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의인 그리고 그의 행복 (로마서 4:1~11)

새벽지기1 2017. 12. 8. 07:33


양화진에 가면 서양인 선교사 묘지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를 전하고 죽은 선교사와 그의 가족들 141명이 묻혀 있는 곳입니다.
그 중에는 어린아이들도 있습니다.
젊은 선교사의 자녀들입니다.
묘지에 적혀 있는 글을 읽으며 생각해 봅니다.
낯설고 물 선 조선, 적대적인 환경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이곳까지 온 그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아무런 특혜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하나님은 청하면 무엇이든지 들어주시는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가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에 들 만큼 정성을 들일 때까지, 도움을 받기에 합당할 정도로
노력할 때까지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음흉한 장사꾼도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롬 4:6-8)

“너희들은 일한 것도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은 사람들이다.”는 말을 들으면,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나 남편, 자녀들을 조선 땅에 묻어야 했던 그 선교사들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둘도 없는 선물임에도,

우리는 자꾸 그에 대한 보상을 생각합니다.
보상이 없으면 섭섭해하고 심지어는 화까지 내며 돌아서 버립니다.

그들로 하여금 그 모든 환란과 적대감과 슬픔과 불편을 감내하게 했던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보상도 아니고 천국행도 아니고,

결국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보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 우리는 언제 철이 들어
하나님과의 동행만으로 감사하며 행복해 할 수 있을까요?
겸손해질 수 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할례를 받으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의 선민의식은 하늘을 찔러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을 모두 개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오시는 길을 열었던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바리새인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외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눅 3:8)

이 말을 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절할 듯이 놀랐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존재 근거를 송두리째 엎어버리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말을 하였을까요?

예수님께 집중하지 아니하고, 교리와 제도에 집착하다가 껍데기만 남은 오늘날의 교회처럼,
여호와 하나님께 집중하지 아니하고, 기복을 위한 율법과 할례에 몰두하다가,
자신도 갇히고 남도 가두는 누구도 깨뜨리지 못하는 단단한 껍데기만 남은 유대교의 회개를 촉구하는 것입니다.

심리학자 허태균 씨가 “가끔은 제정신”이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한 번 생긴 믿음은 깨지기가 무지 어렵다.”
맞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잘못된 믿음을 깨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길은 율법을 지키는 일이고,
그렇게 해야 하나님의 눈에 들어 복을 받는다는 잘못된 믿음을 깨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믿음을 고수하였고,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전혀 이해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이 없는 법칙으로 만드는
행태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이 말씀을 오늘 교회는 물세례와 성령 세례를 받아야 천국에 가는 것으로 가르칩니다.
그래서
목사가 베푸는 세례를 받고, 성령의 은사인 방언을 받으면 구원이 종결되는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물세례는 받았으나 방언을 하지 못하면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믿고는,
방언을 받기 위해 몸부림을 치며, 그래도 받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린 것으로 믿어
초조해 하고 좌절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길게 할례에 대해서 논증하는 일차적인 이유는,
구원의 본질이 외형적인 표식이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에 있는 것임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을 거론합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의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을 창대케 하여 복의 근원으로 만드시겠다(창 12:1-2)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브라함은 아내와 함께 여정에 오릅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칠십오 세였습니다.

그의 여정은 험난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요즈음도 위험한 중동지역인데, 당시는 약자나 이방인을 보호하는 법도 없었고,

아브라함을 보호해줄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유일하게 믿을 존재는 오직 하나님이었습니다.
긴장을 단 한순간도 늦출 수 없는 하루하루를 그렇게 장장 10년을 보냈습니다.

10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몇 번이나 나타나셨을까요?
딱 한 번 나타나셨는데,
조카 롯이 소돔 땅으로 떠나고 홀로 남은 아브라함을 위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이상 중에 음성으로만 임하셨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땠을까요?
한번 머릿속에 그려보십시오.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은 도처에 널려 있던 거대한 신전들과 신상들입니다.

원래 아브라함의 가족들은 메소포타미아의 하란 땅에서, 당시는 누구나 그랬듯이, 대대로 우상을 숭배하며 살았습니다.
더군다나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을 만드는 사람이었고, 우상은 아브라함에게 너무나 익숙한 것입니다.
가는 곳마다 화려한 신전과 신상들이 즐비하였습니다.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위험의 와중에 하나님은 나타나지도 않으시고,

하나님의 약속은 실현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10년이나 흘렀습니다.
분명 모든 사람들은 우상숭배로 돌아섰을 것입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2)
그러자 아브라함은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하고 여쭸습니다.
아브라함은 참 무던하고 신실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현재 아브라함의 나이는 85세, 사라의 나이는 75세입니다.
현실성이 전혀 없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한술을 더 뜨십니다.
아브라함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때는 한밤중, 투명한 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떠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5)
아직 자식이 생기기 전인데도 그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니라.”(창 15:6)

그동안 아브라함은 실수도 많았습니다.
아내 사라를 이집트 파라오에게 넘긴 일, 살기 위해서 거짓말 한 일,

하나님의 약속을 자신의  힘으로 이뤄보겠다고 하갈을 첩으로 들인 일 등등,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불가능한 중에서도 줄기차게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약속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15년을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100세가 되어 이삭을 낳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자신과 집안 남자들에게 비로소 할례를 행한 나이가 99세입니다.

