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소망이 내게 있기에 (로마서 5:1-8)

새벽지기1 2017. 12. 11. 12:46


1884년 어느 저녁,
런던병원의 외과의사 프레드릭 트리브스는 거리를 거닐다가 유랑극단의 간판을 보았습니다.
그 간판에는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흉측한 모습이 그려져 있고, ‘코끼리 사람’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호기심이 발동한 그는 1실링을 내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담요를 뒤집어쓴 커다란 한 생물이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흥행사는 그 생물에게 소리쳤습니다.
“일어섯!”
그러자 그 생물은 일어섰고, 그 모습을 본 순간, “어떻게 저럴 수가!” 경악의 외마디가 그의 입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머리 둘레는 허리둘레와 같았고, 게다가 이마에는 덩어리 모양의 뼈가 기형적으로 튀어나왔고,
울퉁불퉁한 엄청난 양의 살이 용암처럼 흘러
코와 입, 그것도 모자라 가슴과 겨드랑이까지 주걱처럼 덮고 있었습니다.
오른팔은 정상인의 두 배 길이, 그런데 손가락들은 짧아 쓸모가 없고,
엄청난 두께의 기형 다리로는 의자를 의지해야 겨우 서 있을 수 있었습니다.

역겨움보다는 의사로서의 호기심이 발동한 트리브스 박사는 그를 병원으로 데리고 와서
진찰을 하고, 또 대화를 시도해 보았지만 기형적인 입 모양과 덮힌 살 때문에 웅얼거리는
소리밖에 들을 수 없었습니다.
백치라고 판단하고 사진과 함께 자세한 기록을 남기고는 자신의 명함을 주어 유랑극단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잊었습니다.

그런데 2년 후, 트리브스 박사는 경찰로부터 연락을 받고 경찰서로 갔습니다.
경찰서 한쪽 구석에는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웅얼거리는 그 코끼리 사람이 웅크리고 있었고,
왼손에는 자신이 준 명함이 쥐어져 있었습니다.

코끼리 사람.
그의 이름은 존 메릭(John Merrick)입니다.
그의 병명은 다발성 신경섬유종증.
살과 뼈가 끝없이 자라는 병으로, 그로 인해 그런 기형인간이 되었습니다.
네 살 때 부모로부터 버려졌고, 열네 살 때 유랑극단에 팔려갔습니다.
트리브스 박사를 처음 만날 때 나이는 스물한 살.
그나마 밥을 먹여주던 유랑극단이 버린 것은 스물세 살 때였습니다.

박사의 배려로 병원 다락방에서 살게 된 존 메릭은
시행착오 끝에 트리브스 박사와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존 메릭은 백치가 아니었습니다.
읽고 쓸 줄 아는, 책이라면 모두 읽는 대단한 독서가였습니다.

트리브스 박사의 존 메릭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가 겪어온 삶의 여정은 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비아 돌로로사였고 힘겨운 오르막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가 불평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자신의 비참한 삶을 한탄하거나,
그 무자비한 흥행사와 사람들로부터 받은 학대에 대해 분개하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그는 누구에게도 앙심을 품거나 나쁜 말을 하지 않는, 부드럽고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고난이 그를 고상하게 만들었다.”

동물보다 더 큰 학대와 착취를 당하고, 즐거운 기억은 단 한 번도 없는 메릭이 그처럼 따뜻한 성품을 가진 것이,

트리브스 박사에게는 너무나 신비롭고 감동스러웠습니다.
그를 더 넓은 세계로 인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친구 중 젊고 아름다운 여성을 설득하여 메릭에게 다정하게 인사를 하고 악수를 청하게 했습니다.

그 일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메릭은 여성과의 평생 처음의 악수를 끝낸 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오랫동안 흐느껴 울었습니다.
자신을 사람으로 대해주고 손까지 잡아준 그 여성에게 무한 감사를 올렸습니다.
그 이후로 메릭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트리브스 박사의 도움으로 난생 처음으로 교회당에서 예배도 드리고 성찬도 받고 오페라도 관람하였습니다.
그 일들이 세상에 알려지자 영국 여왕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와 위로하였습니다.

