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인생은 아름다워 (로마서 5:12-17)

새벽지기1 2017. 12. 14. 06:37


“난 그저 어부였습니다.
생계를 잇기 위해 바닷바람과 싸우며 배를 몰았습니다.
남들이 하찮은 일이라고 할진 몰라도 난 자랑할 일이 많습니다.
내 손으로 집을 지었고, 아내와 함께 따뜻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바닷가재잡이 수십 년, ‘바닷가재 왕’이란 별명도 얻었습니다.
그런데, 내 나이 구십 세가 될 때까지 주변에 말 못 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때때로 이 일 때문에 밤마다 홀로 눈물 짓곤 했습니다.”

이 글은 98세의 할아버지 제임스 아루다 헨리가 쓴, “어부의 언어”라는 책의 서두입니다.

누구보다 성실히 살았던 제임스 할아버지가
남몰래 눈물 흘리며 숨겨야 했던 그 비밀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제임스 할아버지가 문맹이라는 것입니다.
식당의 메뉴판을 읽지 못해 다른 사람의 음식을 보고 같은 것을 달라고 했고,

때로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요청하기 싫어서 굶기도 하였습니다.
제임스 할아버지가 문맹인 이유는,
미국으로 이민 와서 10살 때부터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가슴 시린 아픔을 안고 죽음을 기다리던 91세의 어느 날,
손녀가 “인생은 아름다워(Life is so Good)”라는 책의 내용을 들려주었는데,

그것은 98세의 조지 도슨 할아버지의 문맹탈출기입니다.
'그가 할 수 있었다면 나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제임스 할아버지는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습니다.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그러나 이겨냈습니다.
그리고 7년 후, 자전적 에세이를 출간하기에 이르렀고, 특히 제임스 할아버지의 이 책은 미국
어린이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경계선이 있습니다.
그 경계선의 이쪽과 저쪽은 전혀 다른 세상, 차원이 다른 세상이 존재합니다.
글도 굉장히 중요한 경계 중의 하나입니다.
글을 읽고 쓸 줄 안다는 것은 경계를 넘어 새로운 세계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경계선을 넘을 생각을 하지 않거나

넘고도 그 가치를 모른 채 무의미하게 살아갑니다.

‘철조망 병’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정신병입니다.
2차 세계대전 때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 오랫동안 철조망 안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철조망이 걷혔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철조망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붙여진 병명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돈, 권력, 탐욕의 철조망에 갇힌 사람, 종교 교리나 이념의 철조망에 갇힌 사람,

아집과 증오의 철조망에 갇힌 사람 등등 모두 다 저마다의 철조망에 갇혀 살고 있습니다.
그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을 찾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제임스 할아버지의 훌륭한 점은, 91세의 나이에 문맹이라는 철조망을 넘었고,

곧바로 저술의 새로운 세계로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철조망에 갇혀 있나,
또한 내가 가야할 새로운 세계는 어디인가 진지하게 숙고하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아담의 ‘원죄(原罪)’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그러나 아담에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하였나니”(롬 5:14)

최초의 사람인 아담이 지은 죄가 원죄가 되어 우리 모두를 포함한 전 인류에게 퍼졌고,
그로 인하여 모든 사람들이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않고도 사망이 왕 노릇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일입니다.

친구가 한 일을 내가 했다고, 아내가 엄한 소리를 해도 남편이 억울해 하는데,
아담이라는 사람이 진짜로 있었는지도 모르고, 게다가 얼굴도 본 적 없는 남의 나라 사람이
까마득한 옛날에 지은 죄를 21세기를 사는 내가 뒤집어써야 한다는 것은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억지소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이 원죄 교리를 ‘대표성의 원리’로 설명하기도 하지만, 별 설득력이 없는 이론입니다.

그런데 잠시 생각해 보십시다.
죄와 허물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죄를 저질러놓고 사람들은 불안해하며 은폐하려고 합니다.
처벌이 두려워 그런 것만은 결코 아닙니다.
물론 죄를 짓고도 뻔뻔한 사람들도 굉장히 많지만,

이런 사람들은 구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인간의 이와 같은 공통된 현상을 사도 바울은 원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눈여겨봐야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죄가 율법이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롬 5:13)

살인이나 도둑질 등은 명백한 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우상을 숭배하는 일은 십계명이 있기 전에는 죄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십계명이 주어지고 나서는 가장 큰 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이후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입을 여실 때마다 죄의 항목이 점점 더 많아져서
죄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 정말 나쁜 종교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본질을 보시기 바랍니다.

문맹이나 철조망 병은 죄가 아닙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도 않습니다.
아토피 병을 앓고 있거나 지체 장애자들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 자녀가 그렇다고 한다면 부모는 가만히 있질 않습니다.
자녀를 그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닐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부모님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십니다.
율법을 주셔서 죄가 무엇인지 가르쳐주시는 것은,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전에는 죄인 줄도 모르고 행했습니다.
그 결과 생명은 점점 위축되고 마침내는 파멸에 이르렀습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회사 돈을 횡령했다고 합시다.
은폐하고 변명하는 일에 에너지를 사용합니다.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습니다.
죄는, 이처럼 생명을 위축시킵니다.
그래도 돌아서지 않습니다.
끝내는 파멸입니다.
바늘도둑이 소도둑이 된다는 속담이 그래서 나왔고,
오늘 본문은 “죄로 인하여 사망이 들어왔다.”는 말로 바꿨습니다.

