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내버려 두사 (로마서 1:18~25)

새벽지기1 2017. 12. 2. 07:18


윌리암 톰슨은 그의 책,
“타락한 몸에 빛이 내리는 순간”이라는 책에서, 하나님 입장이 되어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나의 형상을 가진, 자유로운 존재를 만들면 어떨까?
그렇게 하면 악이 이 세상을 찾아오는 모험을 감수해야 하는데......
그들이 그 자유를 갖고 나를 사랑할까? 자발적으로 선한 일에 동참할까?”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로 나는 무엇을 하고 있나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기가 막힌 일을 직접 당하지 않더라도, 살면서 너무나 많은 악한 일들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스러워하고, 그 의심을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유명한 무신론 철학자 잉거솔이 청중들 앞에서 외칩니다.
“하나님이시여, 앞으로 당신에게 5분간 시간을 주겠소. 5분 동안 당신을 저주할 것이요.
만약 당신이 살아 있다면 나를 처벌하시오.”
그는 입에 담을 수 없는 저주로 하나님을 모욕했습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의기양양해진 그는 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여러분 보셨죠? 하나님은 없습니다. 기독교에 속지 마십시오.”

잉거솔처럼 하나님을 모욕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유럽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그분의 기적들을 버렸습니다.
대신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희생적이고도 구체적인 사랑에 포커스를 맞추었습니다.
인간 예수처럼 세상의 부조리와 싸우며 가난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한다면,
이 땅은 하나님 나라가 될 것이라고,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유럽 교회는 힘을 잃어갔고, 교인들은 떠나고 교회는 비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꼭 징계를 받아야 벌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징계가 없으면 괜찮은 줄 압니다.
그런데 징계보다도 더 무서운 벌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반복되는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롬 1:24)

“이러므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버려 두셨으니”(롬 1:26)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사.”(롬 1:28)

“내어버려 두사”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 일을 그냥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유기(遺棄)”라고 부릅니다.
이 하나님의 유기야말로 가장 무서운 벌입니다.

동생 아벨을 죽인 형 가인에게 하나님께서 내리는 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창 4:12)입니다.
동생 살해라는 최악의 범죄에 대한 벌치고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가인은 그 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죄벌이 너무나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창 4:13)
자신이 저지른 일에 비해 벌이 너무 심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들을 피하며 방황하는 삶의 끔찍함을 가인은 잘 알았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유기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모른다면, 그 사람은 가인만도 못합니다.

하나님의 침묵과 유기에 대한 반응 중 심각하게 숙고해봐야 할 반응이 있습니다.
“아니 사랑의 하나님이라면서 어떻게 내버려둘 수가 있어!”라는 반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만 주신 것이 있습니다.
‘자유의지’입니다.
자유의지를 인간에게 주신 것은 하나님의 최대의 모험입니다.
사자는 인간보다 강해도 모든 사자들의 삶은 똑같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독특하고 다양합니다.
모두 자유의지 때문입니다.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으로부터 가장 독특하고 개성 넘치는 영광을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 인간들은 자유의지로 사탄을 선택하고는 하나님을 반역하는데 사용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남은 선택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자유의지를 회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유의지를 박탈한다면 인간들은 로봇이 되어버립니다.
의존적인 인간에게나 맹종하는 로봇이 필요하지, 자존하시는 하나님에게 로봇이 필요 없습니다.
그럴 바에는 세상 문을 닫아버리는 것이 낫습니다.

둘째는 인간이 원하는 바를 다 들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들이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주신다면 세상이 어떻게 될까요?
남북한은 서로 없어지기를 원합니다.
서로 사라져주기를 바라는 상대들은
동시에 모두 사라져버리고 아무도 남아 있질 않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결코 하나님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음이며, 하나님의 가슴 아픈 유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버려두시는 여러 종류의 삶이 오늘 본문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혹시 내가 해당되는지 심각하게 살펴보셔야 합니다.

먼저 “진리를 불의로 가로막은 자들”을 내버려두십니다.

진리란 무엇일까요?
20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능력이 얼마나 기기묘묘한지 개미 한 마리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동남아시아에 가면
벽에 붙어있는 도마뱀을 쉽게 볼 수 있는데 천장에 붙어서 잽싸게 도망갑니다.
과학자들이 그 도마뱀의 발바닥을 연구해보지만 도저히 흉내 낼 수 없습니다.

체코 전 대통령 하벨이 말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잃으면 자신과 모든 사물의 위치를 정해주는 절대적인 좌표를 상실합니다.
상대적인 가치밖에 없는 여러 좌표에 자신을 맞추다 보면 필연적으로 인간의 존재도 서서히
분열되고 그가 속한 세계도 괴멸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영광을 돌리지도 않는 사람들을 내버려두십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21)

하나님을 영화롭게 아니하고 자신만을 위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에도, 내가 잘해서 얻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정말 내가 잘해서일까요?
참으로 허망하기 짝이 없는 생각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습니다.
이를 미련한 마음이라고 합니다.

체스터튼이 말합니다.
“가장 끔찍한 상황은 진정으로 감사를 느끼는데, 정막 감사할 대상이 없는 순간이다.”
그러면서 감사와 기쁨은 참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엄청난 비밀이라고 하였습니다.
감사는 기쁨을 낳고 더 큰 감사를 낳습니다.
자신을 감사의 대상으로 내어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이 버리신 세 번째 삶은 우상숭배로 전락한 삶입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3)

사람들은 별것을 다 숭배합니다.
개구리도 숭배합니다.
통도사에 가면 금와, 금개구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누런 산개구리인데 사람들은 열심히 개구리에게 합장하며 절을 합니다.