훗날 작은 교회가 내려다보이는 시골의 오두막에서 자연과 벗하며 살았습니다.
작은 새소리에도, 떠가는 조각구름에도, 폭풍우 치는 날에도, 졸졸 흐르는 시냇물을 보고도,
그는 웅얼거리며 말했습니다.
“너무나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메릭은 온전한 왼손으로 골판지와 색종이로 뭔가를 열심히 열심히 만들었습니다.
내려다보이는 그 작은 교회의 모형이었습니다.
너무나 정교했습니다.
그는 그 교회를 “진흙에서 위로 날아오르는 은혜의 모형”이라 불렀습니다.
교회는 이 땅에 세워진 하나님 나라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임재를 충만하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평생 처음으로 행복을 맛보며 27살의 나이로 자다가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가 환상 속에서 살다 갔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겉으로는 그럭저럭 봐줄만한 이 세상과 사람들의 그 속내를 알고 보면, 메릭의 겉모습처럼
역겨운 일과 경악할 일들도 가득합니다.
신앙에 대한 주옥같은 깊은 글을 쓴 C.S. 루이스는,
자신의 속내들을 흘러가는 대로 솔직하게 쓰고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면,
그 글을 읽은 사람들은 자신을 괴물이라고 할 것이라 했습니다.
사실입니다.
본능을 제어하지 않았다면 우리 모두 괴물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겉으로는 아름답고 우아하지만 속은 복잡하고 어지럽습니다.
메릭과는 정반대입니다.

필립 얀시는 그리스도인이란,
눈에 보이는 육적 세계와 눈으로 볼 수 없는 영적 세계를 오가는 양서류라고 하였습니다.
절묘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눈에 보이는 세계만이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눈으로 보기에 좋은 것을 좇아갔습니다.
그러나 잡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실망하고 원망하고 절망합니다.
서로에게 요구하고, 또 서로 가지려고 싸웁니다.
상처를 줍니다.
설령 잡았다고 하더라도 내가 가진 것보다 더 좋은 것이 많습니다.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데도 비판하고 깎아내립니다.
서로 원수가 됩니다.

설령 하나님을 알았다고 해도 하나님을 이용하여 좋은 것을 더 많이 가지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참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여전히 눈에 보이는 세계만을 믿기 때문입니다.

3세기의 교부 크리소스토무스는 이렇게 한탄하였습니다.
“우리들은 그들보다 더 부를 숭배한다.
우리는 그들과 똑같이 죽음을 두려워하고, 가난을 끔찍해하고, 질병을 못 견뎌 하고, 영광을
얻고자 하고, 남을 지배하길 좋아한다.
그러면서 어떻게 그들에게 예수님을 전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영원한 세계가 있음을 알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이유는 단 하나, 우리들은 하나님의 누구보다 사랑하는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지은 그 어떤 죄와 허물도 용서하실까요?

어린 시절을 생각해 보십시오.
잘못을 저지르고는 혼이 날까 봐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서성입니다.
부모로부터 야단을 맞았다고 가출합니다.
집 나간 자녀를 찾는 부모의 신문 광고는 언제나 동일합니다.
“모든 것을 용서한다. 제발 집으로 돌아오라.”

그래서 4장에서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은 자는 복이 있고,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다.”(롬 4:7-8)고 강조하였습니다.

돌아갈 영원한 집,
우리 아버지가 애타게 기다리시는 집이 있음을 알면 사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물속에서만 살던 올챙이가 개구리가 되어 뭍으로 올라옵니다.
전혀 다른 세상입니다.
개구리는 당연히 올챙이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개구리가 왠지 싫습니까?
그렇다면 나비는 어떻습니까?
꿈틀꿈틀 기는 징그러운 애벌레가
고치가 되고 고치를 뚫고 아름다운 나비가 되어 날아오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땅에서 살지만 하늘을 나는 나비들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2)

영적 세계를 본 그리스도인들은 그 가치관도 당연히 달라집니다.

아름다움과 부와 재능은 더 이상 삶의 목표가 아닙니다.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로 감사하며 그것을 더욱 개발하여 하나님의 자녀답게 되는데,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이웃을 살리는 일에 아낌없이 사용합니다.
당연히 더 큰 선물이 주어집니다.
아름다움은 내면의 아름다움으로, 재능은 죽은 것도 살리는 능력으로 바뀌고, 부와 명예는
덤으로 주어집니다.

