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나는 복음의 빚을 진 자 (로마서 1:11~17)

새벽지기1 2017. 11. 29. 07:14


인도의 한 수행자의 제자가 스승님에게 아미르라는 친구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아미르는 20년 넘은 친구입니다.
그는 가난하고 무능합니다.
나는 있는 힘껏 그를 도와줬습니다.
내게 돈을 빌려 간 적도 여러 번인데 10만 루피가 넘습니다.
그래도 독촉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급한 일이 생겨 돈을 갚으라고 했는데 돈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미르는 내게 아무런 도움도 안 됩니다.”

수행자가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자네는 누구에게나 하고 싶은 말을 하는가?”
“그렇진 않습니다.”
“자네는 어디서나 마음대로 불평을 늘어놓는가?”
“그렇진 않습니다.”
“자네는 아무에게나 눈치 보지 않고 고민을 털어놓는가?”
“그렇진 않습니다.”
“자네는 단 한 번도 외로워 한 적이 없는가?”
“그렇진 않습니다.”
“자네가 불행하다고 느낄 때, 불평불만을 늘어놓고 싶을 때, 눈치 보지 않고 고민을 털어놓고
싶을 때, 외로울 때, 자네는 누구를 찾아가는가?”
“아미르를 찾아갑니다.”

수행자가 제자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자네가 아미르에게 돈으로는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알겠는가?”

여러분들은 채권자입니까, 아니면 채무자입니까?

존재하는 모든 것은 누군가에 의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더 근원적으로 말하자면 존재 자체가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지구가 우주 공간에 떠 있습니다.
나는 그 지구에서 숨을 쉬며 발을 딛고 삽니다.
이렇게 되는 데 내 자신이 기여한바는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고 살아갑니다.
모두 다 엄청난 채무자인데, 채권자로 살아갑니다.
사실은 빚진 자인데 빚을 받을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상은 시끄럽고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대구에 사는 윤홍기 씨의 이야기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윤홍기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가세가 기울고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공부와 일을 병행하느라 지친 몸에 자신의 처지에 불만이 생겨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단짝 친구 호진이와도 멀어졌습니다.
늘 아버지처럼 옳은 말을 하는 호진이가 싫었습니다.

고3 때, 어머니마저 고혈압으로 드러누우셨습니다.
그러다보니 집세가 석 달치나 밀려 집주인의 성화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결국 학교를 결석하고 막노동을 했습니다.
땡볕 아래서 여러 날 힘겹게 일했습니다.
그런데 돈을 받으려고 전화를 하니 없는 번호라는 안내가 나왔습니다.
눈앞이 깜깜했습니다.

다음 날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 나가보니 호진이었습니다.
호진이는 봉투 하나를 내밀었습니다.
그 안에는 30만 원이 들어있었습니다.
순간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화를 내며 봉투를 돌려주려 하자 호진이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말을 했습니다.
“이 돈은 없어도 그만이지만 친구는 잃고 싶지 않아.”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두 사람은 여전히 둘도 없는 단짝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감사하며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30만 원으로 이런 우정을 살 수 있다니 참 감사한 일입니다.
그래서 각박한 세상에서도 여전히 인생은 아름답습니다.

복음은 헬라어로는 ‘유앙겔리온’, ‘좋은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처음 쓰신 것이 아닙니다.
로마부터 멀리 떨어진  로마 식민지에 사는 로마 시민들에게

황제가 보낸 편지를 ‘유앙겔리온’이라 했습니다.
세계 최강의 로마 황제로부터 온 소식은,

대개 로마 시민들에게는 큰 이익이 되는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로마서는 최고의 영화를 누리고 있는 로마에, 예수님의 전권 대사 사도 바울을 통해 보낸
예수님의 칙서라고 했습니다.
로마서에서 사용된 단어들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것이었습니다.
종, 사도, 예수 그리스도의 것, 복음 등등.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단어들에 전혀 새로운 개념들을 담아 놓으셨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똑같은 방법을 행하면서도 다른 결과나 좋은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이 말을 기독교 버전으로 바꾸면 이렇습니다.
로마 황제에서 여호와 하나님으로 바꾸었을 뿐, 여전히 같은 마음으로 섬기면서 같은 것을
바라는 것은 미친 짓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담아 놓은 그 새로운 개념들을 배우고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 곧 신앙생활의 본질입니다.

로마 황제는 ‘번영’을 약속합니다.
황제의 번영은 ‘정복과 소유’를 통해서 이룩하는 것입니다.
번영의 목표는 ‘육신의 안락’입니다.
이것이 로마 황제의 유앙겔리온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도 ‘번영’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다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창 12:2)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번영은 로마 황제의 번영과는 그 차원이 전혀 다릅니다.
‘여호와 샬롬’이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번영은,

단순히 몸의 안락을 넘어, 몸과 마음과 영혼의 소생을 의미합니다.
이 여호와 샬롬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잠깐, 세상 사람들도 사람들과의 관계를 중시하는데요.”라고 반문합니다.
그렇습니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인맥’이 필수라고 합니다.
인맥도 분명 관계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인위적으로 맺는 관계입니다.

인위적이라는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위(人爲), 사람을 위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인(人)자와 위(爲)를 합하면 사이비 ‘위’(僞)자가 됩니다.
‘가짜’라는 뜻입니다.

