 경계를 해야 합니다.
두려움과 공포는 생명을 위축시키기 때문입니다.
두려움과 공포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것을 ‘공갈’내지는 ‘협박’이라고 합니다.
두려움을 느끼면 협박자에게 사로잡히기 마련입니다.
성경의 내용을 그런 식으로 오용하는 집단들은, 기성 교회든 이단이든,
결코 건강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24장, 마가복음 13장, 누가복음 21장에서, 세상 끝 날에 나타날 재앙에
대해서 길고 자세하게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 종말에 대한 설명입니다.
공포와 두려움을 야기할 그 어떤 의도도 없으십니다.
그러시면서 경고하십니다.
“그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로 미혹하게 하리라.”(마 24:23-24)
그런 말로 사람들을 미혹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따라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저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마 24:30-31)

종말론에 대한 가장 올바른 태도를 보여주는 기록이 있습니다.
세상 끝 날에 대한 가장 자세한 내용은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로 끝납니다.

‘아멘’은 “이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 무서운 재앙들이 빨리 일어나고 예수님은 빨리 오시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일들을 왜 초대 교인들은 속히 이루어지기를 기원했을까요?

초대 교인들이 초점을 맞춘 것은, 무서운 재앙들의 내용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그 어떤 무서운 재앙 가운데서도
자신들에게 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는
예수님의 약속에 집중하였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상관없다는 것이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것이고, 오직 예수님만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을 읽으며 그들은 환호했고,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외쳤습니다.

“그 택하신 자”. 종말론으로 두려움과 공포를 조장하는 집단들은 언제나, 자신들만이 택함을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제발 그런 엉터리 논리에 놀아나지 않기를 당부합니다.

두려움을 조장하고 또 엉터리 논리로 사람들을 함정에 빠뜨려 추종세력을 모은 다음 그들은 어떤 일을 합니까?
여러 가지 법과 규칙들을 지키게 합니다.
그 중에는 자신들의 지도자(목사 포함)를 하나님처럼 섬겨야 한다는 법은 반드시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는 하수로 전락한 사람들을 세력 확장에 동원합니다.
물론 이 모두가 하나님을 잘 섬기는 길이며 복을 많이 받으리라는 거짓 약속이 덧붙여집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복을 미끼로 또 다른 율법으로 사람들을 옭아맨다는 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어떤 내용이든 율법으로 사람들을 옭아맨다는 것은 곧 생명을 오도하고 위축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들과 사람들을 옭아매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율법을 깨뜨리고,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고 그 영혼을 해방시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계명은, 감옥이 아닙니다.
올무가 아닙니다.
이정표입니다.
계명에 갇히라는 것이 아닙니다.
계명을 보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과거의 인간들을 율법이라는 남편에 종속된 아내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한 여자가 한 남자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 남편은 매우 엄격한 남자였습니다.
매일 출근하면서 아내에게 해야 할 일들을 적은 쪽지를 줍니다.
그리고는 퇴근하여 그 쪽지를 보며 점검합니다.
시행치 않으면 화를 내고 채근하였습니다.
결혼 생활이 지옥입니다.
온종일 쪽지를 보면서 일을 합니다.
하나도 즐겁지 않습니다.
게다가 퇴근 시간이 되면 마음이 오그라듭니다.
오늘은
무슨 트집이 잡혀 닦달을 당할까 남편이 들어오는 발자국 소리만 들려도 마음이 콩알만 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쫀쫀하고 지독한 남자를 데려가셨습니다.
그 가련한 여인에게 하나님께서는 한 남자를 보내주셨습니다.
그 남편은 너그럽고 친절하고 최고의 사랑에 최고의 능력까지 겸비한 사람입니다.
그 여인은 그 남편을 위하여 종일 일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하는 일이라 즐겁기만 합니다.
퇴근 시간이 기다려집니다.
퇴근한 남편은 칭찬일색입니다.
“아니, 집에서 편히 쉬지 무슨 일을 이렇게 많이 했어? 피곤하지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어느 날 그 여인이 창고를 정리하다가 낡은 상자를 발견하였습니다.
열어보니 옛 남편이 매일 준 쪽지 뭉치가 있었습니다.
쫀쫀하기는, 옛 남편은 무슨 보물인양 그 쪽지들을 차곡차곡 모아놓은 것입니다.
여자는 그 쪽지를 집어 들어 읽어보고는 피식 웃으며 말했습니다.
“이 양반아,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하지만 하나도 힘들지 않어!”

