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로마서 7:19-25)

새벽지기1 2017. 12. 27. 12:51


우리는 오늘 가련한 고백을 듣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치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로마서 7:19)

이는 범죄자의 고백이 아닙니다.
우리들과 같은 나약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도 아닙니다.
복음을 위하여 그 어떤 고난도 달게 받았던 사도 바울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가르치면서, 자신은 원치 아니하는 악을 행하다니.
적이 실망스럽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이상한 말은 계속됩니다.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17)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20)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일을 해놓고는,
자신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죄가 행한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행한 잘못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명백한 잘못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말을 하다니 믿어지지 않습니다.

이 말을 악용하는 무리들도 많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죄 사함을 받았다.
이는 단번에 이루어진 영원한 구원이다. 또한 그 이후의 잘못은 회개를 통하여 사함을 받는다.
고로 나는 어떤 일을 해도 된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잘못된 행위를 정당화합니다.
왜 그토록 많은 예수쟁이들이 무모하고 무례한 범법행위들을 서슴지 않는가에 대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또한 영은 선한 것이고 육은 악하다고 보는 영지주의자 계열의 이단들은, 영은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받았고 육은 원래 악한 것이니 이 몸으로 무슨 일을 해도 상관없다고 주장합니다.

사도 바울도, 그런 의도로 이런 말을 한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이어서 장탄식을 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로마서 7:24)
그런데 이 탄식에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원하는 바 선은 행치 아니하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한다거나, 죄의 법이 자신을 사로잡아 죄로
끌고 들어가는 것을 본다거나, 자신 안의 죄가 죄를 짓게 한다고 말하는 것은, 발버둥을 쳐도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무서운 “죄의 현실성”을 고백한 것입니다.

우선 큰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구나.”
사도 바울도 그랬다면 내 갈등과 낙담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비단 사도 바울뿐만 아닙니다.
구약에서 가장 용감했던 사람은 단연 예언자 엘리야입니다.
갈멜산에서 엘리야는 홀홀단신으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맞서 승리하였습니다.
그때 그는 사자와 같이 당당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아합의 아내 이세벨이 이를 갈며 엘리야를 죽이려 하자 엘리야의 모습은 돌변합니다.
이세벨이 무서워 멀리 멀리 광야로 도망쳤습니다.
그리고는 한 작은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하나님께 차라리 자신을 죽여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때의 엘리야는 한 마리의 가련한 다람쥐였습니다.

굳건한 믿음의 소유자도, 하나님의 큰 능력을 체험했던 사람들도 갈등하며 낙담하며 때로는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주저앉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기로 합시다.
서로의 나약함을 용납하고, 허물을 덮어주고,
지치고 낙담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해서 다시 일어나 함께 천성을 향해 가도록 합시다.
무엇보다도, 벌을 받을까 전전긍긍하지 마십시오.
현재 내가 벌을 받고 있다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어쩌지 못하는 죄의 현실이 아니라, 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사도 바울의 장탄식은 절망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자신은 죄로부터 무력하다는 것을 자인하는 말입니다.

죄에 대한 사람들의 잘못된 두 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죄를 방치하는 것과 죄와 싸우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죄를 방치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1장부터 7장까지 길고도 길게 설명했습니다.
그렇다면 죄와 싸워 이기라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죄를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너무 흔히 보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죄를 방치하다 망하고, 하나님을 잘 믿겠다는 사람들은
이기지도 못할 죄와 싸운답시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합니다.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롬 7:15)
이 말씀에 예외가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는 절대 그렇지 않아. 나는 얼마든지 지킬 수 있는 강한 의지가 있어.”
교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반드시 넘어집니다.
내 본성은 악하고 게으르고 연약하고 어리석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하나님의 도우심이 임합니다.

죄의 문제는 오직 예수님께 가야만 해결됩니다.
그런데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온 세상을 꽃대궐로 만들었던 눈부신 꽃들이 일순간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저는 가는 봄을 바라보며 상념에 젖었습니다.
바람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때가 되면 꽃은 지게 마련입니다.
“보기 좋던데. 그 꽃들을 그대로 놔두시면 안 되나?”라고 생각하신 분들은 없을 것입니다.
낙화는 꽃들의 슬픈 운명이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자연 순환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자연도 속내를 들여다보면, 먹고 먹히는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의 법칙이 적용됩니다.
자연이 타락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그렇게 서로 경쟁하며 또 공존하며 열심히 살아서 각자의 생명과 존재들을 활짝 활짝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자연의 모든 생물들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그 법칙에 순응하며 열심히 그렇게들 살아갑니다.

온 우주는 흥망성쇠(興亡盛衰)의 연속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법칙입니다.
흥성(興盛)은 축복이고 망쇠(亡衰)는 저주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오직 흥성에만 초점을 맞추고, 그 흥성도 ‘거저’ 주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종교생활을 열심히 해도 예수님의 허상을 좇고 있는 것입니다.

타락하기 전의 에덴동산은 어땠을까요?
온갖 먹을 것이 지천에 깔려있어 의식주 문제는 전혀 걱정하지 않고 그저 이리 뒹굴, 저리 뒹굴, 놀고먹었을까요?
또 걱정 없이 놀고먹는 것이 낙원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려는 것이 그런 삶일까요?
또 그렇게 한다고 해서 정말 행복할까요?
그런 것을 바란다면 예수님 근처에도 간 것이 아닙니다.