로마 시대 때의 최고의 인맥은 황제와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황제와의 관계가 가짜라는 것은 로마 황제들이 자체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BC27년에서 AD284년까지 로마가 분열 통치하기 전까지 300여 년 동안 49명의 황제가 있었는데,
평균 재임 기간은 6년 남짓입니다.
그런데 25명의 황제가 암살을 당했고, 4명이 자살하였습니다.
암살이 두려워 황제 자리를 거절한 장군도 있습니다.
그나마 현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밖의 황제들도 전사 내지는 병사, 포로로 잡혀가 처형된 황제도 있습니다.
자연사한 황제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들의 불행의 원인을, 진실하지 못한 관계에서 생기는 갈등과 반목 때문이라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이 아닙니다.
결혼마저도 그 사람과의 관계보다는 그 사람을 소유하기 위해서 합니다.
첫 출발부터 잘못되었습니다.

최초의 살인은 형제 사이에서 일어났습니다.
범인은 형 가인입니다.
그런데 가인의 이름의 뜻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소유와 획득’이라는 뜻입니다.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곧 로마 황제와 모든 사람들이 번영을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채택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셔야 합니다.
로마 황제들의 반복되는 암살과 가인에 의한 동생 아벨의 살해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당시 가장 경건하다고 자타가 공인했던 바리새인들의 숨겨진 탐욕을 질타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저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눅 16:14)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음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눅 11:50-51)

자신의 이득에 반하는 모든 사람들을 제거하려고 합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마음에 새기셔야 합니다.
인생의 목표가 소유와 획득인 사람은 반드시 가인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가인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당시의 로마 교회는 어땠을까요?
그들의 숫자는 많아야 수십, 수백 명이었을 것이고, 당시 누구나 그랬던 것처럼

어느 가정집에 모여 예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로마 교회는, 세상을 호령하는 거대 찬란한 로마에서 벌레만도 못한 존재들이었습니다.
또한 로마 교회를 누가 세웠는지도 모릅니다.
가톨릭은 베드로가 세웠다고 주장하지만 그에 대한 근거를 찾을 수 없습니다.
자생적으로, 예루살렘에서 신생 기독교의 가르침을 들었거나 박해를 피해 그 멀리까지 갔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생겼다고 하는 것이 더 옳습니다.
즉, 특별한 지도자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성경책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인편을 통해서 또는 풍문으로 로마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소식이 들려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롬 1:8)

지도자도 체계적인 가르침도 없음에도 그들의 믿음 생활이 바울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로마 교인들의 신앙생활을, 오늘날로 비유하자면, 북한의 지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며,
중동 회교 국가에서 예수님을 믿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목숨을 담보하는 일이며, 그 어떤 위험도 감수하는 일이며, 모든 권리를 포기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들이 어디에 생명을 걸었는지 사도 바울은 잘 알았습니다.

그들은 소유와 획득을 통한 번영 추구를 멈추기로 한 것입니다.
가인이 되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기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택했던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자녀는 그렇게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들처럼 번영을 기대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놀란 것은 로마 교인들의 믿음의 순수성 때문입니다.
한 줌도 안 되는 그들의 고투를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함이니”(롬 1:11)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함뿐만 아닙니다.
이를 넘어섭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롬 1:12)

저는 여러분들을 가르치는 목사입니다.
그런데 심방을 다니며 우리 교회 식구들로부터 큰 감동과 격려와 위로를 받을 뿐만 아니라,
“정말 잘 해야 하겠구나. 제대로 올바로 하나님을 가르쳐야 하겠구나.” 하는 새로운 다짐을 하게 됩니다.

평생을 교회와 목사님을 위해서 사신 분이 있습니다.
열심히 일해 번 돈을 교회와 목사님을 위해서 아낌없이 썼습니다.
그러다가 성서학당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자신이 옳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빚을 졌다는 것을 깨닫고 그동안 상처를 주었던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 말을 들으며 어떻게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빚진 자의 심정이 되지 않을 수 있겠으며, 더 잘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흔히 하는 생각, “나 없으면 그 일이 될 것 같아?”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채권자의 심정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어야 일이 잘됩니다.
나 같은 사람을 사용하여 이런 일들이 이뤄지다니, 그저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이것이 빚진 자의 심정입니다.
그래서 3월부터 청주로 내려갑니다.
청주에 좋은 교회가 세워지기를 기도해 주십시오,

멀리서 오시는 분들에게 당부합니다.
여기서 열심히 배워서 그곳에서 복음의 빚을 갚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지도자도 성경책도 없는 로마 교인들이 아름다운 신앙을 굳게 세웠음을 기억하십시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도 있나 하시겠지만 굉장히 많습니다.
대부분 자신도 모르게 그럴 것입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는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그렇게 해서 밥이라도 먹겠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성경의 가르침을 모두 복 받는 수단으로 바꿔놓은 기복주의입니다.

모세가 말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쌓은 단 곁에 아무 나무로든지 아세라 상을 세우지 말며,
자기를 위하여 주상을 세우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신 16:21-22)

‘하나님을 위한’ 제단에 ‘자기를 위한’ 어떤 것도 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로부터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우리 교회에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여러분들께 너무나 감사한 일입니다.

당부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만나게 된 소중한 믿음의 친구들을

서로 돌아보아 신뢰와 사랑을 심화시켜 나가시기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자신을 위한 그 어떤 이익도 도모하지 마시고, 어떻게 하면 어려운 친구들을
살릴까 그 생각만 하면서 서로 지혜를 모르고 아이디어를 개발하기로 합시다.
그래서 저 교회에 가면 살아난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기로 합시다.

또한 세상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소유와 획득을 통해 내 이익을 챙기려는 생각은 절대로 하지 않기로 합시다.
그렇게 해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웃들을 살리는 일을 기획하고 실행하십시오.
그 일을 통해 반드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것을 내 자신이 온몸으로 체험해야 합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롬 1:17)

믿음으로 시작해서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으로 마치는 것이 의인입니다.
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능력을 온몸으로 체험하며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