전 남편과의 삶이 바로 율법 아래의 삶이고,
상자 안의 쪽지 뭉치들은 “의문의 묵은 것”(롬 7:6)들입니다.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롬 7:2-3)

매일 율법으로 정죄하던 남편이 죽고,
사랑과 위로로 격려하는 새 남편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리 하셨을까요?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위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롬 7:4)

예수님께로 가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함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위한 열매가 뭘까요?
종교행위의 매진과 전도를 통한 세력 확장일까요?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해 성령의 열매가 무엇인지 가르쳐 줍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갈 5:22-23)
이어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갈 5:26)고 하였습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는 것은,
자신을 위한 부와 명예와 권력 추구, 자신을 위한 세력 확장을 말합니다.
그런 것들과 성령의 열매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십수 년 전 신사동 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습니다.
거기서 이명현이라는 청년을 만났습니다.
그녀의 꿈은 선교사였습니다.
그래서 교회 간사직을 주고 신학공부를 시켰습니다.
공부를 마치고 몽골로 떠났습니다.
몽골에서 5년 동안 교회도 세우고 열심히 선교활동을 하다가 추방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빈민국 아동개발 프로그램 우간다 팀장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곳에서
현지 스텝 20명과 함께 2,000명의 어린이들을 돕고 있다가 한국에 잠시 들려 저를 만났습니다.
이명현 선교사는 정말 열심히 일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과 도서관 건립에 힘을 쏟고 있었습니다.
돕기로 했습니다.
오토바이 꽁무니에 타고 일을 본다는 말에 지난달 2만 달러를 보내 자동차와 솔라 라이트를
사도록 지원하였습니다.

교회 홈피에 들어가시면 우간다 어린이들에 둘러싸여 웃고 있는 이명현 선교사와 여러분들의
헌금으로 사준 자동차를 볼 수 있습니다.
200개의 태양열로 작동되는, 개당 3만 원의 솔라 라이트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우간다 시골의 어린이들이 밤에도 책을 읽을 수 있게 해주는 등불이 됩니다.

그녀가 떠난 후, 어떻게 영어책을 보낼 수 있을까 궁리하였습니다.
미국 지인들에게 연락을 하고 지원을 부탁했지만 한계와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 날 못 보던 여자 청년이 일찍이 와서 앉아있었습니다.
말을 걸었습니다.
뉴욕에서 온 변호사였습니다.
다짜고짜 우간다에 영어책 보내는 건에 대해서 말하고 제 이메일 주소를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잊었는데 이메일이 왔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전보경.
그때 처음 그녀의 이름을 알았습니다.
이메일 내용은,
다른 일로 뉴욕 YWCA 사무총장을 만나 그 이야기를 하였는데 관심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현재 그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요?

보경 자매가 보낸 이메일입니다.

“안녕하세요? 뉴욕에 있는 보경 자매입니다. 건강하시죠?
다름이 아니라, 사역지로 책을 보내는 건으로 YWCA 사무총장님 및 스텝들과?의견을 나누었는데,
흔쾌히 도와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작은 분량의 책을 모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약간의 logistic이 필요하겠지만, 이전에도bookdrive를
해본 경험이 있어서 노하우가 있으시다고 하네요.
뉴욕의 제 친구가 forwarding company 에서 일을 하여 운송 건을 문의해보니 가능하다고 합니다.
이번 주말에 스토리지를 알아볼 예정입니다.
Bookdrive 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YWCA 스텝들과 다시 미팅을 갖고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우선은 뉴욕, 뉴저지 등의 신문에 YWCA 의 이름으로 광고를 내는 것과, 이번 여름에 YWCA 에서
진행하는 행사 중 하나인 Literacy Festival 에 Application Fee 대신 부모님들이 집에서 책을 가지고?
오는 방식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책을?모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건강하시고 언젠가 만나 뵙기를 소망합니다.”

이 소식을 받고 한동안 정신이 멍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얼마나 엄청난지 말문이 막혀 버렸습니다.

선교사의 꿈을 꾼 한 노처녀,
그 일을 돕겠다고 나선 별볼일없는 한 목사,
인터넷으로 성서학당을 보고 한국에 온 길에 예배에 참석한 뉴욕의 젊은 변호사,
그리고 뉴욕 YWCA 사무총장과 스텝들,
그리고 보경 자매의 친구들,
신문 광고를 보고 책을 보낼 뚱뚱하고 착한 뉴욕 시민들,
문학 페스티발 등록비대신 책을 들고 올 미국 학부모들......

그래서 보경 자매에게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우간다로 가는 운송비와 관세와 기타 비용들은 우리 교회가 부담하겠다고.
그것도 기꺼이.

사람들은 가끔 제게 묻습니다.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이 무엇이냐고.
저는 동아백과사전이라고 말합니다.
초등학교 시절 지방도시에는 읽을 책이 귀했습니다.
부친께서
우리나라 첫 백과사전인 동아백과사전을 주문하셨고, 매달 한 권씩 집으로 배달되었습니다.
백과사전 안에는 엄청난 세상이 있었습니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보고 또 보았습니다.

전기가 없어 해가 지면 아무 할 일도 없는 우간다 어린이들,
교과서 한 권을 대여섯 명이 둘러앉아 봐야 하는 우간다 어린이들.
그들에게 솔라 라이트와 함께 엄청난 양의 책들이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보내주신 그 책들이 그 어린이들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성장시킬까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롬 7:6)

“선택받은 이”는
종교행위에 몰두하며 이제나저제나 하나님의 복이 임할까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새로운 영으로 나를 살리고, 예수님과 함께 남을 살리러 떠나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지구의 종말이 언제 어떻게 일어나든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이시요, 신랑이자 친구이신 예수님과 함께라면 어디든지 가는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