어떤 피조물로도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이 하는 행태를 살펴보십시오.
이상하게 생겼다하면 돌이든 나무든 영험하다고 지극 정성으로 섬깁니다.
생명이 없는 것들이 인간을 지배합니다.
그야말로 “사망이 왕노릇합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적과 기사를 행하는 선지자나 꿈꾸는 자들, 심지어는 목사들을 하나님처럼 섬깁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그들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신 13:3)
나아가서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는 죽이라.”(신 13:5)고 말씀하십니다.
왜요?
인간이 다른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왕노릇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주신 이유는,
뭐가 잘못인 줄 올바로 깨닫고,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과 시간과 재능을 제대로 사용하여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라는 간곡한 당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율법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율법을 지키느라 노심초사하는 삶에서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어주신 세계,
생명이 살아날 뿐만 아니라, 그 생명이 더욱 풍성해지는 세계입니다.
이를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다.”,
“생명 안에서 왕노릇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세계로 들어가고 싶지 않으십니까?
이 세계를 알면 먼저 죽음에 대한 불안과 일상의 걱정들이 물러나기 시작합니다.
환란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며, 난관을 어떻게 돌파해야 하며,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며,
어떻게 일을 풀어나가야 할지 알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세계에 들어간 후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2-13)

그렇습니다.
우리들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단숨에 저절로 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한 사람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
예수님께서 순종하심으로 그 세계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순종이 관건입니다.
배우고 깨닫고 행해야 합니다.

여기서 명심에 또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짐 벨처가 말합니다.
“죄에서 어떻게 구원받는지만 강조할 때, 복음은 생명보험으로 전락해 버린다.”
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새기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든 죗값을 치루셨습니다.
그런데 그저 구원을 위해서 그러신 것이 아닙니다.
그 사실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었습니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셔야 합니다.
성장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나누며 베풀며 살아야 합니다.
성장하지 않으면 교리 속에 갇혀버립니다.

김승옥이라는 소설가가 있습니다.
“서울 1964년 겨울”, “무진기행” 등 문학사에 길이 남는 빛나는 소설로 많은 청년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의 소설은 쉽지 않습니다.
생각하게 합니다.
사고의 깊이와 넓이를 확장시켜주는 훌륭한 작품들입니다.
그러다가 여의도순복음 교회에서 성령 체험을 합니다.
그걸로 그의 치열했던 문학여정은 종결됩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진짜 예수님을 만났다면

그의 문학세계는 더욱 깊어지고 더욱 넓어지고 더 큰 영향력을 끼쳐야 합니다.
하지만 그는 반대로 가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노심초사하는 소심한 착한 시민으로 만들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영감으로 갈 길 몰라 하는 불쌍한 영혼들을 이끌고,
황폐한 사막과 같은 이 세상을
살맛나는 에덴으로 만드는 생명의 리더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스캇 펙 박사는 그의 저서 The Unending Journry 에서 영적 발달 단계를 4단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잘 들어보시고 나는 어떤 단계를 살고 있는가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단계는 혼돈: 반사회 단계 입니다.
저는 ‘본능의 사람’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이 단계는 믿음 같은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원칙 없이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자신의 이익만을 도모합니다.
절대로 손해 보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 의지 외에는 스스로를 통제할 메커니즘이 없기 때문에 혼돈 그 자체입니다.
설사 교회를 다니고 있다고 하여도 그저 습관적으로 다닐 뿐입니다.
하지만 이들 중에는 의지력과 자제력이 남달라서 크게 출세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형식적: 제도적 단계 입니다.
저는 ‘율법의 사람’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이 단계에서는 제도와 규칙에 의존해서 자신을 통제합니다.
교회도 매우 중요한 자기 통제의 수단이 됩니다.
그래서 교리나 신앙체계나 종교적인 형식에 매우 집착합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은 그저 무시무시한 통제관으로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존재입니다.
내가 잘 하면 복을 주고, 죄를 지으면 벌을 내리는 존재입니다.
나쁜 일이 생기면, 벌을 받았다고 두려워하며 얼른 돌아옵니다.
그러다가 좀 상황이 나아지면 엉뚱한 딴 생각에 몰두하곤 합니다.

세 번째 단계는 회의적: 개인적 단계 입니다.
저는 ‘자율의 사람’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이 단계의 사람들은 교리나 신앙 체계, 교회 제도 등에 깊은 회의를 갖습니다.
겉모습은 종교적인 것과는 멀어 보이지만, 두 번째 단계 사람들보다는 훨씬 영적으로 앞서 있습니다.
하나님이나 종교에 대하여는 강한 의문과 반감을 갖고 있지만,
책임감을 갖고 사회 여러 분야에서 많은 일을 하며, 헌신적으로 봉사합니다.
자신의 삶에 대하여 책임지며 성실하게 살아갑니다.

마지막 단계는 신비적: 공동체적 단계입니다.
저는 ‘진리와 자유의 사람’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으며,
하나님은 멀리 하늘에 계신 분이 아니라, 내 안에 내재하는 분이 됩니다.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사랑합니다.
예수님처럼 살고 싶어합니다.
신비로움에 강한 관심을 갖고, 하나님의 신비를 알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더 많은 신비와 조우하게 되고,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통달하게 됩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자유로워지고, 물질에 대한 집착 또한 점점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생명의 일, 살리는 일에 관심을 둡니다.

김승옥 씨는 세 번째 단계에서 살다가 두 번째 단계로 후퇴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네 번째 단계에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마음을 전합니다.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심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사 61:3)

“의의 나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자”가 우리 모두가 불려야 할 신나는 이름입니다.
이 이름을 얻기 위해 철조망을 넘어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사람들에게 붙여지는 또 다른 이름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 5:17에 기록된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