삼라만상 중 인간이 가장 창조 욕구가 강한 존재입니다.
창조의 원천은 하나님이시며,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창조력을 발휘하여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상을 잘 관리하고 돌보라는 것입니다.
창조력 발휘를 위해서는,
당연히 공부도 해야 하고 생각도 해야 하고 연구도 해야 하고 노동도 해야 합니다.

타락이란,
그 창조력을 오직 자신만을 위한, 또 눈에 보이는 현세만을 위한,

또 영혼이나 정신이 아닌 육체의 번영을 극대화하는데 쓰는 것입니다.
그것도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로 얻으려고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최소한의 합당한 노력도 하지 않고,

종교행위에만 몰두하며 ‘거저’ 먹으려고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 잘못을 깨우쳐서
생명과 시간과 재능을 올바로 사용케 하려고 성경도 주시고 예수님도 오신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께서 타락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일하시는 그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의 생각과 기대와는 전혀 딴판입니다.
필립 얀시는, 하나님은 ‘천천히’ ‘예측할 수 없게’ ‘역설적으로’ 움직이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기 위한 첫 조치로,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자식도 없는 75세 된 노인을 택하십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하늘의 별과 해변의 모래처럼 많은 큰 민족이 되리라는 약속과 함께,

땅과 복의 근원의 약속을 하십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가장 비효율적인 선택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으로 가서 밤새도록 기도하시고 열두 제자를 선발하셨습니다.(눅 6:12)
그렇게 밤이 새도록 하나님과 상의하신 끝에 선발하신 열두 제자가 전혀 신통하지 않았습니다.
출신부터가 그랬습니다.
하층민들이었고, 그 중 제일 똑똑하다는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버립니다.
예수님 역시 가장 비효율적인 선택을 하셨습니다.

3년 동안이나 함께 생활하며 그토록 열심히 가르쳤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을 저주까지 하며 세 번이나 부인하였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자 요한을 제외한 제자들은 도망쳐 버렸습니다.
요한도 마리아를 지키기 위해서 할 수 없이 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럴 줄 아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제자들을 위한 조치는 단 하나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그리고 하나 더 덧붙이셨습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 15:15)

성령을 보내신다는 것이나, 그 시원찮은 제자들을 친구라 하신 것이나 모두 한 가지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깊은 뜻과 사랑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 하나님의 깊은 뜻을 깨닫게 하시는 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하여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하는 영입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가장 큰 사역입니다.

성령을 받고 방언과 병 고침을 받았다고 해도 하나님의 깊은 뜻과 사랑을 깨닫지 못하면

다시 공포와 불안에 시달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깊은 뜻을 올바로 깨달을 때만 비로소 하나님은 내 안에 내재하셔서

생명의 길을 보이시며 나를 격려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아브라함이나 예수님께서 택하신 열두 제자는,
다름 아닌, 문제 많고 시원찮고 연약하고 사악하기까지 한 우리들, 그러면서도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어 안달하는 욕심 많은 우리들입니다.

아브라함과 열두 제자들이 어떤 실수를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우리들은 잘 압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기독교의 가장 위대한 인물이 되었고, 그들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났습니다.
그들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별로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우리처럼 스스로 판단하고 행했다가 곤혹을 치릅니다.
하나님께서 구해주시고 가르치십니다.
그 가르침을 받아들입니다.
이들도 우리처럼 죄를 범합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가르치십니다.
이들도 우리처럼 의문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은 사건과 고난을 통해 가르치십니다.
이들은 깨닫고 갔습니다.
그렇게 그들의 삶의 방향이 조금씩, 조금씩 수정되어 점점 하나님께로 다가갔습니다.

사도 바울이 탄식에 이어 이렇게 외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4)

이 말씀을,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니까 육체는 죄를 지어도 된다는 뜻으로 오해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아브라함이나 열두 제자나 또 대부분의 우리들이나 그래도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법을 따르려 하는 것이 우리들의 공로가 아닙니다.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의 법을 깨닫게 하시고 마음으로나마 따르게 된 것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그래서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죄에게는 꼼짝 못하여도, 내 육체는 죄를 지어도 그런 우리들을 여전히 사랑하시며
용납하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법과 세상 유혹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을 봅니다.
그래도 부모를 따르겠다고 고민하는 자녀들이 한편으로는 고맙고 대견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과 죄를 분리하는 이유는,
자신의 허물과 실수를 죄에게 전가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도저히 이길 수도 해결할 수도
없는 죄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매진하겠다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를
하나님께 맡길 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
(롬 8:4)

최후의 만찬을 마치시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32)

이 말씀 이후 예수님과 제자들은 상상을 초월한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버립니다.
사탄의 조종을 받은 대제사장 무리들이 일으킨 일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탄과 그 졸개 무리들을 없애시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와 제자들의 믿음을
위해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역시 우리가 보기에 가장 비효율적인 대책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는 예수님의 기도처럼 되었습니다.
돌이켰고, 믿음을 회복했고,
형제들을 굳게 하는 일에 전 생애를 걸었고,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죄를 방치하지도, 죄와 싸우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맡기신 일을 하기에도 시간이 짧았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느리고 비효율적으로 역설적으로 보이는 하나님의 방법은,

그러나 나를 최고의 자녀로 살게 하는 최선의 길입니다.
우리 일의 청탁(淸濁)을 가리지 말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서로 격려하면서 그 길을 천천히, 열심히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