사도 바울이 묻습니다.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롬 4:10)
그리고 대답합니다.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그러니까 할례를 받지 않았을 때에도 하나님의 구원은 아브라함에게 이뤄졌고, 그는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중요한 사실을 일깨웁니다.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롬 4:11)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할례는 단지 믿음에 대한 외형적인 표식이라는 것입니다.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의 사랑입니다.
결혼식은 두 사람의 결합을 사람들 앞에서 선언하는 것입니다.
할례나 세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할례나 세례의 형식을 통하여 만인들 앞에서 공포하여 그 믿음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것,

“믿음으로 된 의에 인을 치는 것”입니다.

가톨릭에서는 일 년에 최소한 두 번은 신부를 찾아가 고해성사를 해야 합니다.
죽을 때에도 신부의 입회 아래 종부성사를 하지 않으면 죽은 영혼이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같은 종교의 의무가 개신교에도 점점 많아져 가뜩이나 지친 교인들의 족쇄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아브라함 헤셀이 중요한 말을 하였습니다.
“종교가 법칙이나 교리로, 또한 준행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징벌로 군림할 경우,

그 종교는 인간의 영혼을, 고양시키는 것이 아니라, 능욕한다.
종교는 마땅히 영혼의 불이 거룩하게 타오르는 제단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이유는,
무턱대고 되풀이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행하라는 것입니다.
관습으로 동결시키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으로 경험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의 지평을 넓히고, 삶의 수수께끼와 씨름하는 일에 하나님의 임재와 개입과 사랑을 경험하라는 것입니다.

요즈음 심방은 큰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새로 오신 분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기독교의 본질을 올바로 깨닫고

하나님의 자유와 은혜에 감사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전에는 목사의 가르침대로 아무리 피곤해도 모든 예배와 헌금과 전도에 목숨을 걸어야 했고,
행여 소홀할라치면 벌을 받을까 두려웠다는 것입니다.

한 집사님이 ‘할라카(형식)’와 ‘아가다(의미)’의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며 일상의 삶에서 성실히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거룩은 영어로 holy입니다.
장엄하고 엄숙하고 크고 장대하여 범접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holy는 헬라어 ‘하기오스’에서 파생되었는데, 그리스 신전에서 쓰는 용어입니다.
반면 거룩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카도시’의 뜻은, ‘구별되다.’ ‘밝고 따뜻하고 새로워지다.’입니다.

제사는 영어로 sacrifice입니다.
희생하고 피를 흘리고 뭔가를 신에게 바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또한 헬라어 ‘투시아’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리스 신전에서 사용한 단어입니다.
제사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코르반’의 뜻은 ‘가까워지다. 친밀해지다.’입니다.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세계로 확산시키기 위해 당시 만국 공용어인 헬라어를 차용하여 복음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의 본질을 훼손해서는 안 됩니다.
엄숙하고 장엄하고 벌벌 떨며 정성스런 희생의 예물을 갖다 바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헬라적 개념에 근거한 이방 제사에서 유래한 잘못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 그분과 더욱 가까워지고 친밀해지고, 그분의 임재와 사랑으로
나는 더욱 밝고 따듯하고 새로워지는 것이 진정한 기독교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의 참 뜻입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에 갇혀 지내면서도 일기 쓰기를 잊지 않았던
에티 힐레숨이라는 젊은 여성은,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하나님과의 대화”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가끔 수용소 한 모퉁이에 서서
두 다리로 주님의 땅을 딛고 눈을 들어 하늘나라를 우러러 보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립니다.
하나님에 대한 깊은 감동과 감사의 눈물입니다.

그렇다고 두려움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공포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거기서도 여전히 삶은 아름답다고 말하겠습니다.

나는 수용소의 한 구석에 누워 있습니다.
바싹 말라 뼈만 남았습니다.
현기증이 나고 열이 올라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내 곁에는 꽃 화분이 있고 창문 너머로는 한 조각 하늘이 보입니다.”

힐레숨은 다음과 같이 글을 맺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기 시작했으면 언제나 그분과 더불어 걸어가야 합니다.
삶이란 긴 산책과 같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가끔은 제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성공과 보상에 대한 강박감을 버리면 제정신이 듭니다.

우리가 짓지 않은 강당에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는 것만으로도,
가끔은 주위를 돌아보며 소외된 이웃을 돕는 것만으로도,
더딜지라도 봄이 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시편기자가 노래합니다.
“내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