우담바라라는 것이 있습니다.
3000년 만에 피는 신비한 꽃이라고 하는데,
몇 년 전 군산 시청 현관문에 피었다고 난리가 났습니다.
사람들이 몰려와서 절을 하고 치성을 드리는데 알고 보니 물잠자리 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너 왜 그러니.”하지 않으시고 그냥 내버려두십니다.

네 번째로 내버려두시는 삶은 “정욕의 노예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롬 1:24)

다섯 번째로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내버려두십니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자, 어떻습니까?
그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다고 자신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소원을 모두 들어주는 대신, 인간의 자유의지를 박탈하는 대신, 하나님께서 택하신
제3의 길이 있습니다.

“너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에게만 하셨을까요?
아닙니다. 모든 이들에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만이 그 말씀을 듣고 떠났습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은 ‘최초의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그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과의 동행이 바로 제3의 길입니다.

우리들에게 성경책을 주셨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됩니다.
하나님을 받아들이시고 그 말씀을 믿고 따르겠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성경 말씀 뿐만 아니라, 온 천하만물과 모든 사건 사고를
통해서 우리를 부르시고 하나님을 따를 것을 촉구하십니다.

로저 보울린은 18세의 고등학생입니다.
그는 위급 사태에 대처하는 해상 수색 구조대에서 자원봉사를 합니다.
그런데 주말만 되면 로저와 그의 동료들은 가슴이 미어지는 비참한 일들을 겪곤 합니다.
빙하지대에서 실종된 등산객을 찾아 나섰다가 엄청난 눈폭풍으로 인해 퇴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끝내 그 실종자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참혹하게 살해된 시신들도 여러 번 목격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중에는 안면이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감당할 수 없는 세상의 부조리와 사악함을 수없이 목격한 로저 보울린이 이런 말을 합니다.
“사람들은 죽음과 비극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끔찍해서일까요?
그저 날씨나 옷이나 야구 경기에 대한 이야기나 하면서 편안히 지내려고만 하였습니다.
죽음이나 죽음에 대한 대비나, 하나님의 존재와 개입에 대해서, 정말 중요한 것들에 대해서
말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결국 로저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부조리와 사악함으로 하나님을 버린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하여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아브라함 헤셀의 말입니다.
“어째서 정의롭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악이 존속하도록 허용하시는가 라는 문제는,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그분의 공의와 사랑이 드러나게 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고난과 고통은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외침이며,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에 참여하자는 간곡한 초대입니다.

어니스트 고든은 24살의 젊은 영국군 장교로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태국의 정글에 끌려가서 철도 공사에 동원되었습니다.
작업장은 지옥 그 자체였습니다.
찌는듯한 더위, 각종 벌레에 풍토병, 형편없는 급식.
일본군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포로들을 죽였습니다.
그 철도를 건설하는데, 1마일당 393명의 포로들이 죽었습니다.
8만 명의 연합군 포로들이 그렇게 죽어갔습니다.

지옥과 같은 그곳의 삶을 더욱 황폐하게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포로들 간의 반목과 생존 경쟁이었습니다.
누가 죽어가도 자신만 편하면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서로에 대한 증오심은 하늘을 찔렀고, 사람들은 야수가 되어갔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지옥을 변화시키는 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하루 일과가 끝나면 작업도구를 꼼꼼히 세었습니다.
그런데 삽 하나가 없어진 것입니다.
일본군은 삽을 훔친 사람 나오라고 소리쳤지만 아무도 나오질 않았습니다.
화가 난 일본군들은 “다 죽인다.”고 소리치며 실탄을 장전하였습니다.
바로 그 순간 한 병사가 앞으로 걸어 나와 차렷 자세를 취하며 말했습니다.
“내가 했습니다.”
광분한 일본군들은 그 병사를 그 자리에서 죽였습니다.
그런데 삽이 없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잘못 센 것입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한 그 병사가 동료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 것입니다.
그날 이후 포로들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야수가 아니었습니다.
증오심도 버렸습니다.
죽어가는 동료들을 보살피고, 숨을 거두면 장례를 치러주고 그를 위하여 함께 기도하고 십자가를
꽂아주었습니다.

새로운 정신이 계속해서 온 수용소 전체에 조용히 퍼져 나갔습니다.
어니스트 고든은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였다는 이유만으로 비공식 군목이 되었습니다.
어릴 때 기억을 더듬어 군목 일을 어설프게 해나갔고, 작은 교회도 세워졌습니다.
매일 저녁 모여서 기도 제목을 내놓고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전공들을 살려 동료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정글대학”이 세워진 것입니다.
역사, 철학, 경제학, 수학, 과학은 물론, 라틴어 그리스어, 러시아어, 산스크리트어를 포함한
아홉 개의 언어를 가르쳤습니다.
예술적 재능을 가진 포로들은 자신들만의 페인트를 만들어 그림을 그려 삭막한 환경을 아름답게
꾸몄습니다.
악기까지 만들어 관현악단까지 만들었습니다.
기억력이 뛰어난 사람이 베토벤, 슈베르트의 교향곡을 통째로 악보 위에 써냈고, 정기적으로
연주회가 열렸습니다.

여기서 변화가 멈춘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완전하게 변했는지, 마침내 해방되었을 때, 극악한 일본군들에게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친절하게 대했습니다.
어니스트 고든의 삶도 바뀌었습니다.
모든 계획을 포기하고 신학교에 가서 장로교 목사가 되었습니다.
어니스트 고든 목사님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목숨으로 바꾼 그 병사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처럼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신성한 삶을 살도록 우리를 애타게 부르고 계셨습니다.”

고든과 연합군 포로들이 갔던 길,
이 길이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가 가기를 원하시는 제3의 길입니다.
생명을 살리고 그 생명이 더욱 풍성해지는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