환난과 고난을 보는 눈도 달라집니다.
환난은 한사코 피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17세기 영국이 대 역병과 화제와 내란으로 인구의 삼분의 일이 죽는 극도의 혼란의 때에,
리챠드 백스터는 70대의 노구로 2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면서도 “성도의 영원한 안식”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겼습니다.
그 책에는 단 한 구절의 의문도, 불평도, 원망도 적혀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영원한 안식을 우리의 최종 목표로 정하게 되면,
고난은 눈에 보이는 세계가 우리의 안식처로 착각하지 않도록 막아준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롬 5:3-4) 값진 것입니다.

노력과 훈련 없이 이뤄지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게”(갈 6:7) 마련인 하나님께서 정하신 ‘신성한 삶의 법칙’을,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온전해진다는 교리로 밀어버리고는, 종교행위에 몰두하면

기적적으로 나아지리라는 ‘맹목의 어리석음’으로 대체해 버렸습니다.
그 결과는, 생각이 멈춰버린 단답형의 예수쟁이들의 양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죽고, 이 땅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꿈틀꿈틀 기는 송충이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비로 날 생각은 하지 않고,
하나님께 치성을 드려 크고 힘이 센 애벌레만 되기를 소원합니다.
크고 힘이 센 애벌레는 기괴할 뿐입니다.

어려운 가운데 있습니까?
이제 나비가 되려는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를 날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조치입니다.
답답한 고치 속에서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듯, 인내와 연단을 이루기로 합시다.
이겨내야 아름다운 나비가 된다는 소망을 절대로 버리지 마십시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소망은 나비의 꿈을 꾸는 사람들을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욥이 고난 가운데 외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 23:10)

스캇 펙의 소설
“저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처럼”의 맨 마지막 장면은 하늘에서 열리는 ‘천상회의’입니다.
지구의 모든 난제와 고통을 담당한 최고의 영이 무대 중앙에 나와 아리아를 부릅니다.
그 노래가 회의장에 울려 퍼집니다.
몇 분간의 짧은 노래에 지구의 모든 문제와 아픔이 담겨 있습니다.
다음 단계의 영들은, 놀랍게도 그 짧은 노래에 담긴 갖가지 문제와 아픔을 바로 알아듣고
자신들의 할 일을 바로 깨닫습니다.
이어서 다음 단계의 영들과 교통합니다.
그러면 다음 단계의 영들은 보다 작게 자신의 할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다음 단계의 영들은 보다 더 작게,
그렇게 한 단계씩 내려가면서 자신의 할 일들이 구체적으로 분화됩니다.

맨 말미에 있던 주인공 다니엘도 천상회의에서 진행되는 전 과정이 이해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무한한 사랑이
하나님의 영들에게 ‘아무런 막힘없이’ 전달되는 것이 한눈에 보였습니다.
그에게 한 영이 다가와 말했습니다.
“당신은 저와 함께 가면 됩니다.”
도저히 해결할 방법이 없다고 믿었던 그 엄청난 난제들을 해결하는 일에 다니엘도 합류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천국에서의 도제수업이 시작되었다.”로 끝나는 번역을 마치며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번역을 마쳤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억만의 영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사랑의 메시지를 각자의 수준에서 가감 없이 

알아듣는 그런 세계가 있다는 감동과, 하나님께서 문제 많은 나를 이 땅에서부터 그 일에
동참하라고 부르신다는 감사의 눈물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일에 동참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자체가 우리들에게 주어진 최고의 선물입니다.

프란체스코 수사들의 기도문 중 일부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리석음의 복을 주사, 우리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함으로써 모든 아이들과 가난한 이들에게 정의와
사랑을 가져다 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경은 태초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입니다.
애벌레로 이 땅을 기지 말고,
누구보다 크고 빠른 힘센 애벌레가 되게 해달라고 떼쓰지 말라고.
아름다운 나비로 살라는,
이 아름답고 넉넉한 우리들이 메릭의 고상한 영혼을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메시지를 알아들읍시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